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운 (3)
“정녕 죽고 싶은 게냐?”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 정련된 살기.
이화겸의 위협은 구파일방의 일 대 제자일지라도 겁을 집어먹을 만큼 날카롭고 사나웠다.
그러나 백무량은 달랐다.
칠십여 년 전, 백련교와 싸웠던 영웅.
구천검으로 살았던 기억이 있는 한, 백무량에게 이화겸의 살기란 이미 경험한 것에 불과했다.
백무량은 불영행의 어둠 속에서 코웃음을 쳤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허튼소리를 주절거리는구나!”
“……뭐라?”
“네놈이 나를 죽이려고 왔지 그럼 살려 주려고 왔겠느냐? 선심 쓰는 척 지랄을 하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지!”
이화겸이 인상을 구겼다. 백무량의 말은 백번 생각해도 옳았다.
그러나 이화겸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마음대로 지껄여라.”
저놈이 불영행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들 아직은 하수일 뿐이다.
백무량을 비웃은 이화겸은 오른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금방 후회하게 해 줄 터이니!”
이화겸의 발이 땅을 박찼다. 그의 발아래에 있던 나뭇잎 무더기가 폭발이라도 당한 것처럼 위로 솟구쳤다.
흩날리는 나뭇잎 사이에서 이화겸은 오른손가락을 폈다.
칠십여 년 동안 꾸준히 단련해 온 수도(手刀).
날카롭게 정련된 이화겸의 손날에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가 한계다.
이화겸의 오른팔이 순식간에 가속한다. 그의 수도가 위에서 아래로 장절하게 휘둘러졌다.
태벽(颱劈).
태풍마저도 쪼갠다는 벽의 기법이 백무량의 쇄골을 노렸다.
‘지독한 살기군.’
백무량은 표정을 굳혔다. 이화겸이 자신만만했던 이유, 그 원천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했다.
만일 내공을 회복하지 않았다면 몸이 굳었을 테지. 아니, 움직임조차 좇아가지 못했을 터였다.
백무량의 얼굴에 짙은 조소가 감돌았다. 이화겸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도사 백무량이 불영행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상, 그는 백무량을 얕볼 수밖에 없었다.
이화겸의 표정을 보면 승리에 이미 취해 있는 것 같았다.
백무량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쩌엉!
수도와 검이 부딪쳤다. 이화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놀람과 경악 따위가 마음속에서 회오리쳤다.
‘어째서?’
그 한마디를 이화겸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백무량이 펼친 뇌화가 팔뚝에 틀어박혔으니까.
뇌기에서 퍼져 나온 고통이 전신을 질주했다. 이화겸의 입가에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토해졌다.
“네 이놈!”
이화겸은 반사적으로 일 장을 뻗었다.
백무량의 가슴을 노렸던 일 장이 허공을 갈랐으나, 이화겸의 감각은 뇌화의 충격에도 제몫을 다했다.
‘내공을 잃은 게 아니었어!’
그 어떤 내공심법일지라도 일식경 안에 모든 내공을 회복하진 못한다. 설령 반절을 회복했더라도 쾌벽을 막아 내지 못했어야 정상이었다.
청성파의 장문인조차 막아 내지 못한 일 초.
그것을 겨우 청년에 불과한 도사가 막아 냈다면, 불영행에서 얻은 무언가가 있었을 터였다.
십 보 이상 물러난 이화겸이 백무량에게 물었다.
“거기에 무엇이 있었더냐!”
붉게 물든 이화겸의 얼굴에는 질투와 시기,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조금만 툭 건드리면 넘쳐흐를 것처럼.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그걸 왜 너한테 알려 줘야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화겸은 백무량의 모습에서 답을 얻었다.
‘사지를 꺾고 나서야 대화가 될 놈이로다.’
이화겸이 거리를 좁혔다. 칠십여 년 동안 적공한 마기가 터지니 주변의 나무가 시꺼멓게 물들었다.
백무량의 시선이 이화겸의 손에 닿았다. 뇌화가 틀어박혔던 곳이 기기묘묘하게 덜렁거리고 있었다.
떨어져 나가지 않은 것은 마기로 붙잡고 있어서인가.
그것을 알아차린 백무량이 히죽 웃었다. 태청신공의 내공이 유형화한 청운이 순식간에 자기 몸집을 부풀렸다.
“……허!”
이화겸의 눈에 격동이 흘렀다. 뇌화는 나이에 비하여 성취가 뛰어나다고 여겼을 뿐이지만, 시야에 담긴 청운은 달랐다.
너무나도 크다.
권장법으로는 밀어낼 수 없을 만큼.
그것이야말로 백무량이 영물들에게 얻은 선물이었다.
사대사행에서 빼앗겼던 모든 내공을 되돌려받는다. 그것도 기해혈의 크기를 넓혀 주면서.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남긴 글귀로 검해의 그릇을 넓혔다면, 두 번째 선물은 몸의 그릇을 키워 준 셈이다.
‘특히 지금은 되돌려받은 모든 내공을 가지고 있지.’
백무량은 생애 처음으로 전능감을 느끼고 있었다.
삼단전에 쌓아 놓은 내공의 서너 배가 기혈에서 미친 듯이 널뛰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아낌없이 쏟아 낼 상대가 눈앞에 있다.
백련교의 잔당이라 자칭하는 마인.
이화겸을 향해 백무량의 심의가 집중되었다. 곤륜산맥의 운해와 비견되는 청운이 그를 짓이겨 버리기 직전이었다.
“애송이가……!”
이화겸이 엄지를 손에 붙이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가볍게 구부렸다. 단창(短槍)의 형상을 띤 오른손에 마기가 가득 실렸다.
기수식은 그것이 전부였다.
파자권(把子拳).
이화겸의 일수가 단숨에 청운을 꿰뚫고 백무량에게 쇄도했다.
백무량은 세상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그만큼 이화겸의 움직임은 빨랐고, 갑작스러웠다. 섭낭행에서 운중용형보의 묘리에 숙달하지 않았다면 대응하지 못했을 터였다.
쳐 내야 한다.
백무량의 오른손에 힘이 실리던 그때,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이제야 가까워졌구나.”
“……!”
“맞아 죽을 준비는 되었느냐?”
이화겸의 파자권이 순식간에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
손가락과 손목을 아래로 늘어뜨리는 구수(鉤手).
백선신검을 일찍 휘둘렀던 백무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타앙!
백선신검이 구수에 부딪쳐 위로 쳐올려졌다.
백무량의 상반신이 활짝 열리는 순간. 이화겸은 안쪽으로 파고들며 팔꿈치를 휘둘렀다.
쩌억,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백무량은 신음을 토했다.
마침내 먹인 일격에 이화겸의 얼굴에 환희가 차올랐다.
“하하하!”
웃음을 터트린 이화겸은 진각을 밟았다. 이에 이화겸의 사방을 점하던 청운이 일제히 뒤로 밀려 나갔다.
백무량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단순한 권법가인 줄 알았건만, 기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사대사행에서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백무량의 발걸음이 번잡해졌다.
섭낭행에서 얻었던 운룡대팔식의 심득을 운중용형보에 녹인다. 감을 되찾기까지 찰나면 충분했다.
때리고[打], 머무르고[停], 흐른다[流].
단지 그 세 초식만으로 섭낭행의 수면을 걷지 않았던가.
‘내공이 있는 지금이라면, 그보다 더 대단한 걸 할 수 있을 거야.’
익숙하지 않다고 머뭇거렸다가는 이화겸에게 죽고 만다.
절벽 끝에 선 것 같은 위기감이 백무량의 마음을 더욱 견고하게 했다. 강심장이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비인간적인 재능이었다.
사부인 주자령이 말하기를.
‘무인으로서 타고났다고 했었던가.’
옛 기억을 떠올린 백무량의 얼굴엔 긴장감이라곤 없었다.
퉁.
백무량의 일보가 땅을 때렸다. 백무량이 몸을 잠깐 띄웠을 뿐이지만, 이화겸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예감.
이화겸의 숱한 경험이 경고성을 발하고 있을 때, 백무량이 움직였다.
‘일직선?’
눈을 속이겠다는 의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화겸은 백무량이 포기했다고 판단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무식하게 달려들 리가 없었다.
장저로 백선신검을 막고, 턱을 상박으로 후려친다.
그렇게 내린 판단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스걱!
분광검과 분광뇌운결이 합일한 뇌화가 이화겸의 손바닥을 찢었다. 움직임을 완벽하게 예측했다고 여겼던 이화겸에게 있어 말이 안 되는 결과였다.
‘멈춰……?’
이화겸은 자기가 본 것을 믿지 못했다. 일직선으로 달려들다가 갑자기 멈추어서 베는데, 힘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하물며 그 움직임은 어떠한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검로라니.
이화겸의 머릿속에선 복기가 필요하다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빠르게, 더 빠르게.
극쾌를 추구하는 분광검이 뇌운을 머금는다. 백무량은 호흡을 멈춘 채 삼절광식을 순식간에 펼쳤다.
검뢰벽천, 일섬운월, 분광검결.
그리고 또다시, 검뢰벽천.
눈으로 좇기 힘든 검로가 수없이 펼쳐졌다. 이화겸의 시야가 팽그르르 돌아가는 듯했다.
‘이상하다 여기고 있겠지.’
백무량은 뇌화가 품고 있는 진가가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내공을 머금은 일선(一線).
그 일선으로부터 뇌기가 피어나니, 뇌화.
작은 번개가 쉼 없이 터지니 눈에 내공을 집중하지 않으면 검로의 흐름을 알아채기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그 틈이 없다.
이화겸의 상반신이 순식간에 검상으로 가득해졌다.
‘마기로 몸을 지키지 않았다면…….’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불길한 예감에 이화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단순히 백무량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펼치고 있는 보법과 검법.
운중용형보와 뇌화가 완성된 것이 아닌, 발전하고 있는 무공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죽이지 않으면 대업에 큰 걸림돌이 될 터!’
이화겸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련교주와 마주할 때 당당한 모습으로 찾아가겠다는 목표를 여기서 지워야만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여기서 죽거나, 백무량을 제거하지 못할 테니까.
이화겸의 살기가 폭사했다. 백무량의 몸이 순간 굳어 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불영행의 기연이 없었다면 단숨에 무릎을 꿇었으리라.
백무량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백련교의 마인을 상대로 불온한 생각에 사로잡혀선 안 됐다.
아니, 오히려 그가 상대였기에 운중용형보의 심득을 시험해 볼 수 있었다.
‘공타식, 공정식, 허류식 중에 어느 것이라도 실수하면 안 돼.’
이화겸의 무공은 가히 일절이었다. 백무량이 만난 어느 누구보다도, 심지어 주자령보다도 더욱 원숙한 권장법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검과 권의 싸움이라면 패배를 면치 못한다.
하지만 백무량에게는 보법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내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하게끔, 치밀하게.’
백무량의 분광검이 수없이 이화겸의 몸에 실선을 남겼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한 마기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고도 남았을 터였다.
가히 수백 초를 몸으로 견딘 것이다.
그렇게 되니 백무량의 검법도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휘둘러도 이화겸이 공격을 허용하니,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검로를 그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앞으로 조금만 더.’
백무량의 허점을 노리는 이화겸의 눈동자가 고요하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도 잘 파고들면 치명타를 입힐 수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이화겸의 성명절기인 만마탈원.
흡성공을 기본으로 한 일권을 백무량의 기해혈에 후려친다면 단숨에 승기를 가져올 수 있다.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이화겸은 지금까지 모은 마기를 땅바닥에 버리듯이 쏟아 냈다.
‘대업을 위해서라면……!’
이화겸이 이를 악물고 버티던 그때.
백무량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뇌화로는 부족하겠어.”
‘설마 저 검법이 끝이 아니었단 말인가?’
저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
이화겸은 곧바로 백무량의 기해혈을 향해 쌍수를 휘둘렀다.
삼십 년의 마기가 일점에 집중되어 회오리쳤다.
만마탈원의 일 초, 탐랑.
가슴팍을 관통하고도 남을 일격 앞에서 백무량은 구천화우검의 구결을 떠올렸다.
심득이 부족하여 석두에게 펼치지 않았던 사 초, 염천일원.
‘지금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백무량은 검에 청운을 집중시켰다.
이에 백선신검의 칼날에 백무량의 심상으로 이루어진 검경(劍境)이 맺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