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운 (1)
불영행(不影行).
섭낭행 건너편에 있는 어두운 골짜기.
그곳에 들어서고 겪은 고행이 너무나도 견디기 어려웠기에, 백무량은 골짜기가 곧 불영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한데 안쪽에 이런 분지가 있을 줄이야.’
숨을 쉬기가 버거울 정도로 충만한 선기.
천장에서 흐르는 깨끗한 물, 그 틈새에서 흐르는 새의 지저귐.
하물며 골짜기의 삭막한 환경과는 달리 분지에는 온갖 야생화가 만개하고 있었다.
누구일지라도 선경(仙境)이라고 부를 만한 경치.
아무리 염세적인 사람일지라도 경계심을 없앨 광경이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일을 겪었다.
그 경험이 있었기에.
“나와라.”
분지 구석구석에서 자신을 훔쳐보는 시선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백무량의 눈을 핥아 주었던 새끼 곰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꾸우웅…….
새끼 곰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내자, 많은 영물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경중이 다를 뿐. 권장법에 상처를 입은 영물들이었다.
‘서체를 봤을 땐 사형이 나보다 먼저 도착했겠지만…….’
주백천이 영물들에게 주먹질하는 모습이 연상되질 않았다.
아니, 곤륜산맥에서도 참새 하나 건드리지 않았던 사형이 청성산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백무량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벽에 꽂힌 말뚝.
‘나무 말뚝인가?’
가장 밑에 있는 말뚝을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간격이 일정하지 않고 조금씩 달랐지만, 방향은 같았다.
백무량의 시선이 말뚝의 시작점에 도착했을 때.
“하하.”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물이 새어 나오는 천장.
그쪽에서 삐져나온 밧줄이 나무 말뚝에 빳빳하게 묶여 있었다.
그것을 보니 왠지 인간미가 느껴졌다.
“사형이 그래도 몸으로 이동하긴 했구나.”
불영행 안쪽에 있는 분지를 알아낸 것 자체가 정말 놀랍고 대단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백무량이 유수행에서 느꼈던 경악은 그보다 컸다.
‘여기서 갑자기 사형이 혼령으로 등장했어도 매우 놀라지 않았을 거야.’
백무량의 미소가 짙어졌다.
주백천이 제 몸으로 이곳에 왔다는 증거를 보고 나니 불안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는 그가 남긴 안배를 취하고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남겼을 가르침을 봐야 할 때.
백무량이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려고 하자 영물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나를 경계하는 건가?’
영물이라고 한들 짐승.
상처 입은 짐승이라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마련이다.
특히 이곳, 불영행 안쪽의 분지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금지일 터.
상황을 곧바로 이해한 백무량이었지만, 해결할 방도는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곤륜산에서 곰을 때리기만 하고, 달래 본 적이 있어야지.’
백무량이 가만히 서서 고민하는 동안, 새끼 곰이 천천히 다가왔다.
쿠어엉!
녀석의 어미로 보이는 곰이 새끼 곰의 등가죽을 물었다. 하지만 새끼 곰은 계속해서 버둥거렸다.
‘저 녀석이……?’
그걸 본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다른 곳에 내던지고는 두 손을 쫙 폈다.
나는 위험하지 않다.
영물들에게 몸으로 대화를 시도한 셈이었다.
‘사대사행에 거주하는 영물이니 이 정도 의사소통은 통하지 않을까.’
백무량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평소였다면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사대사행에서 워낙 신비한 일을 겪다 보니 가능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던 것일까?
이빨을 드러냈던 영물들이 코를 벌름거렸다.
‘멀리서 냄새부터 맡아 보는 건가.’
유등행에서 기름으로 범벅이 되어 냄새가 좋지 못할 텐데.
백무량이 걱정스러운 내심을 품던 그때, 어미 곰한테 벗어난 새끼 곰이 쪼르르 다가왔다.
꾸우웅…….
“뭐야?”
새끼 곰의 행동에 순간 당황하긴 했지만, 밀어내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사실 고마운 녀석이었다.
‘이 녀석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불영행에서 헤매고 있었을지도 몰라.’
백무량은 새끼 곰을 매만졌다.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듯이 조심스럽게, 약간의 애정을 가지고서.
그 행동을 지켜보던 영물들의 기세가 차츰 가라앉았다.
그제야 백무량의 눈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긴장했을 땐 몰랐는데…… 상처가 심상치가 않아.’
영물의 상처에서 느껴지는 어둡고 탁한 기운.
백무량은 자연스럽게 한 남자를 떠올렸다.
‘섭낭행을 돌파할 때 시선이 마주쳤던 마인, 그놈이 설마.’
불영행에서 영물들을 상처 입힌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백무량이 고개를 내저었다.
만일 그놈이 이곳에 왔다면 주백천이 남긴 서체를 지웠을 터였다.
‘여기 있는 영물들의 목숨을 취했겠지.’
마인과 대적하던 영물들이 이곳까지 도망을 쳤다는 게 옳으리라.
그제야 백무량은 영물들을 완전히 진정시킬 방법을 떠올렸다.
사대사행이 항상 머금고 있는 기운.
백무량이 선기를 손가락 끝에 집중시키자 영물들의 눈이 커졌다.
가까이 있던 새끼 곰은 선기에 따스함을 느낀 듯 몸을 비비적거렸다.
백무량은 명료한 목소리로 영물들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나는 적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에게 이곳을 보여 줘.”
…….
울음소리 대신 적막이 흘렀다. 몸을 비비적거리던 새끼 곰도 심각한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촌각.
살얼음 같던 적막을 깨트린 건 새끼 곰을 말리던 어미 곰이었다.
사박.
녀석의 한 걸음에 야생화와 잡초가 찌그러지는 듯했다. 하지만 다음 걸음을 보니 줄기가 꺾이지 않고 펴져 있었다.
백무량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과연 성지에 사는 영물인가.’
곤륜산맥에는 저런 영물이 없었거늘.
백무량은 눈을 새롭게 개안하는 기분이 들었다.
“허락하는 거냐?”
꾸우웅.
어미 곰이 새끼 곰의 등짝을 물고서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백무량으로선 헷갈렸다.
허락한 건지, 아니면 그냥 자기 새끼를 데려간 것인지.
백무량이 경직된 상태로 있는 그때였다.
쿠어어엉-!
곰의 포효가 분지 전체를 휩쓸었다. 강력한 풍압이 야생화와 잡초를 덮은 모래알을 쓸어 올리고, 벽을 여러 차례 두들겼다.
백무량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역시 대화가 통하지 않았던 건가?’
하기야 영물이라고 한들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가.
백무량이 백선신검에 손을 가져가는데, 한차례 포효했던 어미 곰을 벽을 두어 번 두드렸다.
쿵, 쿵!
그러자 벽에 들러 붙어있던 무언가가 일거에 벗겨졌다.
“……저건!”
백무량의 눈이 커졌다.
-영물들에게 인정받은 모양이구나. 어때, 놀랐느냐?
백무량은 황급히 벽으로 다가갔다.
“어쩐지, 남긴 게 겨우 한 줄밖에 없나 싶었는데.”
백무량의 목소리가 활기에 젖었다.
순수하게 기뻤다.
삼 년 전, 청류강 상류에 있던 동굴 이후로 처음 마주한 사형의 흔적이었으니까.
백무량의 모습을 본 영물들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자신을 배려하는 듯한 모습에 백무량은 벽을 탐독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는 두 손을 모아 올렸다.
“말이 통하는구나, 너희들!”
쿠어엉.
곰의 울음소리가 그렇다는 대답처럼 들렸다.
백무량은 유쾌한 웃음으로 받아넘기고는 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나무 말뚝으로 돌을 쪼개서 남긴 언문이 있었다.
-이곳에는 너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이 있단다. 그릇을 넓히는 일이지. 네가 가진 것을 진정으로 소화할 수 있도록 말이다.
“무공만을 위해서 온 길은 아니오, 사형.”
백무량의 목소리에 쓸쓸함이 담겼다.
이곳으로 오면서 떠올렸던 과거, 사형과 물장구를 치던 때, 수선화에 대한 가짜 설화.
그것을 떠올리면서 온 불영행이기에 더더욱 씁쓸했다.
그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한 것인지, 다음 글줄에서 백무량이 기대하던 이야기가 나왔다.
-나에 대해서도 많이 궁금하겠지. 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고, 물건이 사라지고, 어떻게 이런 안배를 남겼는지 말이야.
“그거요.”
-하나 지금은 말해 줄 수가 없구나.
마지막 음절에서 서체가 흐트러진 것이 보였다.
주백천의 격동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듯해, 백무량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뭐가 그리 비밀이 많아진 거요. 예전에는 서로 허물없이 지내지 않았소.”
받아 줄 사람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서, 백무량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다음을 기약하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내가 남긴 안배를 모두 취하고 나면, 그때는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사대사행을 돌파하고 겨우 열 줄 정도.
백무량은 주백천이 야박하다고 생각했다. 현세대 최초로 불영행을 이겨 냈는데 보상이 너무 짜다고 투덜대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에 안배를 남긴 주백천은 없다.
‘다음에는 만난다면 밤을 새워서 따져야겠어.’
다음이라…….
백무량은 그 단어에서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단서라도 주면 좋았을 텐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백무량이 고개를 털었다. 아쉬움이 끝에 있었으나, 삼 년 만에 주백천의 흔적을 보게 된 기쁨이 더욱 컸다.
그러니 이제는 사형이 말한 가르침을 취해야 할 때.
백무량의 시선이 오래된 글귀로 향했다.
가히 수백 년 전.
언제 새겼을지도 모르겠으나, 일필휘지에서 느껴지는 강인함은 강호십대고수로 통칭하는 어떤 고수보다 더욱 뛰어났다.
‘내 사부보다도 더.’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어떤 무인이었을지 글귀만 봐도 보였다.
사대사행을 모두 돌파한 백무량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은 성질이 더러운 선배셨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사대사행처럼 험난한 고행을 후배에게 남겼을 리가 없다.
어떻게든 용을 써서 기어오르라는 생각이 그대로 보이는 숙제였다.
단지 그 숙제를 청성파가 아니라 곤륜도인 백무량이 풀었을 뿐이다.
그것은 곧 장점이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후배를 아끼셨던 거야.’
사대사행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예전부터 있었던 특이한 지대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청성파의 성지로써 확립시키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터였다.
-청성파의 후예를 위하여 남기니.
이곳에 오는 건 오로지 청성파의 후예밖에 없다.
그 생각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글귀였다. 백무량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개파조사는 청성도를 원했을 텐데, 나는 곤륜도이지 않나.’
약간의 배덕감이 들었다. 곤륜도로서 취해선 안 될 가르침이 아닐까 하는 고민도 약간은 있었다.
그러나 주백천이 남기지 않았던가.
‘나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
그릇을 넓히는 일.
백무량은 그것을 검해의 심상을 넓히는 일이라고 이해했다.
‘분광뇌운결 말고도 다른 무학을 얻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그릇을 키워서, 검해를 넓혀야 해.’
그렇게 되면 구천화우검이나 운룡대팔식의 첫 형태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백무량의 내심이 기대와 흥분으로 쿵쾅거렸다.
청성파를 만든 옛 선배가 남긴 가르침이니, 분명 엄청난 것일 테니까.
그렇게 백무량은 맨 하단의 글귀를 바라보았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고 부를 수 있으면 참된 도가 아니요,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가르침.
내심 무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어구라고 여기던 글귀가 나오자 백무량은 눈을 끔뻑거렸다.
“그릇을 넓히는 일이라는 게 도학을 배우란 거였나?”
다소 당황한 듯한 백무량의 혼잣말이 불영행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