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91화 (91/275)

각운 (2)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어린 시절에 수십 번은 본 경전의 핵심적인 구절이었다.

도교에 몸을 담은 자라면 무조건. 도사가 아니라 하인일지라도 지나가면서 들어 볼 만한 가르침.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남긴 글귀가 이거라니.’

훌륭한 가르침이기는 하나 이것을 위해 사대사행을 돌파해야 했을까?

적잖은 실망감이 백무량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쩌면 내가 곤륜파의 방식으로 사대사행을 돌파해서 이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남긴 가르침은 자신에게 무용한 것이 아닌가.

백무량은 낙담했다. 하지만 등을 돌리지는 않았다.

사형인 주백천이 저 가르침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으니까.

단지 궁금할 뿐이다.

‘저 가르침이 내 그릇을 어떻게 넓힌다는 걸까?’

주백천이 남긴 글귀가 도움보다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백무량은 제자리에서 털썩 주저앉고는 깊이 고민했다.

도를 도라고 부를 수 있으면 참된 도가 아니요,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백무량은 구절의 의미를 곱씹으면서 심신에 담은 무공과 심상을 떠올렸다.

‘곤륜파의 무공과 검해.’

전자는 사부, 주백천에게 익힌 칠십여 년 전의 무공이요, 후자는 이름 모를 노인을 비롯해 아주 오래된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곤륜파의 무혼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릇을 넓힌다고 한다면 몸과 마음, 둘 중 하나일 터.

한참 동안 고민하던 백무량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검해란 과거의 도, 즉 옛 무학이 담긴 깨달음이니 참된 도[常道]가 아니라는 건가?’

검해에서 배운 분광뇌운결.

그것은 분명 과거에 이름 붙여진 무공이요, 노인이 걸었던 길이기도 했다.

무림사(武林史)를 중요시하는 호사가라면 분광뇌운결이 참된 무공이라고 칭할 것이다.

백무량의 시선이 오른손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내가 사부에게 배운 분광검은 그릇된 도인가?’

분광뇌운결에 비해 심후함은 부족하나, 초식은 정립되어 있지 않던가!

분광검이 단순히 분광뇌운결의 파편에 불과하다면 우월한 부분이 없어야 마땅하다.

백무량은 그 차이에서 실마리를 알 것 같았다.

‘분광뇌운결은 참되고 영원한 무공이 아니야.’

분광검은 확실히 분광뇌운결보다 뒤떨어진 무공이었다.

느리고, 약하다.

무인은 그것만으로 무공의 우열을 가렸다.

그러나 백무량은 달랐다. 도사는 참된 도를 궁리해야 했다.

당장 도가도비상도만 해도 수많은 해석이 있지 않던가.

‘도는 곧 길이니, 미리 점찍은 길에서 멈추지 않고 상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해석한 도사도 있었지.’

그렇게 만들어진 나뭇가지만 수십 가지.

단순함을 좋아하는 백무량에게 있어 너무나도 어려운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더욱 무공을 가까이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도가도비상도에서 말하는 도(道)와 무(武)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스르릉.

백무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들었다.

‘분광검은 분광뇌운결의 파편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분광검만의 도가 생겼어.’

분광검은 일점분식, 삼절광식, 승검신광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분광뇌운결엔 신광만이 존재한다.

‘분광뇌운결의 상승 초식은 분광검과 다른 건가?’

검해에서 노인의 분광뇌운결을 보고 품었던 의문.

그것이 옳았다.

백무량은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 경지의 고하로 따지자면 분광뇌운결이 몇 수는 위겠지만…… 그것이 곧 정수라고는 할 수 없지.’

분광뇌운결이 과거의 도라면, 분광검은 후대의 곤륜도가 궁리하여 만든 또 다른 도.

어느 쪽도 무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두 무공 모두 상도(常道)는 아니었다.

‘완전무결한 무공이 아니고서야 어찌 상도라고 할 수 있으랴.’

백무량은 어려운 길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분광뇌운결의 심의와 뇌운에 분광검이 가진 날카로움을 더해도 완벽하진 않을 터인데.’

백무량은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남긴 글귀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그가 청성도에게 남긴 가르침은 무엇인지 몰랐다.

그건 청성파의 무공을 배운 이만이 알 터였다.

단지 백무량은 그가 남긴 글귀를 보고 검해의 결점을 깨달았을 뿐이다.

-과거의 가르침이라고 하여 상도, 상명이라 할 수 없다.

“과거와 현재의 가르침을 합하고 발전시킨다면 상도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야.”

이정표를 찍은 백무량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어렴풋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다.

‘한 호흡에 두 가지 검의(劍義)를 담아서 펼친다면 어떨까?’

백무량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에 선기가 꿈틀거렸다.

사부에게 배운 분광검과 검해가 가르쳐 준 분광뇌운결.

두 가지 검법을 하나의 실선으로 모았다. 중심은 분광검의 삼절광식, 검뢰벽천에 있었다.

좌에서 우로 자르는 일검.

그 단순함이 두 검의를 일검에 모으는 걸 손쉽게 했다.

‘분광검의 검형에 분광뇌운결이 스며드는 데 반발이 없는 게, 마치…….’

아귀가 딱딱 맞아 들어가는 것 같지 않나.

백무량은 환하게 웃었다.

파직!

백무량의 심의에 따라 선기가 뇌운으로 화하여 물결친다.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려는 놈들을 분광검의 형(形)에 담는다.

‘이것의 이름을 무엇으로 해야 할까?’

백무량은 순간 고민했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름이 무엇이 중요한가.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일진대.

‘정립하지 못한 일검에 의미를 덧붙이지 말자.’

스윽.

백무량은 뇌운으로 덮인 백선신검을 쥐고는 보폭을 여유롭게 넓혔다. 내력을 회복하지 못해서 파괴적이지는 않았지만, 검에 담긴 가르침은 깊었다.

분광뇌운결이 담긴 검뢰벽천.

백무량은 그 일검을 불영행 방향으로 내리쳤다.

쩌저적!

커다란 소음이 분지 전체를 짓누른다.

그것만으로 백무량의 얼굴에 순수한 감탄과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분광검이라고……?’

좌에서 우로 휘둘러진 뇌운이 위아래로 퍼지는 광경.

그 모습이 마치 만개하는 꽃과 같아, 백무량은 한 가지 단어를 떠올렸다.

뇌화(雷花).

과거와 현재의 도가 합쳐진 일검은 또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콰콰쾅!

골짜기 내부에 있던 이끼가 사정없이 뜯겨 나갔다. 분광뇌운결만 펼쳤다면 중간에 힘없이 끊어졌을 터였다.

완연한 형태를 취한 힘.

그것을 본 백무량은 자신이 줄곧 품고 있던 오판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사형이 바랐던 게 바로 이것이었구나.’

검해의 가르침은 옛 곤륜파의 것이다.

그러니, 분광뇌운결은 분광검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 생각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채…….

“검해에만 의지했다면 계속 과거의 도에 사로잡혔겠지.”

옛 가르침만을 답습하는 무인에게 발전은 없으리라.

백무량은 큰 가르침을 준 청성파의 개파조사와 사형에게 두 손을 모아 올렸다.

그러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놀랍게도 내공이 모이기 시작했다.

‘역시 불영행 너머의 분지에서는 내공이 흩어지지 않는구나.’

백무량이 그렇게 판단한 까닭이 있었다.

‘영물들이 괜히 여기 모여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판단이 옳았어.’

얻을 것은 모두 취했으니 이제는 마인과의 싸움을 대비해야 할 때.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백무량이 호흡을 골랐다.

그러자 태청신공의 기운을 느낀 영물들이 조금씩 백무량에게 다가갔다.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낀 백무량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뭐야?”

성난 목소리가 영물들을 향했다. 하지만 영물들은 백무량의 기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왜 화를 내냐며 낮게 울부짖었다.

물론, 백무량에게는 배고프다는 아우성처럼 들렸다.

‘나를 잡아먹으려는 건가?’

끝내 가부좌를 푼 백무량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영물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백무량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뼈가 부러지고 살이 뭉개질 판이었다.

하지만 영물들은 한두 걸음을 남겨두고서 멈췄다.

그 녀석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내 손등을 왜……?”

백무량은 긴장이 풀린 눈으로 영물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놈들은 운룡의 문양을 할짝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두어 번 반복되니 확실해졌다.

‘여기 있는 영물들이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남긴 두 번째 선물이었구나!’

청성파엔 매우 불행하게도.

두 번째 선물은 백무량이 손쉽게 챙겨 갈 수 있었다.

***

툭, 투둑.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에 이화겸과 조윤, 적성검이 고개를 들었다.

무척 기이한 일이었다.

“이게 무슨…….”

적성검이 자기도 모르게 떨어지는 것을 쥐었다.

작은 산새.

산새가 미동도 하지 않고 미약한 숨소리를 내뿜고 있었다.

“기절한 건가?”

적성검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조윤이 산새의 가슴을 톡 두드렸다.

그러자 언제 기절했냐는 듯 눈을 끔뻑이다가 가까운 나무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이화겸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어딜 보는 거냐?”

적성검의 살기에도 이화겸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 멀리에서 느껴졌던 강대한 존재감.

과거 강호십대고수와 마주했던 때가 떠오르는 기세였다.

‘설마, 그놈인가?’

이화겸은 섭낭행을 건너던 도사를 떠올렸다.

이제 막 소년의 티를 벗어난 얼굴.

시선이 마주친 순간 치솟았던 불안감을.

“……역시.”

이화겸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윤이 그 모습에서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백련교주의 위치를 알고 싶거든, 조금도 움직이지 마라!”

이화겸은 조윤의 외침을 무시했다.

대신에 조금 전 느꼈던 감각을 떠올렸다.

불영행에서 내리쳤던 뇌전의 일격.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 일검은 하늘을 어지럽혔다.

‘바람의 흐름을 읽는 새가 까무룩 기절할 정도로 빨랐던 게지.’

검을 저만큼 강력하게 펼쳤다면 불영행을 돌파했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이화겸은 우선순위를 바꿨다.

“너희는 나중에 상대해 주마.”

“……!”

조윤이 입술을 달싹거리기도 전에 이화겸은 땅을 박찼다.

‘백련교주님이라면 반드시 살아 계실 터. 그렇다면 대업에 위협이 될 놈을 제거하는 게 옳다!’

이화겸의 눈이 마기로 번들거렸다.

사실, 백련교를 위한 마음 말고도 열등감도 있었다.

칠십 년 동안 돌파하지 못했던 불영행.

그곳을 약관도 되지 않은 도사가 돌파했다는 건, 이화겸에게 있어 치욕과도 같은 일이었으니까.

‘그놈을 고문한다면 불영행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겠지.’

차라리 잘된 일이 아닌가.

손 하나 대지 않고 실리를 취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화겸이 잔악한 웃음을 흘렸다. 자신을 노려보던 눈을 헤집어 놓을 생각에 벌써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 생각은 불영행에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이런 건 처음 보거늘.’

어떤 일이 있더라도 파문 하나 없던 섭낭행.

그곳에 파도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끝까지 돌파하지 못했던 골짜기, 불영행을 중심으로.

이화겸은 어금니를 꽉 앙다물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백련교의 좌호법인 자신조차 불영행에서 적목으로 인해 칠십여 년을 허비했는데, 저놈은 왜?

억울함과 분노가 치솟았다.

그 감정의 끝에 쾌감이 있었다.

‘불영행을 돌파한 지 일식경도 안 된 지금이라면 손쉽게 죽여 버릴 수 있을 것이야.’

개화하지 못한 꽃봉오리를 한 손으로 짓이기는 쾌감.

이화겸은 제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열여섯 살의 도사를 떠올렸다. 꽉 다물었던 입술 사이로 실웃음이 나왔다.

‘그놈이 제아무리 천재라도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남긴 깨달음을 단기간에 소화하진 못했을 테니까.’

하물며 불영행에서 잃은 내공을 회복했을 리가 없다.

일거양득.

이화겸의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불영행에 남은 미련을 모두 털고 백련교주님을 배알하러 가면 완벽하겠군!’

이화겸에게 백무량이란 운 좋게 불영행을 돌파한 놈에 불과했다.

섭낭행에서 눈을 마주쳤던 도사의 경지는 기껏해야 성강.

무림에선 고수라고 불릴지언정 이화겸과 비교하면 족탈불급이었다.

“네 이놈, 당장 나오지 못하겠느냐!”

이화겸의 사자후에 천지가 쩌렁쩌렁 울렸다. 섭낭행에 몰아치던 파도조차 잠시 멈출 정도였다.

그때 불영행 내부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구나.”

긴장감은커녕 위기감조차 없는 어조라.

이화겸은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풀었다. 저런 도사는 잘근잘근 패서 죽이는 맛이 쏠쏠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교주를 잃은 잔당 주제에.”

도사, 백무량이 던진 비아냥거림에 이화겸의 표정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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