연무지회 (1)
‘쉽다고 생각하나?’
제갈후는 백무량의 웃음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누구던가?
호사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청송.
강호에서 때가 묻을 대로 묻은 노강호였다. 자존심과 고집을 꺾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백무량이 기대할 문파가 있다면 남존무당과 북숭소림.
강호의 도가와 불가를 대표하는 무당과 소림이라면 후배의 검무를 겸허하게 봐줄 것이다.
‘나머지 세 문파는 어떻게 인정시킬꼬?’
후기지수에 불과한 백무량에게 불가능한 제안이 아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림맹에 중재를 부탁하는 것이 최선이다.
제갈후가 백무량에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보게, 구파일방의 장로들을 인정시키느니 무림맹주님께 중재를 맡기는 게 어떤가?”
그 말에 백무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곧바로 툭 튀어나오려는 말을 되삼킨 것 같았다.
그렇게 생긴 잠깐의 침묵 이후.
백무량은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구파일방에 허리를 굽힌다면 언제까지 굽혀야 하겠습니까?”
“허어……!”
제갈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깜짝 놀랐다.
백무량의 목적은 곤륜파가 본래 명예를 되찾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목소리에서 무인의 의지와 곤륜도의 자존심이 느껴졌다.
‘평범한 후기지수였다면 고집 피우지 말라며 꾸짖었겠지만…….’
이화겸을 쓰러트린 공적은 허투루 말할 수 없다.
백무량은 저렇게 말할 자격이 있었다. 적어도 제갈후는 그렇게 판단했다.
“곤륜신성(崑崙新星)은 신성(神聖)이 되기를 바라는가?”
“그래야 한다면 기꺼이…….”
백무량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제갈후는 속으로 감탄을 연거푸 토했다.
‘우리가 잘못 판단했구나!’
무림의 별호에 왕과 황, 제는 많다. 관의 눈초리를 받을지언정 강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무림인의 본능과 같았다.
하지만 신(神)은 무엇인가.
한 문파의 제일고수임을 증명하고, 남들의 질시와 인정을 받는 자리다.
그것을 약관도 안 되는 나이에 쟁취하겠다. 백무량의 대답은 오만했지만, 무인의 피를 끓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제갈후의 태도가 후기지수를 대하는 것에서 점차 진지하게 변했다.
“맹주님께 전달하겠네.”
“빠를수록 좋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 한마디를 끝으로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일군사실을 나오면서 조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갈후와 백무량의 대화를 보면서 하나의 벽이 느껴졌다.
돈을 다루는 상인과 무공을 익히는 무인.
대화의 방식 자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제가 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무림맹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았습니다.”
“저에게도 알려 주시겠습니까?”
백무량이 빙긋 웃으며 무림맹 밖을 턱짓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이야기하기엔 듣는 귀가 많다.
그 뜻을 알아차린 조윤이 아, 소리를 냈다. 수많은 말들이 돌아다니는 시장과는 다르게 무림맹은 귀가 밝은 자가 너무나도 많았다.
조윤은 궁금증을 꾹 참으며 백무량과 함께 객잔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이 층까지 오고 나서야 백무량이 입을 열었다.
“청성산에서 제가 행한 일이라면 무림맹에서 상을 줘야 당연합니다. 그런데 일군사는 우리에게 기싸움을 벌였지요. 이유가 뭐겠습니까?”
“협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계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백무량은 무림맹주인 남궁진이 삼 년 전에 보냈던 서신을 떠올렸다.
-안부는 생략한다. 앞으로 잘해 주길 바란다.
그걸 본 송우현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었다.
-장난질 반, 주제 파악해라 반.
남궁진 특유의 권위주의와 무림맹을 중시하는 태도가 뻔히 보인다며, 송우현이 말을 덧붙였었다.
그걸 생각했을 때 무림맹주의 저의가 뻔히 보였다.
“무림맹주와 일군사는 제가 제안을 거절하고 부탁하길 바랐을 겁니다.”
“……아!”
조윤이 탄성을 터트렸다. 백무량의 한마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세간에서는 곤륜파가 무림맹과 손을 잡았다고 볼 것이고, 갑과 을을 판단하겠지요.”
“불쾌하지 않습니까?”
백무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곤륜파가 명예를 되찾는 걸 무림맹의 권위를 세우는 데 이용하고, 굳이 받지 않아도 될 은혜를 입힌다니, 협잡질이나 다를 바 없지요.”
“……하지만.”
제갈후의 말대로 구파일방의 장로들을 인정하게 만드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나.
조윤은 속마음을 삼켰다. 저렇게 불쾌해하는 백무량에게 밝힐 수가 없었다.
그건 백무량 또한 염려하고 있었다.
“억지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제가 생각하기엔 그렇습니다.”
“뭐, 그렇게 되면 구파일방에 매달리지 맙시다.”
백무량의 말에 조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의 자존심으로 구파일방을 포기한다면 잃을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나 백무량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겨우 그 정도 그릇밖에 되지 않는단 소리니까…….”
조윤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 머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굽히게 만들려거든 그만한 자격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무량의 의미심장한 말에 조윤은 침음을 삼켰다.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백무량이 무언가 일을 벌일 것 같았다.
‘여기서는 말리는 것이 상책이겠지만…….’
백무량이라면 해낼지도 모른다.
삼 년 전, 사천당가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조윤은 백무량을 꽤 신뢰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뭇 놀라웠다.
‘언제나 확률과 경우를 셈했던 내가 정확한 근거 없이 사람을 믿게 되다니.’
조윤이 백무량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갈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높디높은 콧대를 부숴 주는 게 좋겠지요.”
“하하.”
백무량은 유쾌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항상 자신에게 따져 물었던 조윤이 오늘은 말없이 긍정했다. 자신의 행동을 신뢰하기 시작했단 뜻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씩 마음을 열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제는 말해 줄 수 있었다.
“무림맹이 구파일방을 불러모으는 동안 사천성을 다녀올까 합니다.”
“갑자기요?”
“예.”
백무량은 송우현의 괴팍한 표정을 떠올렸다.
“물건을 언제까지 맡길 건지 화를 내는 사람이 있거든요.”
아미복호검.
사천성으로 향할 때 우연히 얻은 옛 비급.
제갈후에겐 곤륜파가 구파일방이 되는 날 찾아가겠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무림맹에 댈 명분일 뿐.
가능하면 빨리 돌려주는 것이 나았다.
“열흘 사이에 다녀오겠습니다.”
백무량은 곧바로 사천의 아미산으로 향했다.
***
경외와 존경, 시기와 질투.
사천의 무인은 두 가지 시선으로 백무량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어릴수록 전자에 가까웠고 도관을 꾹 눌러쓴 도사라면 대부분 후자였다.
“사대사행을 돌파하고 마인까지 격파했다니, 필시 무림맹이 무언가 짜낸 거겠지.”
“암! 솜털도 가시지 않은 청년이지 않은가!”
‘말본새를 보아하니 속가제자인 모양이군.’
기명제자라면 청성파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저잣거리에서 저렇게 말하진 않았을 터였다.
‘어중이떠중이와 시시비비를 가리기엔 시간이 아깝다.’
백무량은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한 도사가 백무량의 귓전을 자극했다.
“오만한 놈 하나 때문에 연무지회(硏武知會)가 열리다니…….”
“연무지회가 뭐냐?”
“허억!”
도사가 심장을 토할 것처럼 깜짝 놀랐다.
백무량은 그것이 퍽 우스웠다.
“남을 헐뜯으려거든 주둥이를 얻어맞을 각오는 했어야지.”
“주, 주둥이라니…… 소협, 말이 심하네.”
식은땀을 줄줄 흘린 도사가 잘 정돈한 수염을 매만졌다. 자기가 나이가 더 많으니 적어도 공대를 하라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백무량은 쥐뿔도 존중하지 않았다.
“존장의 대우를 받고 싶거든 그럴 만한 본보기를 보였어야지.”
“크흠!”
“기분이 나쁘다면 내가 먼저 나빴으니 검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도 좋은데…….”
백무량은 검을 매만졌다.
그 모습을 본 도사가 대경실색하여 사과했다.
“내가 잘못했네. 그래, 연무지회가 뭐냐고 물었었지?”
“말해 주시오.”
“그게, 연무지회가 뭐냐면…….”
도사의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던 것에 이름이 붙은 게 전부였다.
구파일방의 장로들에게 곤륜신성이 무공을 선보인다.
그것을 멋들어진 한자를 조합하여, 연무지회.
누가 보더라도 후기지수가 장로들에게 무공을 선보이는 자리처럼 들렸다.
그것을 신청한 사람이 백무량이니, 남들이 보기엔 더욱 오만하게 보였을 터였다.
‘나 같아도 욕은 했겠네. 하지만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하진 않지.’
백무량은 싸늘한 시선으로 도사를 쳐다보았다. 압박을 이기지 못한 도사가 슬슬 뒷걸음질 치다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이제 또 어딘가에서 말할 게 뻔했다.
실제로 마주했는데 과연 소문대로 오만하고 괴팍하더라, 이런 이야기.
“사형이 들으면 웃었겠네.”
어떻게 네가 삼 년 동안 자기 성질을 참았냐며, 포복절도하리라.
어찌 보면 송우현과 개방도인 주겸 덕택이었다.
백무량이 자기 성질을 드러낼 때마다 돈으로 입을 막거나 소문을 없애 버렸으니까.
‘대외적으로는 사천당가의 은인이자 사대사행을 돌파한 후기지수인가.’
그 표상(表象)이 이번 연무지회로 인해 깨졌다.
구파일방의 눈초리가 제법 사납다는 뜻이다. 백무량은 그저 웃었다.
‘나를 경계하고 있다면, 보는 눈은 있는 모양인데.’
두렵지 않았다면 이런 소문이 퍼지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렇다고 곤륜파를 밀어낼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백련교.
그들이 존재하는 이상, 그들과 대적했던 곤륜파의 도움이 절실할 테니까.
‘잡생각이 계속 꼬리를 무는구나.’
백무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백련교만 회상하면 꼭 머릿속이 번잡해졌다.
사실 이화겸을 죽일 때도 성급하기 그지없었다.
고성진이나 청성파 도사들의 안위를 생각하지도 않은 채 움직였다는 건, 냉정을 잃었다는 반증이다.
‘안 좋은 버릇이야.’
백무량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렇게 복기를 마친 뒤, 사천성 성도를 빠져나갔다. 자신에게 따라붙는 걸음과 시선이 있었다.
걸음은 아미복호검을 든 채 다가오는 상인이요, 시선은 과거 곤륜산에서 내쫓아 버린 노도사였다.
제자리에서 멈춰 선 백무량이 노도사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앙심이라도 품으셨소?”
“청성파의 도맥을 손아귀에 잡고 흔들려는 것을 알고도 가만히 있을 것 같았느냐!”
노도사의 일갈에 백무량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언제는 곤륜도였다고 하지 않았소. 나이를 먹고서 여기저기 박쥐처럼 잘 붙어 다닌 모양이오?”
“그게 중요하더냐!”
노도사가 시뻘게진 얼굴로 백무량을 손가락질했다. 자기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앎에도 그는 뻔뻔했다.
“사대사행을 돌파했다는 걸 누가 증명할 수 있겠느냐! 보나 마나 무림맹이 꼬드겼겠지!”
“하면 직접 받아 보면 알 일 아니오?”
스르릉.
백무량은 검을 뽑았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발검에 노도사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마지막으로 마주한 뒤로 삼 년.
열여섯 살의 백무량이 품은 기세는 어떤 노강호보다도 심후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칠십여 년 전, 백련교의 난.
단신으로 청성파를 멸문시킨 이화겸 같은 마인이 최소 셋 이상 존재하던 그때, 그날에 싸웠던 무인이 바로 백무량이었다.
그 경험은 몸이 어려졌을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도전하겠나?”
백무량의 하대에 노도사가 검을 부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