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93화 (93/275)

각운 (4)

칠십여 년 전.

“염천(炎天)이란 무엇이냐?”

사부, 주자령이 백무량에게 물었다.

곤륜산맥답지 않게 부단히 더운 날로 기억한다.

백무량은 도사다운 체통 없이 왼손으로 옷깃을 펄럭거렸다.

“오늘처럼 몹시 더운 날이 아니겠습니까?”

“너는 피부로 느껴지는 현상(現狀)만을 말하는구나.”

“사부님께서 아시듯이 저는 단순한 놈이라서 말입니다.”

하하, 백무량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사실 웃을 상황은 아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백련교.

수십, 수백의 무인으로 이루어진 교세가 등산로에 불을 내며 올라오고 있었다.

저 불은 곤륜파마저 먹어 치우고 말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백무량의 시선이 옆에서 등 뒤로 향했다. 도적에 이름을 남긴 곤륜도들이 검을 매만지면서 심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몹시 더웠다.

다가올 싸움의 열기와 두려움, 결의가 몸을 뜨겁게 달구는 것 같았다.

백무량이 뜨거운 숨을 내뱉는 사이, 주자령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량아. 지금을 기억하거라.”

“……?”

“염천이란, 구천의 남쪽 하늘. 몹시 더운 날씨를 뜻하나…… 도사란 글자에 얽매여선 안 된다. 안에 있는 진의와 참된 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걸 지금 왜…….”

백무량은 인상을 찌푸렸다. 주자령의 목소리가 마치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가르침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가 그러했다.

주자령은 온몸으로 전율하고 있었다.

산 중턱의 백련교주라는 존재가 주자령의 천명을 죽음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괴력난신이로다.’

하늘이 정한 뜻을 억지로 휘어잡고, 바꾸어 버리는 존재.

백련교주가 가까워질수록 주자령의 심상은 과거를 더듬어 갔다.

종착지는 부모를 잃은 고아, 백무량을 곤륜파에 입문시킨 기억이다.

주자령은 후회를 입에 담았다.

“기한이 이리도 짧을 줄 알았다면, 너를 강호에 보내지 말았어야 했거늘. 후회가 막심하구나. 네가 날 원망할지언정 끌어안고 있어야 했던 게야.”

“사부님……?”

“무량아, 아니, 제자야.”

주자령은 백무량에게 전음을 흘렸다.

[네 사형, 백천이를 부탁한다.]

아들의 생존을 부탁하는 아비의 마음은 어떠할 것인가.

백무량은 입술을 어물거렸다. 나약한 소리는 하지 말고 살아서 웃을 생각이나 하라며 꾸짖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백련교가 너무나도 강하다.

“그러하겠습니다.”

백무량의 대답에 주자령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때 저 멀리 있던 주백천이 백무량을 향해 소리쳤다.

“무량아, 이리로 와 보거라!”

“예!”

백무량은 주백천을 비롯한 네 명의 학도사에게 달려갔다.

그렇게 시간은 무정하게 흐르고.

지금.

‘사부가 그때 말했던 염천이란 무엇이었을까?’

백무량은 옛 기억을 더듬어, 염천일원의 심의(深意)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빚어진 검경의 일부가 이화겸이 펼친 탐랑을 깨부순다.

꽈광!

이화겸은 백무량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빌어먹을 도사 놈,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린 이화겸이 발을 바삐 놀렸다. 백무량의 눈동자가 마치 돈오를 겪은 노승처럼 변화하고 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선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이화겸은 우수를 앞으로 내질렀다. 조금 전 운해를 꿰뚫었던 파자권에 무수한 마기가 깃들었다.

쿠구궁!

불영행의 입구가 일부 무너졌다. 우수수 떨어진 먼지가 백무량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귀찮게.”

백무량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에게 놀라기도 했다.

‘저 파자권에 일격을 당했거늘.’

지금은 왠지 모르게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파자권에서 이어지는 이화겸의 구수가 턱 아래를 노렸지만, 백무량은 반보를 밟았다.

빠르고 명쾌하다. 이화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갈!”

마기가 담긴 일갈이 백무량의 기혈을 두들겼다.

주르륵.

선홍색 핏물이 백무량의 입술을 적셨다. 적잖은 내상이 생겼지만 위험한 것 같진 않았다.

도리어 이화겸의 행동에서 조급함이 보였다.

칠십여 년, 혹은 그 이전부터 강자로 군림해 왔을 이화겸에게 있어 조급함은 낯선 감정일 테니까.

“두려우냐?”

“……!”

이화겸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듯했다. 분노를 참지 못한 이화겸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어지는 연격이 백무량의 요혈을 향해 내질러진다.

수도, 구수, 파자권, 상박에서 이어지는 팔꿈치.

그가 평생 단련해 온 권장법이 백무량의 옆구리 뼈를 부수고, 근육을 끊어 놓았다. 백선신검을 아무리 휘두른다고 한들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이화겸을 막아 낼 순 없었다.

다만 백무량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염천일원을 두려워하고 있어.’

칼끝에 맺힌 염천일원.

태청신공으로 이루어진 검경이 뺨을 스칠 것 같을 때마다 이화겸의 보보가 신중해졌다.

그 말인즉, 염천일원을 막아 낼 방도가 없다는 것일 터.

백무량은 스산하게 웃었다. 도사답지 않은 웃음, 사부나 사형이 봤다면 꾸짖었을 표정이었지만 별 상관없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백련교의 마인.

그것도 자신을 좌호법이라 칭하는 백련교도라.

백무량은 내력을 백선신검에 집중했다.

-염천(炎天)은 높고 더운 하늘, 남쪽의 하늘이며.

-일원(日源)이란 태양(太陽)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운을 의미한다.

참으로 말장난 같은 초식명이었다.

원(源)을 파자하면 물[水]과 언덕[厂], 샘[泉].

바위틈 사이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형상을 의미하는 것을 초식의 의미로 써먹을 줄이야.

염천일원을 빚어낸 백무량은 연격을 이어가는 이화겸을 바라보았다.

‘그 덕분에 이런 경우도 생기는 법이지.’

백련교의 좌호법, 이화겸은 한 가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염천일원은 검강처럼 칼날에 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검강으로 이루어진 테두리 안에 담긴 검기의 물결.

그것을 토해 내는 것이야말로 염천의 일원이니.

백무량은 파자권을 내지르던 이화겸의 상반신에 검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허튼짓을!”

이화겸은 백무량의 단순한 검로를 비웃으며 팔꿈치로 백선신검을 쳐 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콰아아!

검기로 이루어진 물결, 아니, 청운으로 이루어진 운해가 이화겸의 몸통을 할퀴고 감쌌다.

“……커헉!”

이화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피를 토했다. 곧바로 마기를 운용하지 않았다면 절명했을 것 같았다.

‘이 한 수를 숨기고 있었나.’

이화겸은 분노와 당황을 죽이고 냉정함을 되찾았다. 이제 염천일원의 실체를 알았으니 다시 당하지 않으면 된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나 심의를 깨달은 백무량에겐 무의미한 것이다.

백무량은 이화겸의 상반신을 향해 검극을 겨눴다.

‘사부가 말한 것은 단순히 글자만 파자하라는 게 아니었어. 그 위에 있는 진의였지.’

주자령은 왜 하필 백련교가 곤륜산을 불태울 때 그걸 말했을까?

백무량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단순히 검기를 토해 내는 것이 아니다.

사투를 앞둔 무인의 마음가짐처럼.

다가올 싸움의 열기와 두려움, 결의를 터트리듯이 펼쳐야 한다.

백무량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이화겸의 몸통을 감싸고 있는 청운에 심의를 집중시켰다.

“폭(爆).”

“……!”

단 한 음절.

이화겸은 백무량의 말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일륜(一輪)의 형상을 취한 검기가 터지는 광경이 머릿속에서 일렁였다.

‘설마 그런 검법이 곤륜파에…….’

이화겸이 전신의 마기를 몸에 집중시킨 그때.

“거짓말이야.”

빙긋 웃은 백무량이 두 번째 염천일원을 펼쳤다.

이화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당황, 배신, 속았다는 분노 따위가 휘몰아쳤다.

무엇보다도 염천일원에서 발해지는 기세가 전보다 두세 배.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 든 순간, 이화겸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크게 외쳤다.

“네 이놈!”

서걱!

이화겸의 목이 잘렸다.

***

“이게 무슨 일인가!”

뒤늦게 도착한 무인들은 반쯤 불탄 청성파를 보고 대경실색했다.

강서 무림의 대도무문, 청성파가 이렇게 되다니!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흉사(凶事)라면…….’

백련교.

과거의 마교를 떠올린 무인들이 청성파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니 조윤과 적성검이 잔불을 끄고 있었다.

처음에는 백련교도가 아닐까 하여 무인들 모두 칼을 빼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입은 삼베옷을 보고는 긴장감을 떨쳤다.

백련교라면 교에 속했다는 표식이 있을 테니까.

무인들이 천천히 다가서자 적성검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대협들이십니까?”

적성검의 촐싹대는 목소리가 무인들을 피식 웃게 했다. 그러나 불에 타 재가 된 도관이 을씨년스러웠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없앤 무인들이 적성검에게 물었다.

“연기를 보고 왔소만……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오?”

“백련교의 잔당이 불을 질렀소.”

조윤의 말에 적성검이 그를 곁눈질했다. 자기가 질러 놓은 불을 천연덕스럽게 떠넘기는 말이 참으로 자연스럽다 싶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질렀다고 할 순 없지.’

적성검이 조윤의 말을 덧붙였다.

“반라의 노인이었는데, 마기가 무시무시했소.”

“어디로 갔습니까?”

“나도 잘 모르오. 갑자기 저쪽으로 가서…….”

적성검이 북쪽을 가리키자 무인들의 표정이 굳었다.

청성산의 이상을 느끼고 왔다지만 백련교도와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갈피를 찾지 못하던 무인들의 시선이 무너져 가는 도관으로 향했다.

“일단은 청성파에 붙은 불이나 꺼야겠소.”

“그, 그럽시다.”

무인들이 양팔을 걷어붙였다. 그 모습을 본 적성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야 상인의 뒤치다꺼리를 한다지만 이놈들은 강호의 무인들이 아닌가?’

모순이기는 했다.

적성검도 조윤이 없는 곳에서는 강호의 협사라고 자칭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목숨이 소중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

잠깐 마주쳤을 뿐이었지만 이화겸의 경지는 구파일방에 속한 일대제자가 다섯은 달려들어야 할 것 같았다.

적성검의 이야기를 들은 무인들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가기를 잘했구나!’

만일 이화겸과 마주쳤다면 속절없이 죽었을 터.

무인들과 조윤, 적성검이 말없이 청성파의 불씨를 꺼트리던 그때였다.

저벅저벅.

규칙적인 발소리가 무인들의 청각을 일깨웠다. 연신 허리를 굽히던 적성검이 허리를 매만졌다.

칼의 차가운 감촉이 뜨거운 열기를 빼앗아 가는 듯했다.

“뒤로 물러나시오.”

적성검의 말에 조윤은 손바닥을 털고는 거리를 벌렸다.

발소리의 주인이 고성진이길 바랐다.

만일 이화겸이라면 고성진의 시신을 들고서 자기를 속였다는 걸 비웃을 테니까…….

‘곱게 죽지는 못하겠지.’

자기를 속인 죄로 잔뜩 화풀이할 게 뻔하다.

조윤은 자신이 꺼낼 수 있는 패를 하나둘씩 떠올렸다.

무림맹과의 접선, 가지고 있는 재산, 현 무림에 대한 정보.

반라의 노인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준다면 최소한 살아남을 수 있으리란 판단이었다.

그 판단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미리 마중이라도 나온 거요?”

피로 물든 행낭.

백무량이 한 손에 행낭을 든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고 선배는 어디에 있소?”

“그게, 백련교의 잔당이…….”

“아, 잡혔나 보군. 하긴 청성파가 이렇게 되었으니까.”

청성파가 반쯤 불탔음에도 백무량의 반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평이하기만 했다.

조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백무량과 이화겸이 마주쳤다는 것을.

‘그렇다는 건…… 저 행낭 안에는.’

쿵!

조윤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경지를 이루신 걸 축하드립니다.”

“얼른 일어나시오. 앞으로 바빠질 터인데, 무릎이 상해서야 되겠소?”

백무량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조윤은 은밀하게 미소 지었다.

그랬다.

청성파가 망가지고, 백련교도가 백무량에게 죽은 지금이라면…… 할 수 있는 게 너무나도 많다.

그걸 모르는 무인들은 백무량과 조윤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