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의 (5)
“저와 대련이라도 하시겠단 겁니까?”
“…….”
창백한 안색과 무표정한 얼굴.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백무량은 조심스럽게 백선신검에 손을 가져갔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베어 버릴 생각이었다.
내심 자신감도 있었다.
‘노선배가 아무리 뛰어나도 여긴 내 심상이야.’
어린아이가 청년이 되기까지 삼 년.
그동안의 성취가 백무량에게 있었으니까.
칠십여 년 전 구천검과 거의 대등해지고 있다.
백무량이 마음을 다잡고, 백선신검을 쥐었다. 노인이 무슨 행동을 취하더라도 반응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촌음(寸陰).
백무량의 자신감이 단숨에 무너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스르릉……!
노인이 어느새 제자리에서 일어나 고검을 뽑고 있었다.
‘대체 언제?’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뽑으며 노인을 살폈다.
그제야 유수행에서 만났던 노인과의 차이점을 알 수 있었다.
나이.
유수행에서 만난 노인은 고목(古木)과 같았는데, 지금 마주한 노인은 어렴풋이 연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략 오십에서 육십. 사부인 주자령과 비슷하다.
그러나 노인의 기세에서 느껴지는 강함은 사부와 감히 비할 수 없었다.
‘저게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인가?’
정극생동(靜極生動),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고 하였던가.
아주 잠깐 포착한 것에 지나지 않으나 노인의 움직임에는 아득한 현묘함이 있었다.
백무량은 노인에게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노선배?”
노인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고검을 명치까지 들어 올렸다.
“……!”
백무량은 노인의 움직임을 한 올 한 올 눈에 담았다.
천천히, 고요하게 움직이는 듯해도 그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노인이 펼치는 무공의 정체.
그건 백무량도 익히 아는 무공이었다.
“분광검, 아니, 분광뇌운결?”
분광검이 극쾌의 현상(現象)만을 보여 준다면 노인의 분광뇌운결은 한층 더 깊었다.
백무량이 청운이라고 이름 붙인 태청신공의 유형화. 노인은 그것을 뇌운으로도 활용하고 있었다.
‘뇌운이 분광검의 검경(劍經)을 조정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검해는 백무량에게 본래 이름을 알려 주었을 뿐.
무엇이 다르고, 어떤 점이 실전되어 분광뇌운결이 분광검이 되었는지 알려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인의 분광뇌운결은 견식하는 것만으로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초식에 따라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뇌운을 통해 검경을 열고 심의를 다하는 거였어.”
뇌운으로 길을 열고, 심의가 담긴 분광의 검을 휘두른다.
백무량은 운산보주가 펼쳤던 승검신광을 떠올렸다. 그의 분광검은 굉음을 불렀으나 노인처럼 극에 달하지는 못했다.
그것이야말로 정극생동.
검을 휘두르는 일순(一瞬)을 제외하면 노인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백무량의 눈에는 보였다.
끊임없이 맥동하는 심박, 분광과 뇌운을 동시에 그리는 심상,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심의.
분광뇌운결은 구천화우검 못지않은 상승의 검법이었다.
‘여태까지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역대 마교에 의해 실전된 무학이 이리도 많다.
백무량은 집요한 시선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노인의 유려한 움직임을 눈으로 훔치지 않으면 분광뇌운결의 완성을 자신의 대에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제야 노인의 정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일정 초식을 반복하고 있어.’
백무량의 머릿속에 옛 과거가 떠올랐다.
처음 동경(銅鏡 : 거울)을 보고, 얼굴이 너무 흐리게 보여서 당황했던 소년 시절의 백무량.
노인의 모습 또한 동경에 담긴 것처럼 흐릿했다.
때때로는 검해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노인의 피부가 너울 쳤다.
‘대화는 아까부터 통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검해가 노인의 과거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닐까?’
백무량은 유수행에서 노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지는 앞으로 알아 가면 그만 아니겠느냐? 나 또한 그랬으니,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라.
예전에는 백무량과 처지가 비슷했다는 듯, 노인의 말에는 형언할 수 없는 과거가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언제인지, 노인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곤륜파의 역사를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백무량이 모를 정도니, 까마득한 옛 선배이리라고 추측할 뿐.
백무량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백선신검을 가슴께까지 들고서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명상하듯이, 흘러가는 생각을 붙잡지 않고.
스으윽.
백무량은 노인의 분광뇌운결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처음이라 그런지 흉내라고 말하기도 엉망인 수준이었다.
‘종휘가 내 수련을 처음 따라 했을 때처럼.’
그때가 돼서야 현종휘와 처음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백무량은 피식 웃고 말았다. 겨우 삼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추억이 되어서는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어리숙했던 현종휘가 벌써 열세 살이 되었다. 무인이 되지 못할 성정이라고 여겼던 녀석이, 단호함을 갖추었다.
노인에게서 배울 분광뇌운결 또한 마찬가지다.
‘완벽함에 집착하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따라가듯이.’
백무량은 노인과 마주한 채 수없이 검을 휘둘렀다. 현실이었다면 내력이나 체력이 고갈되었을 터였다.
오로지 심상. 검해의 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감사(感謝).
검해라는 기연을 얻었음을, 칠십여 년 후에 만난 현씨 조손이라는 인연과 마주했음을, 사형의 안배와 마주하였음을.
그 모든 것에 백무량은 감사했다.
‘당장은 노선배가 펼치는 정극생동에 달하지 못했을지언정, 언젠가는 닿게 되어 있어.’
집착은 심마를 낳는다.
백무량은 검해가 보여 주었던 그림들을 떠올렸다.
만일 자신이 수련에 전념했다면, 강호를 떠돌지 않았다면, 검해와 일찍 만났다면……. 밑도 끝도 없는 후회의 조각들.
그것을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면 백무량은 노인의 분광뇌운결에 질투를 품었을 터였다.
‘그랬다면 또다시 실수를 반복했겠지.’
백무량은 여러 생각을 떠올리고, 흘렸다.
여러 도사가 말하는 무념(無念)이나 무아(無我)의 경지는 백무량에게 불가능했다. 백련교주라는 존재가 벽으로 남아 있는 이상, 자기 자신을 잊을 순 없었다.
칠십여 년 전, 백무량이 무인처럼 행동하였듯.
지금의 백무량은 대비하는 자였다.
‘청성파의 도사들이 갑자기 사라진 연유가 무엇일까, 사대사행을 무사히 돌파할 수 있을까.’
문제를 찾고 해답을 갈구한다. 백무량은 늘 그렇게 어려움을 이겨 냈고, 고난을 돌파했다.
운산보가 그러했고 사천당가의 지하에서 마주한 두 마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사대사행과 청성파의 도사들에게 나타난 이변.
백무량에게는 딱 좋은 고난이었다. 삼 년의 시간 동안 느슨해진 심신을 다잡을 정도로 충분했다.
그렇게 검뢰벽천, 일섬운월, 분광검결.
백무량은 삼절광식의 세 초식을 반복했다. 노인을 따라 수백 번을 펼치니 어슴푸레하게 분광뇌운결의 진의가 보이기 시작했다.
‘분광검과 분광뇌운결의 전개는 다르지 않아.’
단지 심의를 어디에 두고, 청운의 형상을 뇌운으로 바꾸는 것이 다를 뿐.
백무량이 조금씩 노인의 움직임을 따라잡기 시작할 때쯤.
“……!”
잔잔했던 파도가 지극히 격해진다.
노인의 검이 살아 있는 듯 요동치는 격렬함에 뇌운이 서로 뒤섞이고 겹치기를 반복했다.
구천화우검의 삼 초, 호천풍연 비류폭처럼.
백무량은 노인의 입술이 가늘게 열리는 것을 느꼈다.
[……신광(神光).]
본래 초식명은 승검신광(乘劍神光).
삼절광식을 한데 묶어서 완성한 초식이었다. 하지만 노인이 입 밖으로 흘린 단어는 신광뿐이었다.
‘분광뇌운결의 상승 초식은 분광검과 다른 건가?’
그 의문은 다음 순간에 새하얗게 변했다.
콰콰쾅!
승검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신광이 눈앞을 강타했다.
백무량의 시야가 새하얗게 일변하고,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가 귀를 강타했다.
‘본래 초식보다 훨씬 빠르고, 강맹하다.’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를 보았음에도 백무량은 순수하게 기뻐했다.
“내가 올라갈 경지가 이렇게나 명확하게 펼쳐져 있구나.”
분광검의 승검신광과 노인이 펼친 신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축약했을 뿐이다.
‘뇌기를 검에 응축하는 승검 과정을 뇌운과 심의로 대체하다니. 근접하지 않고 멀리서도 펼칠 수 있는 것 아닌가?’
분광뇌운결에서 본 가능성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적을 만나더라도 구천화우검 대신 분광뇌운결로 대응할 수 있으니까.
특히 원거리에서 선공을 취하는 적에게 효과적이었다.
“내 나이에 이것을 익힌다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지.”
백무량이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백선신검을 들었다.
검해가 보여 주는 무학의 길을 따라서, 우직하게.
백무량은 서두르지 않고 정도를 향해 걸었다.
***
“왜 이렇게 조용하지?”
청성산 외곽의 암자.
그곳에서 고성진은 청성파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혹여나 백무량이 끌려간다면 곧바로 전서구를 날리고, 뒤따라갈 작정이었는데 분위기가 묘하게 이상했다.
“아무도 없는 건가?”
고성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컨대, 도가의 하루는 매우 엄격했다.
매일 도덕천존에게 향을 피우고, 문파 내에서 뜀박질하면 안 되며 일정한 시간마다 도경을 독송해야 했다.
한데 청성파에서는 그러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변고가 생긴 게 아니고서야 청성파가 아직 도문의 가면을 쓰고 있는 이상 행동거지가 달라질 리가 없는데.’
고성진이 산비탈을 타고 내려왔다. 일단은 청성파에 접근해서 상황을 살필 작정이었다.
그저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청성산에 기거하는 도사가 있었나?”
“……망할.”
고성진은 갑자기 나타난 이화겸을 보고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이화겸의 기세가 무척 흉악했다. 운산보주와 마주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백무량과 다니면 운이 없어지는 건가.’
운산보주에게 패한 이후 사부인 척준환에게 얼마나 많은 욕을 먹었던가.
이번에도 패한다면 어떤 욕을 들을지 몰랐다.
고성진은 검을 뽑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내 이름?”
“그래. 내 무명(武名)에 기여할 이름 말이다.”
그 말에 이화겸이 하늘을 향해 대소했다.
청성파의 도사들도 자기를 이기지 못했는데, 저 어린 도사가 무명을 언급하니 우스워서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다만 고성진에게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었다.
“네가 사대사행에 도전한 놈이냐?”
‘무량이를 말하는 건가?’
고성진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이화겸이 조소를 머금었다.
“사실, 아니어도 상관은 없지.”
“……?”
“그놈도 이 산에서 내려가지 못할 터이니 말이다.”
이화겸의 손끝에서 마기가 피어올랐다. 고성진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도사가 된 이래로 언젠가 이럴 때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본 이화겸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태도만큼은 청성도 놈들보다 낫구나.”
“무공 또한 마찬가지일 거요.”
고성진은 하단전의 내공을 끌어 올렸다.
백무량과의 비무 이후로 얻은 깨달음을 모두 이화겸에게 쏟을 작정이었다.
심의가 실린 대주천복마검.
‘그거라면 마인에게도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거야.’
그런 고성진을 유의 깊게 관찰하던 이화겸이 사뭇 감탄했다.
“어린 도사 놈이 제법 숙(熟)한 경지에 올랐구나. 하지만…… 그것이 통하리라곤 볼 수 없지.”
그 말을 끝으로 이화겸과 고성진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