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운 (5)
청성파가 백련교도에게 멸문당했다!
구파일방이 한 사람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모든 강호인이 전율했다. 강호가 그동안 평화에 젖었다고 한탄하는 이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 있었다.
“대체 백련교의 난을 막았던 당시의 곤륜파는 얼마나 강했던 건가!”
좌호법 이화겸 한 명이 청성파의 장문인을 비롯해, 모든 도사를 흡공하여 죽였다.
그 이화겸이 지존으로 모시는 자.
백련교주와 맞서 싸웠던 곤륜파의 장문인인 주자령과 제자 백무량의 경지가 자연스레 강호의 화두로 올랐다.
그러다 보니 이화겸을 죽인 백무량의 명성과 의문이 강호에 횡행했다.
“곤륜파가 침묵하는 동안 괴물을 길러 냈군.”
“하지만 그게 말이 되나? 청성파가 모두 달려들어서 이기지 못한 마인을 약관도 되지 않은 아이가 죽였다니.”
강호의 소문은 이리저리 바뀌다가 한 방향으로 안착되기 시작했다.
“청성파와 싸우느라 힘이 빠진 마인을 곤륜신성이 죽였겠지.”
“하긴, 그게 자연스럽군.”
소문의 일부분은 사실이긴 했다.
청성파와 싸우면서 마기를 소진한 상태에서 백무량에게 패배했다는 사실, 단 하나.
이화겸은 그 상태로도 다른 구파일방의 장문인과 자웅을 겨룰 수 있었다.
그걸 이긴 건 오로지 백무량의 성취요, 경지였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일찍이 백무량을 만났던 현천신검 척준환.
백무량의 소식을 일찍이 접하고 있던 무림맹주 남궁진.
둘은 백무량의 강함을 알고 있었지만, 말을 아꼈다.
‘강호의 질투란 집요하기가 거머리 같아서, 아직 곤륜파가 감당하기가 어렵다.’
‘지금 저 소문을 내가 부정해 버리면 백련교의 잔당이 백무량을 기습할 것이다.’
두 절대고수의 판단은 실로 옳았다.
섬서성에 있던 또 다른 마인.
청노가 강호의 소문을 듣고 계획을 취소했다.
“어린놈이 저런 소문을 들으면 울컥할 만도 한데, 가만히 있는 걸 보니 사실이겠군.”
원탁을 중심으로 한 세 자리.
그중 한 자리는 비어 있었고, 두 자리엔 청노와 괴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대로 두자고?”
“가만히 있으면 될 일 아니겠느냐?”
“앞으로 운신(運身)이 갑갑해질 걸 생각하면 화풀이라도 하고 싶은데 말이야.”
괴성이 툴툴거리자 청노는 속으로 그를 욕했다.
‘도대체 저놈은 대업의 중요도를 모르는 건가?’
앞으로 십 년.
그 안에 수백 년의 대업이 이루어지느냐, 실패하느냐가 달려 있었다.
한데 괴성은 지루한 게 싫다면서 아미파를 건드리지 않나, 오대세가의 고수를 죽이는 둥.
한 집단의 수장(首長)처럼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곤륜파를 지켜보긴 하겠지만, 건드리면 안 된다.”
“나는 저 꼴이 되기 전에 죽어야겠네.”
“뭐야?”
“나이를 너무 먹으니 사는 게 더 간절해 보이잖아. 추해지기 전에 죽는 게 낫지.”
그 말에 청노가 노려보자 괴성이 원숭이처럼 웃었다. 누가 봐도 상대의 복장을 터트리려는 태도였다.
한숨을 내쉰 청노는 수옥을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탈출을 포기했는지, 백련교주가 가부좌를 튼 채로 명상하고 있었다.
‘칠백 년을 무상(無狀)한 세계에서 지냈음에도 아직까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단 말인가.’
청노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백련교주를 봉인한 지 칠십 년째. 수옥 안은 바깥보다 열 배는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산도, 들판도, 냇물조차 없는 무의 세계.
무계봉신술(無界封神術)을 당했음에도 백련교주는 육체와 정신 모두 쇠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었다.
‘만약 그때 봉인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청노의 머릿속에 당시 상황이 떠올랐다. 식은땀이 절로 흐르는 과거였다.
그때 함께 있었던 괴성 또한 수옥을 노려보았다.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괜히 괴력난신이겠느냐.”
“하긴.”
괴성은 혀를 가볍게 찼다. 청노의 무계봉신술은 과거에 보았던 적이 있었다.
과거 무신이라 불리던 절대 고수가 백 년을 버티지 못했으니까.
그에 비해 백련교주는 무려 칠백 년.
인간의 몸으로 신을 자칭하던 무인보다 일곱 배의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백련교주가 죽을 때까지 여기서 대기하마.”
“그래.”
“너는 그동안 염화(炎火)를 도와주어라.”
“그놈, 맘에 안 드는데.”
괴성이 툴툴거렸다. 청노라고 염화가 맘에 드는 건 아니었다.
그의 방식은 아름답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유능한 사람은 없지.”
“그게 재수없다는 거야. 알았어. 이제 가 볼게.”
괴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청노의 시선이 다시 수옥으로 향했다.
“……!”
백련교주와 순간 눈이 마주친 것 같아, 청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
“들어오게.”
방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백무량과 조윤이 안으로 걸어갔다.
다만 발소리에 담긴 감정은 달랐다.
백무량의 보보는 힘이 담겨 당당했지만, 조윤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중 부담스럽다는 감정이 컸다.
‘이번 기회에 신뢰를 얻어야 한다.’
자신을 불러들인 목소리의 주인.
무림맹의 일군사, 제갈후가 문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누가 들어오든 시선조차 주지 않는 태도에서 상대를 압박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그 의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 조윤이 철저히 을이기 때문이다.
“무슨 용건으로 왔는가?”
‘알면서 묻는군.’
용건을 모른다면 애초에 일군사와 마주할 수 없었다. 무림맹에 속한 문관에게 몇 마디 나누는 게 전부였을 터였다.
제갈후가 내심 품고 있는 결론도 있을 것이다.
조윤은 백무량에게 고개를 돌렸다. 허락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말씀하십시오.]
백무량의 전음에 조윤이 눈을 끔뻑이고는 제갈후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제갈후가 문서를 정리하고 조윤과 시선을 마주했다.
“청성파에서 있었던 일을 논하고자 합니다.”
백련교도 이화겸을 죽인 공로와 청성파의 향후를 논하는 자리.
이른바 논공행상.
그것을 위해 조윤이 백무량과 함께 무림맹까지 온 까닭은 송우현의 한마디였다.
-제갈세가 사람한테 네가 직접 말하겠다? 원숭이가 학한테 말로 이기겠다는 소릴 하는구나. 옆에 좋은 사람을 두고도 왜 혼자서 그러느냐?
송우현의 신랄한 비난이 백무량을 설득한 것이다.
조윤을 향한 배려이기도 했다.
‘삼 년 동안 보좌했는데도 신뢰를 얻질 못했으니…….’
조윤이 일을 못 했거나 실수를 했다면 억울하지도 않았다.
그냥 백무량이 조윤을 믿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의심암귀에 걸린 까닭이 대체 뭔지, 참.’
조윤이 속으로 불만거리를 중얼거렸다. 물론 그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옆에 있는 백무량이 구천검 백무량이며, 백련교의 난 이후로 강호에 큰 배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때 백무량이 또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무림맹이 강호를 지탱하는 기둥이라고는 하나, 쉽게 믿지 마시오.]
조윤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제갈후가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소문은 익히 들었네! 옆에 있는 소협이 좌호법 이화겸을 죽인 곤륜신성이신가?”
“예. 제가 곤륜신성 백무량입니다.”
백무량이 두 손을 모아 올리자 제갈후는 빙긋 웃었다.
가늘어진 눈가 사이가 빠르게 굴렀다. 상대의 역량과 기세, 태도를 재려는 시선이었다.
그것을 알아보는 건 하루에 사람을 수없이 만나는 사람뿐이다.
조윤이 껄껄 웃어 제갈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제가 모시는 대협이지요.”
“허허, 소협을 대협으로 모신단 말입니까?”
소협과 대협.
그 미묘한 차이를 깨달은 백무량이 인상을 찌푸렸다. 말과 글을 다루는 사람 아니랄까 봐, 사소한 데에서 신경전을 불태우고 있었다.
불쾌하게 바뀌려던 분위기를 끊은 건 조윤이었다.
“뭐,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결과를 정하는 건 조윤이 아니라 제갈후.
‘아직은’ 을인 조윤으로선 축객령으로 내쫓기는 건 피해야 했다.
“위기에 처한 청성파와 붙잡힌 공동파의 도사 고성진을 구했으며, 사대사행의 끝인 불영행을 돌파했다는 점이지요.”
“…….”
제갈후가 잠시 침묵했다.
조윤이 보기에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흐름.
조윤이 앞세운 말들의 흐름을 꺼트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찰나가 지나고, 제갈후의 첫 마디는 긍정이었다.
“나도 알고 있네. 강호에 속한 무인이라면 모두 관심을 가질 업적이지.”
“그렇다면…….”
“하지만 원하는 것이 너무 많네.”
제갈후의 시선이 한쪽으로 치워 놓은 서신으로 향했다.
“곤륜파의 명예를 되돌리는 것이야 당연하다지만, 불영행의 가르침을 청성파에 베푸는 대신 복속시키겠다니?”
“군사님께서는 아시지 않습니까. 청성파가 운산보를 계책했다는 것을요.”
“아직 그 증거를 강호에 풀지 않았지.”
“곧 만금상단과 공동파를 통해서 발표할 겁니다.”
공과 명분 모두 백무량과 곤륜파에게 있다.
그것을 알기에 제갈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꺼내기 싫은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단 눈치였다.
“다른 구파일방이 가만히 있진 않을 걸세. 아니, 허락하지 않겠지.”
구파일방은 어느 한쪽이 너무 강해지는 걸 원치 않는다.
제갈후가 그 점을 짚자 조윤이 미리 준비한 답을 꺼냈다.
“공동파가 곤륜을 비호할 겁니다. 무엇보다 청성파 쪽에서 원하겠지요.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남긴 가르침이 있으니까요.”
“……음.”
제갈후가 침음을 흘렸다. 고민이 깊은 듯 이맛살이 깊게 패였다.
“자네도 이미 알겠지만, 아미파가 봉문에 가까운 침묵을 한 지 너무 오래되었네. 그녀들을 대변할 문파를 정해 두지도 않았지.”
“그래서 안 된다는 겁니까?”
백무량이 갑작스레 목소리를 내자, 두 남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특히 제갈후의 시선에 흥미로운 기색이 가득했다.
‘맹주님께서 백무량을 계속 지켜보라고 하셨는데, 직접 대화할 기회로군.’
제갈후는 이러한 속내를 숨긴 채 수염을 매만졌다.
“아직 안 된다고는 하지 않았네.”
“이러저러하니 그럴 수 없다는 것처럼 들려서 말입니다.”
백무량의 대답이 무척 도발적이었기에 조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칫 잘못하면 여기서 나가라고 할지도 모른다.’
조윤은 반쯤 엎드릴 것처럼 제갈후에게 사죄를 구했다.
“대협께서 시간이 없으셔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시간이라니?”
제갈후가 가볍게 되묻자, 백무량이 대답했다.
“아미파에 중요한 볼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미파는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봉문하고 있지요. 대화를 요구하려고 한다면 그만한 격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구파일방의 문파는 되어야 한다.
백무량의 진중한 말에 제갈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볼일인지 말해 줄 수 있는가?”
“무인끼리의 일입니다.”
무인이 아닌 군사에게는 답하기가 어렵다.
백무량의 가시 돋친 말에 제갈후가 껄껄 웃고 말았다.
“내가 무림맹의 일군사임에도 말할 수 없다?”
“백련교의 좌호법을 죽이고도 소협 취급을 받아야 한다면, 나 또한 똑같이 행하는 수밖에 없지요.”
“……허.”
이제는 웃을 수가 없었다. 제갈후는 백무량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바라보았다.
‘보통 후기지수라면 나를 보고 긴장하기 마련이거늘.’
제갈후가 무림맹의 일군사이기는 하나 제갈세가의 무공을 익힌 고수였다.
한데 후기지수인 백무량에게 이런 무시를 당하니 우습기도 했고, 놀랍기도 했다.
그때 백무량이 제갈후의 의표를 찔렀다.
“어차피 저를 도우려고 나온 자리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무림맹주께서 삼 년 전에 저에게 서신을 보낸 걸로 압니다. 그리고 지금은 일군사께서 제 앞에 있지요.”
무림맹의 중대사를 정하는 일군사 제갈후.
사실상 부맹주라 불리는 그가 일개 후기지수와 상인을 마주한다는 건 무림맹주의 뜻이나 마찬가지다.
그걸 아는 백무량은 제갈후에게 눈으로 말했다.
-기싸움은 여기서 그만두고, 본론으로 가자.
그 뜻을 알아차린 제갈후가 고개를 내저었다.
백무량을 일반적인 후기지수로 판단했던 것이 오판이었다.
“좋네. 그럼 맹주님께서 하려던 제안을 말하겠네.”
“…….”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불영행을 돌파하여 얻은 가르침과 곤륜파의 강함을 검으로 증명하게.”
그 말에 백무량이 씨익 웃었다.
단순하고, 명쾌한 것이야말로 백무량의 장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