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의 (3)
“저대로 보내면 안 된다…….”
유연걸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유수행을 통과하도록 둔다면 앞으로 있을 유등행부터 추적할 수 없었다.
그것이 사대사행의 법도였고, 청성파의 율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유연걸의 머릿속을 밝히는 예감이 있었다.
곤륜신성 백무량이 우화하여 선경에 다다르는 광경.
타문인 백무량이 개파조사가 남긴 흔적에 다다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것은 유연걸에게 있어 가장 큰 절망이었다.
“본 문의 약점을 잡혔는데 그것까지 손에 넣게 둘 순 없어.”
“무슨 말을 그리 중얼거리느냐?”
사군성이 유연걸에게 다가갔지만, 유연걸은 이미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삼 년 동안, 사대사행에 계속 도전하면서 느낀 본능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장로님, 저놈, 저대로 보내면 안 됩니다.”
“왜냐?”
“사대사행을 저놈이 돌파할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한 번으로요.”
“……!”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에 사군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유연걸답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가 그 소리를 사실감 있게 만들고 있었다.
“운산보의 기록이 밝혀지는 것보다, 청성파의 고행이 저 곤륜도에게 짓밟히는 게 더욱 치욕적이지 않겠습니까.”
“너, 설마…….”
“한 번 눈 돌린 도의, 두 번이라고 못 하겠습니까?”
유연걸의 눈동자가 고요하고 깊게 가라앉았다.
그 시선에 담긴 주인공, 백무량은 턱을 매만졌다.
주위가 파도로 들썩이는데도 너무나도 여유로운지라 청성파의 도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유연걸처럼 확실한 본능은 아니었지만, 그들 또한 기시감을 느꼈다.
곤륜신성이라면 사대사행을 통과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가능성.
백무량의 시야에 청성파 도인들의 질시와 불길함이 보였다.
“…….”
백무량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젠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헛된 방법을 고집하여 진의를 목도하지 못한 얼치기들이 이제 와서 자신을 시기하다니, 어불성설이었다.
당장이라도 유수행을 뛰쳐나가서 저들을 꾸짖고 싶었다.
‘그것보다는 역시, 사대사행을 돌파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좋겠지.’
꾸짖어 봐야 결국 곤륜신성이라는 후배에게 굴욕을 당했다는 감정이 남을 뿐이다.
그렇다면 저들에게 적합한 심판은 무엇이겠는가.
“잘 보아라, 유수행의 진의를 보여 줄 터이니.”
백무량은 그 한마디를 남긴 채 유수행 안으로 잠행했다.
그것을 보면서 유연걸이 무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유수행에서 저놈을 끌어내라!”
청성파의 장문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마지막 자긍심마저 찢어 버리는 지시였다.
그 의미를 잘 아는 사군성이 유연걸을 노려보았다.
“사대사행의 규율마저 어기겠단 말이냐?”
“청성의 가르침이 곤륜도에게 넘어갈 것이라면 그깟 규율, 어기는 것이 낫습니다.”
“네, 이놈……!”
분기를 참지 못한 사군성이 내력을 끌어모았다.
그 모습에 유연걸은 마음을 굳혔다.
“제자들은 들어라.”
“…….”
“오늘 있었던 일은 죽기 직전까지 함구한다. 책임은 장문인인 내가 지겠다. 그러니, 하명하겠다.”
유연걸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시각부터 백운각주 목원장과 집법당주 사군성을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구금한다. 또한, 곤륜신성 백무량의 도전을 막는다.”
“……장문인!”
“이게 무슨!”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청성파의 도사들이 일제히 검에 손을 가져갔다. 아무리 유연걸이 장문인이라고 한들 이번 일은 도를 넘었다.
평소에 품고 있던 불만이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순간.
“사대사행에서 싸움질이라? 청성파도 옛 명성을 잃었군.”
철로 만들어진 현(絃)을 칼로 긁는 듯한 불협화음.
반라의 노인이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살집이 워낙 없는지라 뼈가 피부 위로 드러나 보일 지경이었으나, 누구도 노인을 비웃지 못했다.
“다, 당신은……!”
사군성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노인은 분명히 칠십 년 전에 죽었을 터.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선 안 될 자였다.
“백련교 좌호법 이화겸(李禾鎌)!”
“이 노신(老身)의 이름을 기억하는 자가 청성에 남아 있다니, 영광이네.”
이화겸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자리에 본 교주의 행방을 아는 자가 있다면 살려 주지.”
그 말을 믿는 도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이화겸의 손끝에서 흡성공의 기운이 맹렬히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조용하군.’
백무량은 유수행 안에서 정신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나를 방해하러 올 줄 알았는데, 자존심 때문인가?’
유수행의 진의.
그것을 타문인 백무량이 보여 주면 당연히 반발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청성파를 도발한 까닭이 있었다.
‘그래야만 승복할 테니까.’
환약을 삼킨 도사들과, 그것을 해독한 백무량.
전자는 유수행을 거스르고, 후자는 유수행에 순응한다.
그 차이를 보고 나면 청성파의 도사들도 승복하리라고 여겼다. 아무리 타락했다고 한들, 개파조사가 남긴 사대사행의 진의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법이었다.
곤륜파가 멸망을 반복할지언정 곤륜산맥에서 벗어나지 않았듯이 말이다.
‘……오지 않네.’
백무량은 유연걸의 얼굴을 떠올렸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끌어 올릴 것 같은 표정이더니 생각보다 분노를 잘 다스리고 있는 듯했다.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보여 주면 그만이야.’
백무량의 몸이 매끄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순행(順行). 전신이 탈력에 빠져 있기에 가능한 기행이었다.
숨은 최대한 아꼈다.
저 앞에 있는 거대한 기류, 그러니까 유수행에 이상을 만든 구체에 다다르려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 몰랐다.
‘동굴에선 그저 내가 몸으로 나아가면 되었지만, 이번에는 물과 함께 호흡해야 해.’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수많은 도학에서 나오는 인용구지만 백무량은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산을 마주하면 길을 만들고, 강을 마주하면 배를 만드는 존재였으니까.
태생적으로 자연과 화합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궁리인 무공은 어떠한가.
‘깊게, 아무런 두려움 없이…….’
백무량은 눈을 감았다. 시각을 닫으니 오감이 열리고, 오감을 엮으니 심상이 열렸다.
검해.
곤륜파의 무공으로 이루어진 바다, 그 일렁거림이 어두운 시야에서 일렁거렸다.
내공 한 줌 없는 몸임에도 백무량은 검해의 심상을 빚어내는 데 조금의 어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천천히 녹여 낸다.’
백무량은 유수행의 흐름에 검해를 녹였다. 처음에는 파도가 크게 반발하였으나, 원류의 선기(仙氣)를 느꼈는지 이내 잠잠해졌다.
그렇게 한 걸음.
백무량이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수면 아래가 아니라 땅을 딛듯이, 백무량의 운신(運身)은 무척이나 자유로웠다.
의아함을 느낀 백무량이 고개를 숙여, 아래를 굽어보니.
스르륵…….
일찍이 창천명월로 갈랐던 폭포가 발아래를 지탱하고 있었다.
백무량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검해와 백무량을 잇는 백선신검이 청명한 빛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안정감을 느낀 백무량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을 때.
유수행의 흐름이 멈춰 있었다.
[삼 년의 시간은 어떠하였느냐? 낭비하지 않았노라고 자신할 수 있느냐?]
삐뚤빼뚤한 수염, 심천(心天)이라고 쓰인 도복.
삼 년 전, 동굴에서 마주했던 노인이 눈앞에 있다.
백무량은 노인을 주시했다. 삼 년 전처럼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마주할 줄 알았습니다.”
[허, 그러하더냐.]
노인의 목소리는 유수행 전체를 울리고도 남는다.
백무량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고통을 느꼈지만, 아주 잠시뿐.
발을 지탱하는 검해를 막(膜)의 형태로 늘린다.
그것으로 노인이 발하는 압력을 받아 낼 수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맺혔다.
먼 곳에서 온 손자를 맞이하는 할아버지처럼 환했다.
“말해 주십시오. 노인장께서는 제 사형과 무슨 관계십니까? 검해와 백선신검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내가 가진 추(錘)는 너무 무겁다.]
뚱딴지같은 소리.
백무량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노인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는 선문답 같은 게 아니었다.
“나를 후인(後人)으로 여기시거든, 제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네 사형이라면…… 주씨 성의 학도사를 말하느냐?]
“예. 이십육 대 제자 주백천입니다.”
노인의 얼굴에 웃음이 덜어지고, 씁쓸함이 담겼다.
백무량은 노인의 반응에서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말씀하십시오.”
[중하느냐?]
겨우 네 음절. 뜻을 전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말.
하지만 백무량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고 무거운 물음이었다.
“예. 그러니, 진실을 알려 주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저울은 커진다. 그때가 되면 내가 가진 추 또한 담을 수 있겠지.]
추가 무겁고, 저울이 커지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백무량은 백선신검에 손을 가져갔다. 말하지 않는다면 베겠다는 기세를 드러내자, 노인이 빙긋 웃었다.
[뭐가 그리 급하느냐?]
“노인장, 아니, 몇 대인지도 모를 사조님께선 급하시지 않겠지만 저에게 사형은…… 가족입니다.”
[어리석다. 검해를 몸에 품고도 우답(愚答)을 내놓느냐.]
노인의 표정이 사뭇 엄격해진다.
삼 년의 시간을 가지고도 아직 검해의 실체를 깨닫지 못했냐는 조사의 꾸짖음이 백무량을 압박했다.
“하면…… 말해 주십시오. 부족한 후배가 이해할 수 있게끔!”
[네가 지금 자리한 유수행은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만든 성지요, 특별한 영성이 자리하는 곳이다.]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면 곤륜파는 어떠하느냐. 그래, 네가 아는 곤륜파의 영성은 어디에 있느냐?]
“그건…….”
백무량은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부끄러움이 양 뺨을 뜨겁게 덥혔다.
알지 못했다. 물론 그것에 이유는 있었다.
곤륜파가 성화교와 칠성교, 그리고 천마신교 같은 마교에게 연이어 멸문당하면서 많은 기록들이 손실되었으니까.
‘심지어 나도 백련교주에게 패배하지 않았나.’
이 사실을 이름조차 모르는 사조에게 내놓기가 너무나도 창피했다.
노인은 그 속내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에는 노인의 과거와 얽혀 있었다.
[무지(無知)는 앞으로 알아 가면 그만 아니겠느냐? 나 또한 그랬으니,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라.]
“예? 그렇다면 검해는…….”
[검해는 마(魔)와 싸우기 위해 곤륜파의 개파조사께서 만든 영성이오, 심상에 기거하는 무학(武學)이다.]
“……!”
백무량은 어떠한 대답도 내놓지 못한 채 경악했다.
‘곤륜파에도 청성파나 화산파처럼 개파조사께서 남긴 것이 있었구나!’
하물며 그 검해가 자신에게 기거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백무량의 표정을 본 노인이 하려던 말을 이었다.
[모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검해의 뜻은 사람으로 하여금 짐작하거나 유도할 수 없으니 천명(天命)! 검해가 너에게 기거한 까닭도, 내가 그곳에 존재하는 까닭도 알지 못한다.]
노인이 한쪽 입술을 이죽거렸다.
[이제 슬슬 숨이 차지 않더냐?]
“……!”
백무량은 순간 눈을 감았다 떴다.
어느새 노인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고, 눈앞에는 거대한 기류를 품은 구슬이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여의주.
옥색 파도를 품은 수룡(水龍)의 것처럼 보였다.
그때 백무량의 폐부가 공기를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일단은 숨부터 고르자.’
그렇게 백무량이 유수행의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다들 어디로 간 거지?”
유연걸을 비롯한 청성파의 도사 모두가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