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사행 (1)
검해에서 보낸 시간은 현실에서 찰나에 불과하나, 얻은 것은 다른 무인의 몇 년에 버금간다.
백무량은 유등행에서 손을 떼었다. 얼굴에 맺힌 웃음은 쉽사리 지울 수 없었다.
“이름만 알 뿐이었던 무학을 완전히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이야.”
여운이 남은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쥐었다.
검해에서 있었던 일이 착각이 아니라는 듯. 미약한 선기가 손바닥으로 밀려왔다.
‘줄어들었어.’
백선신검에 있던 선기의 절반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오랜 시간 동안 검해에 머물다 보니 소모된 듯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유수행에서 얻은 선기로 인해 몇 년의 시간을 아꼈고, 분광뇌운결의 심의를 깨달았으니까.
백무량의 고개가 위로 돌아갔다.
검은색 기름이 흐르는 암벽, 유등행.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것이 지금은 조금 할 만한 것 같았다.
“좋아.”
백무량은 암벽에 서슴없이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기름으로 인해 암벽의 틈이 보이지 않고, 자꾸만 미끄러지려고 했지만, 백무량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보 전진, 일보 후퇴.
백무량의 손톱이 조금씩 위로 들렸다. 맨손으로 오르면서 생기는 상처에 기름이 배었다.
“상처가 덧나는 건 아니겠지.”
콧등을 스치는 악취가 백무량을 불안하게 만들던 그때.
스으윽.
백선신검에 남아 있는 선기가 손등으로 흘렀다. 손등에 새겨진 운룡이 은은한 빛을 빛내더니, 조금씩 악취를 밀어냈다.
마치 안심하라는 말을 전하려는 것 같아서 백무량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칠십여 년 전에 이런 기연이 있다고 들었으면 미친놈 취급을 했을 거야.’
검해, 운룡, 백선신검.
하나하나가 영웅담에나 나올 법한 기연이다.
특히 검해는 곤륜파의 영성이오, 곤륜 무학의 정수이니 백무량에겐 어떤 보물과도 비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백무량에게 강렬한 감정을 주었다.
청성파의 성지, 사대사행에 단신으로 도전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용기를.
“검해에서 분광뇌운결을 익혔을 때처럼, 천천히.”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꾸준히, 확실하게.
백무량의 움직임이 전보다 더 간결해졌다.
손을 내뻗고, 잡을 곳을 더듬고, 발로 내디딘 곳을 밀어내고.
근력을 최대한 낭비하지 않는 방법으로 올라가기를 수십 차례.
백무량의 이마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간혹 눈에 들어가기도 해, 아래로 떨어질 위기도 있었다.
투두둑…….
백무량의 발아래로 작은 돌멩이가 떨어져 나갔다.
그것이 바닥에 부딪혀서 완전히 부서지는 광경은 백무량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한 줌의 내공 없이, 오로지 맨몸으로 오르는 백 장.
천하에 어떤 장사가 오더라도 겁을 집어먹을 고행이었다.
“허억, 후…….”
곤륜파의 호흡법이 아니었다면 체력의 한계를 금방 느꼈을 터였다.
잠시 멈춘 백무량은 남은 거리를 가늠했다.
대략 사십 장.
유등행을 절반 넘게 올라온 셈이었다. 그동안 멈춰 서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사뭇 놀라웠다.
그때, 백무량의 뇌리에 직감이 내리쳤다.
‘제성진인은 유수행에 이상이 생겼다고 했지만…… 내가 경험한 유수행은 그저 여의주가 기운을 내뿜을 뿐이었지.’
그것을 제성진인이 ‘이상’으로 느꼈다면 평소의 유수행은 그렇게까지 파도가 거세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하면 유등행은 어떠한가?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름이 검은 건 그렇다 쳐도, 악취는 성지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아.’
백무량은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현재 유등행은 무언가에 오염되었고,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 유수행의 여의주가 평소보다 더욱더 강하게 기운을 내뿜은 게 아닌가 하는 가정.
그걸 확인하려면 유등행의 정상에 오를 필요가 있었다.
“가 보자.”
백무량의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일식경 후.
유등행 정상에 올라선 백무량은 기름의 진원지를 내려다보았다.
“…….”
본래 초목이었을 땅이 검게 물들어서 죽어 버린 식물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하물며 기름이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구멍은 어떤가?
백무량의 육감이 경고성을 발했다.
“마기인가.”
사천당가에 이어서 청성파에까지 침입하다니.
백무량은 쪼그려 앉아서 안을 살폈다. 요안의 남자보다도 더욱더 짙은 마기가 기름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이러니 조화가 깨질 수밖에 없지.’
백무량이 떠올린 가정이 옳은 셈이다.
한숨을 내쉰 백무량은 이곳을 정화할 방법을 떠올렸다.
‘여의주가 품었던 선기를 여기에 쏟으면 되지 않을까?’
손등에 머물러 있던 선기를 백선신검으로 유도한다.
아직은 어설픈 운용이었지만, 백무량은 유등행을 오르면서 어떤 식으로 쓰면 될지 이해하고 있었다.
펼칠 무공은 검해 때와 같았다.
‘구천화우검 삼 초, 호천풍연 천간투.’
선기를 머금은 백선신검이 일점을 향해 내질러졌다.
***
쿠구궁……!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이화겸이 고개를 돌렸다.
의외라는 표정에 담긴 경계심. 자기 뜻이 틀어진 것처럼 보였다.
“꼴좋군.”
이화겸을 비웃은 고성진은 선홍색 핏물을 게워 냈다.
내상이 심해서 내공을 끌어 올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화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건 아니었다.
쩌쩍, 쿠구궁……!
밑동이 잘린 고목이 옆으로 쓰러진다. 검과 권이 부딪친 현장엔 무수한 파괴 흔적으로 가득했다.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이만큼 싸워 놓고 다른 쪽에 관심이 간다, 이거지.’
대주천복마검의 진수는 아직 남아 있다.
고성진이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세웠을 때였다.
“아무래도 장난으로 할 시간은 끝난 것 같군.”
이화겸의 말에 고성진은 피식 웃어넘겼다.
“허세는.”
“숨만 붙어 있는 채 평생을 누워서 살고 싶으냐?”
이화겸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성진이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에 이화겸의 손가락 끝에 생소한 기운이 맺혀 있었다.
마기와는 조금 다르지만, 그보다 더욱 위험한 것.
고성진의 육감이 이화겸과의 싸움을 피하라고 경고했다.
‘젠장!’
고성진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런 괴물과 싸우는 건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일일 터였다.
하지만 고성진은 물러날 수 없었다.
이화겸이 고개를 돌린 그 방향에 백무량이 있었으니까.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잖아.’
청성산에서 백무량이 횡액을 입지 않게끔 돕는다.
그것 하나를 위해 강호행을 멈추고 이곳에 왔다. 상대가 청성파의 장문인일지라도 물러나지 않을 각오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화겸의 경지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싸우면 반드시 패배한다.
‘죽겠지.’
고성진은 패배의 대가를 곱씹으면서 현 상황을 떠올렸다.
어차피 백무량은 타문.
공동파 장문인의 대제자인 고성진과는 연결점이 없다고 봐도 좋았다. 이대로 도망치는 것이 사실 상책이었다.
그러나 고성진의 발걸음은 뒤로 향하지 않는다.
“여기서 물러나도 어차피 장문인한테 똑같이 당할 테니까.”
“흥, 같잖은 놈.”
이화겸이 두 손을 교차했다. 마기와 흡성공. 두 가지의 기운이 하나로 겹쳐지면서 잿빛의 색채를 머금었다.
만마탈원(萬魔奪原).
칠십여 년 전, 강호를 공포로 물들인 백련교의 무공이 청성산 언덕을 검게 물들였다.
***
“다행이군.”
백무량은 유수행의 파도가 차츰 가라앉는 걸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유등행 또한 조금씩 본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섭낭행을 향할 때였다.
“저긴가.”
기름이 흐르는 방향의 반대편.
유등행 너머에 커다란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데 크기가 유수행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넓었다.
물길의 흐름을 파악하던 백무량은 내심 감탄했다.
‘섭낭행을 이 근처 화전민이 부르기를 인심호(人心湖)라고 했지.’
무슨 의미로 붙인 이름인지는 몰라도 탁한 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물며 유수행처럼 파도가 거세지도 않았다.
백무량의 얼굴에 잠시 실망감이 어렸다.
“고행의 절반을 지나서 그런지…… 섭낭행은 쉽지 않나?”
섭낭행은 인심호를 내공 없이 건너는 고행.
유수행보다 넓기만 할 뿐.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나 기름처럼 움직임을 방해하는 요소도 없었다.
본래였다면 문제가 될 족쇄나 철구도 상당히 가볍지 않던가.
유등행에서 내려온 백무량은 천천히 섭낭행으로 다가갔다.
‘아무리 봐도 고행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유수행과 유등행이 유독 어려웠던 걸까?
한참 동안 섭낭행을 노려보던 백무량이 한쪽 발을 담갔다.
유수행처럼 내공을 빨아들이는 것 외에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음, 족쇄를 찬 채로 넓은 호수를 건너는 게 전부인 모양이군.’
백무량은 가벼운 마음으로 섭낭행에 몸을 던졌다.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섭낭행이 왜 고행이며, 화전민 사이에서 인심호라 불렸는지.
그 까닭은…….
“쿠르륵!”
백무량의 입가에서 물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전신이 말 그대로 아래로 끌어 내려지는 듯했다.
물귀신이 발목을 잡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심지어 호수가 어둡다니. 이건 원래 그런 건가?’
백무량은 애써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하지만 호수 내부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내공 하나 없이 시야가 어두운데, 전신이 아래로 향한다.
유례없는 위기에 백무량의 시야가 어지럽게 변했다.
-시각에 집착하지 말며, 힘에 집착하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라.
백무량은 제성진인의 조언을 떠올렸다.
아예 답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유등행도 결국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니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섭낭행 또한 답이 있겠지.’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이 눈을 감았다.
숨이 시시각각 폐부에서 빠져나가고, 몸이 아래로 끌어 당겨지는 위기감 속에서 오감을 예리하게 달궜다.
투둑, 툭.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물길.
그 속에서 무언가가 두드려지는 소리가 났다.
후기지수 중에서 유일하게 육체가 완성되어 있는 백무량만이 가능한 기적이었다.
‘저기다.’
백무량은 눈을 뜨지 않은 채 헤엄쳤다.
혹여라도 방향을 잃지 않을까, 헛수고가 아닐까, 공포가 일었지만 애써 짓눌렀다.
모든 걸 포기하는 것보단 유일한 가능성에 다가가는 게 나을 테니까.
그렇게 숨을 쪼개가며 목표 지점에 도달했을 때.
툭, 툭.
백무량의 팔에 무언가가 닿았다. 딱딱한 돌덩이와 같은 감촉을 서둘러 더듬었다.
“……!”
계단이었다.
숫자를 알 수 없는 계단으로 이루어진 기둥.
저곳을 오른다면 몸이 아래로 짓눌린다고 한들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척.
백무량은 양팔을 계단 위에 올린 채 서둘러 위로 올라섰다. 그렇게 위로 향할수록 전신을 짓누르던 부하가 줄어들었다.
그렇게 수백 개째.
“푸하!”
수면 위로 올라온 백무량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섭낭행의 실체를 봤다는 정보가 동시에 머리를 스쳤다.
그것이 모두 정리되니 백무량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내리깔렸다.
“제성진인이 왜 그런 조언을 했는지 알겠구나.”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수양이 깊은 도사일지라도 섭낭행을 통과하는 건 어려울 터였다.
이 넓은 호수에 기둥이 몇 개나 있겠는가?
곤륜파의 도사인 백무량마저도 호흡을 모두 빼앗길 뻔했다. 섭낭행 내부를 헤매는 동안 체력적인 소모가 너무 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제성진인이 말했었지. 불영행은 자연이 돌본다고. 그렇다면 섭낭행은 도사가 관리한다는 거지.’
게다가 제성진인은 학도사이지 않던가!
무인처럼 몸을 단련하지 않더라도 섭낭행을 관리할 수 있다면, 섭낭행에 일정한 법도가 있다는 뜻이다.
생각을 곰곰이 하던 백무량이 별안간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멍청했어.”
백무량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대사행이 청성파의 성지일지언정 나에겐 곤륜의 무학이 있지 않았나.”
그 목소리엔 확신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