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81화 (81/275)

진의 (2)

“너…… 네놈이 어떻게?”

“여기서 소리라도 질러 주랴? 네가 환약에 독을 탔다고.”

백무량은 유연걸의 멍청한 반응을 비웃었다. 저 멀리 있는 사군성이라면 뻔뻔하게 대응했을 터였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자신에게 하독을 했다는 누명을 씌워 청성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속셈이 아니냐며.

하지만 유연걸은 그러지 못했다.

그가 상실한 주도권은 고스란히 백무량에게 향했다.

“사대사행으로 안내해.”

“…….”

유연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에게 하독당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사대사행에 도전하겠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그가 드러낸 의문에 백무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청성파는 언제든지 무너뜨릴 수 있어.’

운산보주가 남긴 비망록.

비망록을 증거와 함께 공표한다면 청성파는 강호의 지탄을 받을 것이다. 최소한 십 년은 봉문하거나, 까딱 잘못하면 멸문당할 터였다.

‘봉문으로 끝낼 거였다면 삼 년의 공을 들이지도 않았지.’

굳이 하독당한 사실을 밝히지 않더라도, 무기는 준비되어 있다.

삼 년 동안의 준비가 백무량을 여유롭게 만들었다.

운산보와 싸우기 급급하고, 곤륜파의 기틀을 잡기 위해 사천성으로 달려가길 마다하지 않던 때와는 다르다.

백무량의 모습을 본 유연걸이 이를 빠득 깨물었다.

[산공독까지 모두 해독한 게냐?]

[그래.]

[흥.]

코웃음을 친 유연걸이 뒤따라오라는 듯 등을 보였다. 백무량은 유연걸을 뒤따라가며 주변을 살폈다.

처음에는 평범한 산길이었으나 일식경쯤 걷고 나니 환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진법인가.’

말뚝이나 부적 하나 없이 펼쳐진 자연진이라.

백무량은 태청신공을 운용하며 진법의 흐름을 파악했다. 처음에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대지를 딛고, 천지와 호흡하니 테두리가 눈에 띄었다.

청성산과 사대사행의 경계를 긋는 선.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곤륜산맥의 운해가 그렇듯 청성산의 사대사행에도 뚜렷한 선기(仙氣)가 느껴졌다.

‘참으로 안타깝구나.’

백무량은 깊게 한탄했다.

이런 선경을 가지고도 더욱더 많은 것을 욕심낼뿐더러, 남을 희생하여 얻으려는 그 갈망이 이해되지 않았다.

‘만일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이 자리, 이 시대에 있었다면 무어라 말했을까?’

백무량이 이런저런 생각을 품는 사이.

유연걸은 협천곡(狹川谷) 길목에 걸음을 내디뎠다.

“거의 다 도착했다. 준비하는 게 좋을 것이야. 뭐, 무슨 짓을 하든 결국 실패하겠지만.”

“……?”

저주라기에는 확신으로 가득한 말.

백무량이 눈살을 찌푸리자 유연걸이 비소를 머금었다. 말할 이유가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제성진인, 족쇄를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행렬에서 벗어난 제성진인이 유연걸에게 다가갔다. 제성진인의 손에는 묵직한 무게의 족쇄와 철환이 있었다.

“어디 한번 확인하지.”

제성진인에게 족쇄를 건네받은 유연걸의 웃음이 짙어졌다.

백무량이 보기에도 제성진인이 준비한 물건은 나무뿌리를 짓이길 만큼 무거웠다.

“저놈한테 채워라!”

유연걸의 득의양양한 미소.

백무량은 인상을 찌푸렸다. 내공이 잔존한다고 한들 저런 걸 차고 다니긴 버거워 보였다.

하물며 도전할 곳은 사대사행의 유수행이 아닌가.

‘쉽진 않겠군.’

백무량이 한숨을 내쉬는 동안 제성진인이 다가왔다.

스윽.

가까이 다가온 제성진인이 소매를 들췄다. 백무량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제성진인의 소매 안쪽에 또 다른 족쇄가 있었다.

“……!”

“채우겠습니다.”

제성진인이 무거운 족쇄를 또 다른 족쇄와 바꿔치기했다.

철컥.

철환은 어쩔 수 없었지만, 족쇄가 가벼워졌다는 것만으로 큰 소득이다.

백무량은 말없이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제성진인 덕분에 긴장감이 많이 덜어진 것 같았다.

“힘내시게.”

제성진인이 조용히 그 한마디를 남기고 뒤로 물러섰다. 이제부터는 백무량의 싸움이었다.

학도사가 끼어들 수 없는 고행자의 길, 사대사행.

백무량은 유연걸을 따라 협천곡 끝에 다가섰다.

쏴아아……!

협천곡 아래에 좁은 하천이 있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풍랑과 파도. 발을 담그기만 해도 빠른 유속에 휘말릴 듯했다.

백무량은 속으로 신음했다.

‘이래서 유수행인가.’

내공을 운용하지 않고, 족쇄를 찬 채로 이곳을 건너라니.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과연 청성파가 고행의 성소로 유명할 만했다.

하지만 백무량은 지금 산공독을 해독한 상태가 아니던가.

태청신공을 운용한다면 유수행을 무리 없이 건널 수 있으리라.

백무량이 자신 있게 유수행으로 몸을 던진 순간이었다.

[사대사행에 도전하기 전에 왜 산공독을 먹이는지, 몸으로 알게 될 것이다.]

유연걸의 전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백무량의 오감이 경고성을 발했다.

첨벙!

몸이 파도에 닿는 것과 동시에 하단전의 내공이 물밀듯이 빠져나갔다.

“……!”

백무량의 부동심이 깨졌다. 빈자리에 당황과 놀람이 자리 잡았다.

내공을 빨아들이는 파도가 전신을 때린다. 현세의 것과는 달랐다.

마치 심상에서 마주한 검해처럼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허억, 헉!”

탈력감이 백무량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가볍다고 느껴졌던 족쇄가 몸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하물며 아래에 달린 철환은 어떻던가.

물을 집어삼킨 폐가 비명을 질렀다. 눈동자는 파도에 얻어맞아 붉게 물들었다.

‘이런 거였나.’

백무량은 제성진인의 조언을 떠올렸다.

시각에 집착하지 말며, 힘에 집착하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백무량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몸에서 빠져나가는 내공을 긍정하고, 스스로 만든 두려움을 지우려 노력했다.

“……후우.”

백무량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랬다. 결국, 백무량이 택한 것은 곤륜파의 호흡이요, 검해에서 얻은 무학이었다.

그것이 백무량을 이루는 첫머리였으니까.

호흡을 머금은 백무량이 물 안으로 파고들었다.

어린아이가 자맥질하는 것처럼 어리숙한 몸짓이었으나, 백무량은 점차 답을 찾아가고 있었다.

평범한 답이 아니라,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후인에게 바랐던 답.

순응(順應).

‘모든 내공을 빠져나가고 나니 유수행의 흐름이 느껴지는구나.’

산공독을 취했다면 대맥과 단전에 남은 공력 때문에 느끼지 못했을 감각이었다.

백무량은 탈력감에 전신을 맡겼다. 유수행에 이는 파도가 자신을 더 높은 경지로 데려다줄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유연걸이 우스웠다.

‘사대사행에 진의(眞意)가 있거늘. 지금까지 청성은 산공독을 취하고 도전했단 말인가?’

백무량은 유연걸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백무량의 오해였다.

***

‘지금쯤이면 물속에서 발버둥 치다가 기절했겠지.’

유연걸은 백무량의 오만을 비웃었다. 청성파의 역사 속에서 유수행을 산공독 없이 도전한 도사가 없을 리가 없었다.

대부분 실패했을 뿐이다.

‘모든 내공이 빠져나가는 감각에 동요하지 않을 무인은 없다.’

특히 높은 경지에 있을수록 견디기가 불가능한 두려움이요, 심마였다. 거기다 족쇄와 철환을 차고 있으니 물귀신이 잡아끄는 환상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죽는 도사가 백 가까이 되자, 청성파는 대책을 세웠다.

산공독과 약재를 섞은 환약.

그 약으로 공력을 흩뜨려 혈맥에 가두니 공포가 줄었다. 유수행을 돌파하는 숫자 또한 늘어났다.

“전통을 유지하지 못하여 죄스러운 마음이기는 하나, 동도가 죽는 것을 묵과할 수 없는 법.”

한 장문인의 결단으로 유수행의 법도를 바꾸게 되니.

그로부터 어느새 이백 년.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의도한 진의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시간이 그토록 길었다.

현 장문인인 유연걸 또한 진의를 모르는 도사 중 한 명이었으니 말이다.

“슬슬 구할 준비를 하여라! 죽게 두어선 아니 되니!”

유연걸의 얼굴에는 백무량이 실패했으리란 확신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유연걸은 알지 못했다.

청성파가 전통을 유지하지 못하여 개파조사가 남긴 진의를 잊었을 때.

곤륜파의 도사는 검해를 통해 진의를 이어 가고 있다는 것을.

***

백무량은 유수행 안에서 명경지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호흡을 일절 낭비하지 않은 채로 유수행의 흐름과 근원을 관조했다.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목숨을 먹어 치우는 파도 아래에 옥색의 강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색채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백무량은 유난히 혼잡한 흐름으로 나아갔다.

구체의 형상을 띤 기운이 거품을 연신 뿜어내고 있었다.

‘저게 제성진인이 말했던 건가.’

유수행의 이상을 일으킨 본체이리라.

백무량은 그곳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하지만 강대한 기류가 백무량의 몸을 세차게 밀어냈다.

모든 접근을 불허하는 듯한 기류에서 백무량은 익숙함을 느꼈다.

백선신검이 있었던 동굴.

통로 끄트머리에 있던 돌풍이 저 기류와 닮았다.

‘사형이 의도한 것일까?’

애초에 사람이 남길 수 있는 안배이긴 한 걸까?

백무량은 헛웃음을 머금었다가, 기침을 크게 뱉었다.

‘물속인 걸 깜빡했어.’

앞서 얻은 안배가 뒤로 이어진다니.

대체 칠십여 년 동안 주백천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설마 종남에 있던 십우도가 청성파로 팔릴 줄도 알았을까.

백무량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사형에게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존경심이 커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내가 알던 사형과 다를지도 모르겠구나.’

본래 천기에 순응하면 우도방(右道房)이요, 누설하면 좌도방(左道房)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백무량이 아는 주백천은 우도방이었다.

항상 심신을 수련하여 올바른 도를 쌓았다. 그렇기에 많은 도사가 사형을 존경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천기를 읽고 안배를 남기는 건 좌도방의 방식이야.’

주백천이 안배를 위해 남긴 그림이 무려 다섯 점.

동굴에 잠들어 있던 돌풍과 유수행 모두 주백천의 자력이 아닌 타력(他力)이었다.

스스로 쌓은 도가 아니라 남의 것을 빌렸으니 그릇된 도라고 볼 수 있었다.

백무량은 주백천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본래 우도방이었던 도사가 좌도방의 방식을 펼치면 그 반동으로 더욱더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기 마련이니까.

‘백련교 때문이었겠지.’

백무량이 어금니를 꽉 앙다물었다.

삼 년 동안 충분한 성장을 이뤘으니 이제는 곤륜파의 부활을 강호에 알리고, 주백천의 행방을 찾을 때였다.

유수행에서 멈춰 있을 이유가 없다.

촤아악-!

백무량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숨을 고르니 청량한 공기가 폐를 시원하게 긁어 주었다.

그때 등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직 도전 중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장문인?”

두 도사가 백무량을 화등잔만 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오랜 시간 동안 기척 하나 없기에 기절한 줄 안 듯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백무량은 실소를 터트렸다.

“하, 하하…….”

“놈.”

유연걸이 인상을 찌푸렸다. 백무량을 사로잡으려고 했던 계획이 조금씩 깨어지는 기분이었다.

파도가 저리 휘몰아치는데도 저런 웃음을 보였다는 건, 유수행을 통과할 자신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러다 문득, 유연걸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저게 무엇이냐?”

유연걸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수행에서 모든 내공을 잃었을진대, 백무량의 눈빛에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그것이 마치 검으로 이루어진 바다를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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