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의 (4)
‘사대사행을 두고 돌아갈 리는 없거늘.’
백무량은 유수행에 도전하는 사이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사형의 안배를 포기하고 청성파를 도울 순 없었다.
‘여의주를 취하고, 유등행으로 나아간다.’
백무량에겐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이대로 있었다면 유연걸을 비롯한 청성파의 도사들이 자신을 방해했을 테니까.
백무량은 숨을 고른 후 다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콰콰콰……!
옥색 파도를 연이어 빚어내고 있는 여의주.
처음에는 백무량의 손길을 거부하듯 물길을 미친 듯이 흩뿌렸으나, 손등이 가까워질수록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검해가 곤륜파의 영성이듯 손등의 운룡 또한 무언가의 열쇠이리라.
백무량은 이 사실을 머릿속에 기억하고는 여의주를 손아귀에 쥐었다.
“허!”
잡자마자 밀려들어 오는 선기(仙氣)와 내력.
백무량의 힘줄이 꿈틀거렸다. 빠져나갔던 내공이 하단전에 돌아오면서 여의주 내부에 있던 선기가 중단전으로 치달았다.
너무나도 신묘한 감각인지라, 백무량은 좀체 적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참지 못할 건 아니었다.
“후우우…….”
일다경 동안.
백무량은 여의주를 쥔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의주의 기운은 이질적이었지만, 태청신공과 뿌리가 다르지는 않았다.
천천히 받아들인다면 능히 소화할 수 있다.
여의주의 기운이 줄어들수록 유수행의 파도 또한 진정되었다.
그때 백무량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제성진인이 말한 유수행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만일 백무량이 여의주를 전부 취한다면 유수행의 조화가 깨질 터.
그렇게 되면 유수행이라는 성지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하물며 다른 사대사행에 어떤 영향이 갈지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백무량은 손에 힘을 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멈추자.’
청성파가 아무리 밉다고 한들 사대사행은 사라져선 안 될 도가의 성지요, 영성이니.
백무량은 여의주의 기운을 일 할 남겨두고는 손을 뗐다.
그러자 유수행의 파도가 한쪽으로만 휘몰아쳤다.
쿠르릉…….
‘저쪽이 유등행이라는 거냐?’
백무량의 혼잣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의주에 입이 달리진 않았으니까.
헛웃음을 머금은 백무량이 유수행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
“파도의 소리가 잠잠해졌군.”
이화겸이 차가운 눈으로 청성파의 도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사대사행에 누가 있었던 것이냐?”
“흥.”
유연걸은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백무량이 청성파의 적일지언정, 사대사행에 도전 중인 도사가 마인에게 죽게 둘 순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사대사행은 청성파가 멸한다고 한들 남겨야 할 성지니까.
그 생각은 다른 도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쉽게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이화겸이 빙긋 웃었다. 처음부터 유연걸에게 대답을 바란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지금의 상황을 즐길 뿐이다.
“그 의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기대해도 되겠느냐?”
이화겸의 말에 도사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악명은 칠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었다.
흡성공.
한때는 도가의 무공이었지만, 사특한 무인에 의해 마공으로 바뀌었다던가.
“이놈……!”
유연걸이 분노를 터트리자 이화겸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의 손끝에서 흡성공의 거무튀튀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진원진기까지 비워지고 나면, 그릇에 무엇이 남을까?”
“……!”
“청성파의 본산 제자가 목내이(木乃伊)로 발견되면 그것참 가관이겠구나.”
이화겸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에 모든 청성파의 도사가 몸을 뒤틀었다.
그것을 본 이화겸이 웃음을 머금었다.
칠십여 년 전에 이루고자 했던 광경이 눈앞에 있었다.
“교주께서 보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아쉽구나, 아쉬워!”
스윽.
이화겸의 손에 닿은 유연걸의 도복이 점차 파르스름해지다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
유수행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 백무량은 갑자기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시야에 담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광경.
그런 절경은 곤륜산맥을 휘감은 운해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것이 곤륜도의 자긍심이었고, 청해성의 자랑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대사행의 유등행 또한 신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과장이 섞인 줄 알았건만, 정말이었나?”
백 장 높이의 암벽에 흐르는 기름.
한데 기름의 색깔이 거무튀튀한 것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유수행이 옥색의 파도를 자랑한 것과는 달리, 유등행의 검은 암벽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어디를 잡고 올라가야 할지 모르겠어.”
백무량은 인상을 찌푸렸다.
험지인 곤륜산맥에서 살다 보니 맨손으로 가파른 암벽을 오른 적이 상당히 잦았음에도, 유등행은 도저히 오를 만한 길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저 검은 암벽처럼 보일 뿐이다.
‘있기는 한 걸까?’
유등행에 다가간 백무량이 벽에 손을 대었다.
찰박.
손에 있는 주름 하나하나마다 검은색 기름이 스며들었다.
끈적거리는 촉감과 예기치 않은 불안감. 백무량은 엄지와 검지를 비볐다가 떼었다.
“……음.”
백무량의 입가에서 침음성이 흘렀다. 기름의 검은 색상이 어느새 손가락에 배었다.
그곳에서 탁한 냄새가 풍겼다.
어딜 보나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백무량은 제성진인이 했던 조언을 불현듯 떠올렸다. 하지만 무턱대고 도전하기엔 유등행의 모습은 도전자의 침입을 불허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여기서 멈춰 있을 순 없겠지.”
처억.
그렇게 백무량이 유등행의 초입에 손을 대자, 내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여기까지는 유수행과 동일했지만, 다른 것이 존재했다.
‘이게 무슨?’
여의주에서 얻은 선기는 빠져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유등행의 기름에 더욱 큰 기세를 발했다.
백무량은 생각했다.
‘방금과 다른 게 뭐지?’
손가락을 비볐을 땐 분명 살이 썩는 듯한 악취가 났었거늘.
백무량의 시선이 기름이 붙은 곳으로 향했다.
“……아!”
손등.
여의주를 잠재웠던 운룡이 검은 기름 아래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기에 몰랐을 뿐이었다.
백무량은 선기가 조금씩 대맥을 흐르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함부로 기운을 움직일 순 없었다.
‘태청신공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아.’
여기서 위험에 처한다면 누구도 자신을 구할 수 없다.
불안함과 두려움이 백무량을 압박했다. 청성파의 도사들이 모두 사라진 지금, 상정하지 못한 적이 나타날지도 몰랐다.
‘여기서 시간을 오래 지체할 뻔했어.’
노인과 마주하지 않았다면.
백무량은 방법을 찾지 못했을 터였다.
‘찾는 거다, 나의 심상에 있는 검해에서…….’
백무량은 털썩 주저앉고는 손등을 유등행에 댔다.
쏴아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실전된 무학을 되찾기 위해 수없이 마주한 검해.
백무량은 매번 검해에게 답을 갈구했다. 위기의 순간마다 힘을 빌려줬듯, 답 또한 원하면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안일했음을, 노인이 꾸짖고 이야기해 주었다.
“심상에 기거하는 무학이라면, 무인이 익힐 수 있단 뜻이야.”
백무량이 눈을 감으니, 드넓은 검해가 펼쳐졌다.
저 파도에 이는 한 줌.
그것으로 백련교주에게 상처를 입혔었다. 그만큼만 익히면 족하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과 직접 대화하고 나니 마음이 달라졌다.
‘노선배가 말했지. 검해가 나에게 온 까닭은 천명이라고.’
백련교주 말고도 또 다른 마가 강호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백무량에게는 너무나도 섬뜩하게 다가왔다.
“안주해서는 안 돼.”
백무량은 도도하게 흐르는 검해 앞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전까지는 검해에게 답을 갈구했다면, 이제는 검해를 ‘무학’으로써 익힐 생각이었다.
유수행에서 얻은 선기로 사대사행을 돌파할 방법 또한.
검해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고 백무량은 확신했다.
저벅저벅.
백무량의 걸음이 검해 중앙으로 향했다. 심상이 아니고선 도저히 불가능한 광경이었다.
맨발로 바다 한가운데를 걷는다.
그저 걸으면서, 백무량은 많은 것을 보았다.
정확하게는 검해의 수면이 보여 주는 환상(幻想)이요, 기억이었다.
발걸음을 떼기 전부터 마보세를 취하던 어린 시절.
나의 부모가 누구냐는 물음에 쓴웃음을 짓던 사부.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을 귀찮은 표정 하나 없이 받아 주던 사형.
내공을 처음 느끼고 바위에 주먹질했다가 붕대를 감았던 소년(少年)…….
검해가 백무량의 기억을 읽고 빚어내던 그림이 수십으로 분화했다.
그 그림은 백무량이 잊고 있었던 과거의 후회를 보여 주었다.
“…….”
백무량은 주먹을 꽉 쥐었다.
사부와 함께 백련교의 난을 대비하는 중년.
악전고투 끝에 백련교주를 꺾은 영웅.
강호십대고수를 넘어선 검선 백무량.
칠십여 년 후의 세계에 남겨지지 않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 노년.
백무량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어쩌라는 거냐, 나에게.”
유수행의 여의주가 그랬듯이 검해 또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단지 수면에 퍼지는 큰 파문이 백무량의 격동을 암시할 뿐이다.
“나에게 왜 이런 걸 보여 주는 거냐. 뭘 더…….”
백무량의 목소리가 메말랐다.
현씨 조손과 함께 호흡하면서 애써 잊었던 그리움이 떠올랐다.
사형, 주백천이 남긴 안배가 너무나도 자세한 걸 보고 느꼈던 불길함이 그리움과 섞였다.
“내가 심마에 빠지길 바라는 거냐?”
메마르고 성마른 중얼거림이 심상을 울렸다. 파문에 불과했던 것이 점차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유수행의 파도처럼, 검해가 점차 일그러져 갔다.
쩌적.
곤륜의 무학으로 이루어진 바다에 균열이 그려지던 그때.
손등의 선기가 백선신검으로 흘러들어 갔다.
“이건…….”
백무량은 본능적으로 그 검을 어디에 휘둘러야 할지 깨달았다.
구천화우검 삼 초, 호천풍연 천간투.
백선신검이 검해의 표면을 향해 휘둘러졌다.
쩌저적!
균열로 불안정했던 검해가 양옆으로 갈라졌다. 백무량의 신형이 검해에 젖어 들었다.
유수행의 흐름에 몸을 맡겼듯, 백무량은 편안한 마음으로 잠겨 들었다.
촤아아…….
백무량의 전신이 검해에 젖었다.
처음에는 몹시 차가웠지만, 백선신검을 통해 흐르는 선기가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해 주었다.
‘이거였구나.’
백무량은 그제야 깨달았다.
‘검해가 나에게 환상을 보여 준 건, 시각에 집착하지 말란 뜻이었어.’
삼 년 전, 검해를 마주한 백무량이 무엇을 했던가.
창천명월로 폭포를 베었고 검해가 보여 주는 심상으로 초식을 펼쳤다.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겉면에 집착했다.
그저 보여 주는 것을 펼칠 뿐,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검해의 표면을 걷기만 하였지. 막연히 중앙을 목표로…….’
따라서 검해는 백무량을 이끌고 있었다.
단순한 겉면이 아니라, 더욱 깊은 곳으로.
곤륜파의 무학이 잠자고 있는 검해의 아래로.
“나를 어디까지 데리고 갈 셈이냐?”
검해의 물결이 백무량 앞에서 유형화하기 시작했다.
“……노선배?”
심천의 도복을 입은 노인.
그가 고검(古劍)을 든 채 정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