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사행 (2)
청성파의 성지인 사대사행을 곤륜파의 무공을 돌파한다.
백무량은 그것을 이미 유수행과 유등행에서 증명했다.
‘검해를 통해 유수행의 여의주에 도달했고, 유등행은 곤륜파의 호흡으로 체력을 보존하여 올라섰지.’
청성파의 무공을 익힌 도사라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터였다.
청성파의 신법인 세류표는 일정 수준에 이르면 호수를 걸어서 건널 수 있다고 알려졌으니까.
‘내공이 없더라도 사대사행의 진의를 파악한다면 나보다 쉽게 통과했을 거야.’
어째서 현세대의 청성파는 아무도 불영행을 통과하지 못했을까?
당연한 의문을 떠올린 백무량은 머릿속에 껴 있던 안개를 하나둘씩 걷어 냈다.
그러다 보니 진실이 보였다.
산공독과 약재를 섞은 환약.
유연걸은 그것을 먹지 않은 자신을 비웃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사대사행의 진의와는 완전히 잘못된 방향이었다.
‘시대가 지나면서 전통이 흐려진 것일까?’
청성파가 스스로 전통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적일지언정 속이 쓰렸다.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얼마나 아둔하면 역대 마교에 의해 흥망성쇠를 반복한 곤륜파보다 더 큰 걸 잃는단 말인가.
백무량은 멍하니 섭낭행을 바라보았다.
수면 아래에 있는 공포와 두려움과는 달리 깨끗하고 청명한 호수였다.
그것을 보니 왜 화전민이 인심호라고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안일하게 다가가면 호수에 먹힌다는 뜻이었을까.”
화전민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기에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보았을 것이다.
송우현이 들었다면 손뼉을 치며 좋아했으리라.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은 호흡을 골랐다.
섭낭행의 실체를 보았다고는 하나 유수행과 유등행보다 훨씬 어려운 고행이었다.
어둠으로 가득한 호수를 오로지 감각으로만 기둥의 위치를 알아내어서 건넌다.
그런 기예가 가능한 후기지수는 오로지 자신뿐이다.
‘그게 가능하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일 수는 없지.’
백무량은 섭낭행 다음에 있을 장소를 떠올렸다.
청성파의 장문인인 유연걸마저 통과하지 못한 곳.
불영행을 통과하려면 체력을 보존해 둘 필요가 있었다.
‘방금처럼 감각에 의지해서 움직였다가는 체력보다 심력이 먼저 고갈될 거야.’
그렇다면 어떻게 섭낭행을 돌파해야 하는가.
백무량은 답을 순식간에 찾아냈다.
‘청성파의 무학으로 사대사행을 쉬이 통과할 수 있다면, 곤륜파도 가능하다.’
백무량의 뇌리에 수많은 무학이 일렁였다.
사부에게 배웠거나, 검해에서 보았던 조각들.
그 사이에서 백무량은 두 가지 무학을 떠올렸다.
‘운중용형보, 그리고 운룡대팔식.’
강호에 갓 발을 들인 무인도 알고 있는 곤륜파의 대표적인 무공이었다.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무공으로도 유명했다.
칠십여 년 전, 성세를 누리던 곤륜파에서도 운룡대팔식을 대성(大成)했다고 말하는 무인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백무량 또한 운룡대팔식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심지어 백무량의 사부인 주자령도 운룡대팔식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곤륜파의 호흡은 적은 숨으로 무한을 다스린다. 그것은 개인의 단련으로 가능한 기예지. 하지만 운룡대팔식은 무엇인지 아느냐?
과거, 주자령의 물음에 백무량은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내심 주자령이 답을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주자령은 그저 빙긋 웃을 뿐.
그 이상은 말해 주지 않았다.
곤륜파의 무공이라면 항상 상세히 설명해 주던 사부였기에, 기억에 남았다.
이제는 백무량이 찾아야 할 때였다.
‘운룡대팔식이란 무엇인가?’
백무량은 스스로에게 자문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겨우 한 걸음만으로 기둥 바깥으로 발이 나갔다.
푸욱!
몸이 앞으로 순식간에 기울어진다. 백무량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섭낭행은 모든 물체를 아래로 잡아끌었다.
그럴수록 백무량의 자문은 더욱 깊이를 더해 갔다.
곤륜파의 호흡.
태청신공.
청운.
백무량이 평생 배웠던 모든 무공과 깨달음을 곱씹으면서, 다시 한 걸음.
……퉁.
운중용형보의 공타식이 물결을 때린다. 아래로 떠밀리던 백무량의 몸이 한순간 멈췄다.
다만 그것이 전부였다.
섭낭행에 반(反)하여 제 의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더 현묘한 움직임이 필요했다.
‘분광뇌운결.’
백무량은 검해에서 만난 노인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정극생동의 묘리가 담긴 일 검을, 걸음으로 변화하여.
퉁.
아까보다 더욱 큰 울림이 섭낭행에 울렸다. 그러나 섭낭행의 법도를 바꿀 만큼의 충격은 아니었다.
백무량의 몸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럼에도 백무량의 눈동자엔 흔들림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숨이 찰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 슬슬 숨이 차지 않더냐?
유수행에서 자신을 보며 이죽거리던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고, 슬슬 깨어날 때라서 그랬을 거라 여겼다.
하나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호흡을 다스린다는 것은 이성(理性)의 단련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운룡대팔식은 무엇인가.’
한 걸음으로 무한을 거닌다는 것은 궤변이었다.
그러나 운룡대팔식의 형(形)은 무한을 거닐기 위해 만들어져 있었다.
‘모순 혹은 말장난이라고 생각했지.’
좌도방의 축지법이 아니고서야 어찌 일보에 수십 장을 이동한단 말인가?
하물며 운룡대팔식은 허공이든, 늪이든, 나무 위든, 자유로이 행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영웅담보다 더욱 황당한 무공이라 여겼다.
그러나 검해와 마주한 지금은 달랐다.
‘호흡을 다스리는 것이 의지라면, 걸음은 나의 심의와 심상에 달린 거였어.’
운중용형보가 뛰어나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운룡대팔식의 수련을 위한 시발점일 뿐. 허공을 거닐지는 못했다.
그것이 가능한 건 오로지 운룡대팔식이었다.
무한을 거니는 여덟 개의 식(式)은 백무량의 머릿속에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지금 내공은 없지 않던가.’
백무량은 섣불리 품었던 걱정을 헛웃음으로 날렸다.
두 고행을 거치면서 체력이 떨어지고 내공이 없다고 한들 깨달음을 불변한 법이었다.
촤악, 촤악.
백무량의 두 발이 섭낭행을 갈랐다. 흐름을 거스르거나 순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섭낭행의 흐름 위를 거닌다.
백무량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연걸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피를 토했을 터였다.
인심호의 본래 이름은 바둑 호수.
바둑알처럼 흩어진 기둥을 따라 돌파하는 고행을, 백무량은 물 위로 걸어서 돌파하고 있었다.
“이리도 쉬운 것을 헤매고 있었구나.”
유수행과 유등행을 백무량이 어떻게 돌파했던가.
눈앞에 주어진 고난에 순응하거나 극복했다. 그것이 고행을 이겨 내는 법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사대사행을 청성파의 도사처럼 돌파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형이 남겼을 안배 또한 곤륜파의 도사가 취하도록 준비되었을 터였다.
사대사행 중 삼행, 섭낭행.
백무량은 그것을 곤륜파의 무학으로 돌파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오직 두 발로만.
***
“저놈이구나.”
이화겸은 섭낭행을 건너는 도사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무척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백련교주의 좌호법인 자신마저도 건너지 못한 섭낭행을 저런 식으로 돌파할 줄이야.
하물며 도사가 펼치고 있는 무공은 이화겸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태청선 주자령 이후로 운룡대팔식을 저렇게 익힌 곤륜도가 남아 있던가?”
이화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안력을 아무리 돋워도 도사의 얼굴에 수염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린 나이에 주자령만큼의 운룡대팔식을 펼쳤다는 뜻인데, 일반적인 후기지수가 가질 경지가 아니었다.
마치 백련교주처럼, 특별한 태생을 가진 게 아니고서야.
‘……그분과 감히 비교할 순 없지.’
이화겸은 백련교주가 품고 있는 괴력난신을 떠올렸다.
하늘이 정한 도리에서 벗어난 존재.
섭낭행을 건너는 도사가 나이에 비해 성취가 뛰어나다고 한들 백련교주와 비견될 순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이화겸이 뒤를 흘낏 돌아보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
피투성이가 된 고성진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화겸에게 반드시 이긴다. 그 각오가 곧 심상으로 발아하여 심의를 끌어 올렸다.
휘르르…….
칼끝에서 대주천복마검이 피어오른다. 개천(開天)의 형세를 취한 검기가 고성진의 의념에 따라 휘돌고, 응집되고, 이화겸을 향해 겨눠졌다.
그것을 본 이화겸은 은연히 미소 지었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끝날 일을 번잡하게 만드는구나.”
“닥쳐라!”
고성진이 핏발 선 눈으로 이화겸을 노려보았다.
이화겸은 살의가 가득 담긴 시선을 보고도 어깨를 으쓱였다.
“피를 더 봐야만 자기 주제를 알겠느냐?”
이화겸의 도발에 고성진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고성진에게 선공을 계속 양보했음에도 이화겸한테 조금도 닿지 않았다. 오히려 제압당하기까지 했다.
“나를 가지고 놀 셈이냐?”
고성진의 물음에 이화겸이 반문했다.
“살려 두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
“당연히 모르겠지. 노부의 속을 네가 어찌 알겠느냐?”
이화겸이 지난 시간을 회고했다.
흡성공으로 생을 부지하고 회복하기까지 어언 칠십오 년.
이화겸은 그동안 한 가지 감정을 되새겼다. 그러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는 세월이었다.
복수(復讎).
백련교의 난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세상에 알리고, 백련교주를 찾아내는 것.
이화겸의 눈이 가늘어지던 그때, 고성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사천당가 지하에 있던 놈들은 네 하수인이더냐?”
“그게 무슨 소리냐?”
“모른 체하지 마라! 거기에 백련교도라고 말한 마인이 둘이나 있었거늘!”
그 말에 이화겸이 고성진에게 다가갔다.
언제나 여유롭던 이화겸의 표정에 분노가 얽혀 있었다.
“백련교를 자칭하는 자가 있었단 말이냐?”
“발뺌할 셈이라면…….”
“허!”
이화겸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고성진의 표정, 목소리에는 거짓 하나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놈들이 교주님뿐만 아니라 기어이 본 교의 이름마저 훔쳐 갔구나!’
이화겸은 지난 세월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가장 심각한 일은 ‘백련교’라는 이름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일단은…… 본 교의 위명을 되찾는 게 우선이다.’
이화겸이 시선이 섭낭행을 건너는 도사에게 향했다.
칠십여 년 전, 백련교에게 있어 가장 큰 장벽이었던 곤륜파.
그들의 후예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살해한다면 백련교주 또한 자신을 찾아오리라.
계획을 정리한 이화겸이 도사에게 살기를 쏘아 낸 순간.
“……!”
도사가 고개를 돌렸다. 거리가 멀긴 하지만 방향은 정확하게 이화겸을 향하고 있었다.
‘저놈이야말로 청성산에서 마주친 도사 중에 가장 위험한 놈이다.’
이화겸은 도사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주자령을 떠올리게 하는 비범함이라면 분명 칠십여 년 전에 대적했던 도사와 연이 있을 테니까.
그 생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백무량?”
구천검 백무량.
주자령의 적전제자였던 그와 도사의 얼굴이 닮아 있었다.
이때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설마 그 구천검과 저 도사가 같은 사람이리라고는.
이화겸이 아니라 천하의 어떤 사람일지라도 떠올리지 못할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