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의 (1)
백무량은 검을 늘어뜨렸다. 고요하고, 명정한 마음으로 차분히 고성진의 검기를 노려보았다.
‘왜 갑자기 비무를 청하나 했더니…….’
손에 사정을 둔 듯했다. 예전에 본 고성진의 검로는 저렇게 느릿하지 않았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긴장감을 덜어 주려고 그러나.’
백무량은 피식 웃고 말았다. 사대사행을 함께 조사하는 동안 고성진도 알았을 것이다.
사대사행은 힘으로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심의(心意)의 강인함으로 돌파한다는 것을.
이번 비무로 자신감을 북돋을 수 있다면 백무량이 사대사행을 돌파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 비무를 청한 것 같았다.
“오십 초만 어울려 드리지요.”
땅을 향했던 백선신검이 반원을 그린다. 백무량이 손목을 휘돌리니 청운이 검극에 맺혔다.
넓고 큰 하늘에 흐릿한 기운이 맺히니, 호천풍연이라.
구천화우검의 삼 초가 고성진의 검기를 향해 쏘아졌다.
콰쾅!
검기가 호천풍연을 가르려다, 되레 구름에 삼켜진다.
고성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가볍게 시작한 비무가 다른 감정으로 번지고 있었다.
호승심인지, 혹은 질투인지. 고성진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상관없다.
고성진이 웃음을 숨기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이번 비무로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마음껏, 있는 힘껏 휘두를 작정이었다.
뒤이은 반걸음, 고성진의 칼이 호천풍연을 베었다.
한 번으로 보이는 참격, 그 안에 담긴 수십의 검로. 복마검이 대주천하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였다.
눈으로 보았다고 하여 실체를 알아차릴 수 없다.
‘직접 검을 마주하는 수밖에.’
판단을 내린 백무량은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을 이겨 냈다.
“다가오는가.”
고성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부인 현천신검이 주의를 내린 바가 있었다.
대주천복마검을 보고도 물러나지 않는 자는 조심하라고.
“이 광경을 보면 장문인께서 기겁하시겠군.”
현천신검 척준환이 말한 무인은 적어도 이립이 넘은 고수였지, 백무량처럼 열여섯의 청년이 아니었다.
심지어 백무량은 대주천복마검의 일면을 목도했다. 알고도 다가온다면 대처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고성진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견식해 보겠나?”
“…….”
백무량은 대답하는 대신 백선신검을 쥐었다. 기수식은 방금 일합을 교환하면서 끝났다.
그러니, 교검(交劍).
두 무인의 검극이 부딪쳤다. 인사를 나눈 직후, 백무량의 공타식이 허공을 두들겼다.
타앙!
백무량의 신형이 한순간 지워지고 앞으로 쏘아졌다. 백선신검에 서린 청운의 형상이 시퍼런 빛을 흩뿌렸다.
고성진은 뒤로 물러나면서 대주천복마검을 펼쳤다. 회천행(回天行). 참격에 담긴 검로가 기이하게 뒤틀리며 백선신검을 쳐 냈다.
“……!”
허초라곤 조금도 없는 실초.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겨우 일합임에도 손목이 저릿했다. 고성진의 검에 가히 천근의 무게가 실려 있는 듯했다.
“겨우 이 정도에 놀라서야 되겠나.”
고성진의 어조가 후배를 놀리듯 잔망스러웠다. 그러나 백무량은 쉬이 달려들지 않았다.
고성진이 펼치는 검법은 일반적인 무공과는 달랐으니까.
‘일거에 날리고, 그 반응을 본다.’
백무량이 호흡을 다스렸다. 잔뜩 긴장해 있던 근육이 느슨해지며 변화의 여유를 갖췄다.
그 모습을 본 고성진은 웃음을 지웠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고요가 백무량에게 드리워져 있었다.
선공을 취하는 건 매순간 가능했다.
하지 못한 까닭은 단 하나. 백무량의 전신에 드리운 청운에서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이었다.
그 위화감이 백무량에게 선공을 가져다주었다.
파직!
분광뇌운결(分光雷雲訣).
백선신검이 흩뿌린 수십 개의 뇌기가 고성진을 향한다.
고성진은 선공을 잃었음에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그저 검을 휘돌렸다.
“대주천복마검은 패하지 않는다.”
공동파가 공동파로서 자답하는 힘.
대주천복마검이 큰 흐름을 그린다. 삼절검, 소양검, 개천검에 이르는 공동파의 무학이 흐름을 잇고, 덧붙인다.
그것이야말로 대천행(大天行). 고성진의 칼날에서 흐르는 파도가 수십 개의 뇌기를 터트렸다.
연이어 터지는 폭음 속에서 백무량은 감탄했다.
‘공동파에도 구천화우검에 밀리지 않는 무학이 있었구나!’
곤륜파가 우월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고 있었건만, 고성진이 펼치는 무공 또한 만만치 않다. 백무량의 얼굴에 호선이 그려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떨까.’
백무량의 심상이 짙어진다. 청운과 청운이 교차하여 완연한 조화를 그리니, 곧 운해가 되어 허공에 흐드러졌다.
“……!”
고성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천행의 흐름으로 막을 수 없는 무게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고성진은 팔을 뒤로 빼냈다. 힘과 힘의 대결을 고집했다간 대주천복마검이 깨질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허(虛)로 상대하는 수밖에 없다.
휘르르…….
대주천복마검이 또 다른 흐름을 그렸다.
유천행(幽天行).
대천행이 검로를 흐름으로 다룬다면 유천행은 일점에 응축시켜 허와 실을 구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효용이 있었다.
‘저건.’
백무량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구천화우검과는 다르나, 같은 뿌리에서 분화된 초식처럼 보였다.
백무량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초식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유천행.”
“……과연.”
구천화우검의 구초식이 유천앙시(幽天仰視).
백무량은 속으로 웃었다. 목표하는 바가 아예 다르기는 하나, 공동파 또한 곤륜파와 같은 바탕을 품고 있었다.
구천화우검이 흩뿌린다면 고성진의 검법은 흐름에 담는다.
그것을 알고 나니 해답이 보였다.
“비류폭(飛流瀑).”
백무량의 입술이 초식명을 담았다. 고성진은 감각을 곤두세웠다.
어떤 초식이 펼쳐지더라도 곧바로 받아치리라.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고성진의 눈이 청운의 분화(分化)를 눈에 담았다. 용솟음치는 청운이 일점으로 이루어진 유천행을 부수어 내고 있었다.
고성진은 실소를 흘렸다.
“삼 년 전과는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내가 도전자가 되겠군.”
“상관없지 않습니까.”
경쟁보다는 상생을 택한 곤륜과 공동이 아니던가.
백무량의 말에 고성진은 아집을 버렸다. 백무량을 꺾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니, 검로가 더욱더 자유로웠다.
카가강!
백선신검에 수십 갈래로 이루어진 검기가 부딪친다.
어느 하나 가볍지 않으며, 단순하지 않았다. 대주천복마검의 여러 형태가 복잡하게 얽히며 파도를 일으켰다.
지저분한 쇳소리가 두 무인 사이에서 일어나고, 시뻘건 불티가 허공을 날며 휘어졌다.
화공이 허상의 그림을 그리듯. 불티로 이루어진 나비가 허공을 날았다.
수십 초가 짧은 시간 동안 교환된다. 백무량의 뺨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렇게 오십 초.
카드득!
고성진의 칼날이 완전히 닳아졌다. 공동파에서 양검을 지급하기는 하나 백선신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스르륵.
검을 수습한 고성진은 백무량에게 물었다.
“속은 시원해졌나?”
“후련합니다.”
백무량은 고성진에게 감사를 표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고성진과의 비무로 인해 구천화우검은 앞으로 더욱 깊어질 터였다.
***
“……부족해.”
남자는 영물들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사대사행에 오랫동안 터를 잡았던 놈들이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영물들이 지닌 내단을 모두 합하면 대략 일 갑자.
범부에서 내가고수가 되고도 남는 공력이었으나, 남자에게는 몹시 부족했다.
그러다 문득 청성산 봉우리에서 만난 무인을 떠올렸다.
흉흉한 마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남자가 가진 무공이라면 능히 정화하고 흡성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놈을 잡아야 할 것 같은데…….”
성가신 무공을 지니고 있긴 해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단 확신이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으니까.
시간을 두어 천천히 공략한다면 이틀 내에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비원을 이룰 수 있어.’
남자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사이, 호랑이가 사자후를 내질렀다.
크허엉-!
“도망가지 않을 테냐?”
저벅저벅.
남자의 시선은 마치 한낱 미물을 바라보는 듯 무감정했다.
“어디 한번 덤벼 봐라.”
그 한마디에 모여 있는 모든 영물이 덤벼들었다.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백련교를 위하여.”
***
이틀 뒤.
백무량은 새 도복을 챙겨 입고서 청성파로 걸어갔다.
“저놈인가?”
“보나 마나 유수행에서 떨어지겠지.”
수십 쌍의 눈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당장 덤벼들지 않는 까닭은 어디까지나 청성파가 정파라는 껍데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백무량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청해성을 도탄에 빠트렸던 청성파가 언제까지 도사인 척할 순 없었다. 한계에 다다른다면 운산보가 그랬듯이 백무량을 제거하기 위해 덤벼들지도 몰랐다.
‘쓰레기 같은 놈들.’
십우도를 미끼로 후기지수를 잡아 둘 생각이나 하다니, 백무량은 청성파가 치졸하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온갖 부정은 다 저질러 놓고 정파라는 껍데기를 부여잡으려는 꼴도 우스웠다.
청성파에 당도한 백무량은 유연걸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면 되나?”
“허! 멸문당한 문파의 제자 아니랄까 봐 예의조차 배우지 못한 모양이구나!”
“그러는 청성은 도학을 배우고도 뜻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고.”
“……!”
유연걸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장이라도 욕지거리를 쏟아 내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청성의 제자가 모두 모여 있는지라 억지로 참는 듯했다.
무엇보다 그의 입꼬리에 웃음이 잠겨있었다.
백무량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사대사행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란 확신과 비웃음.
백무량은 그것을 마주하고서 부동심을 유지했다.
‘말을 섞어 봐야 나만 탁해질 뿐이지.’
유연걸에게 시선을 돌린 백무량은 품 안에 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스윽.
사천당가의 보물인 피독주. 이것만 있으면 하독당할 걱정은 없었다.
‘송 노야가 설마 청성이 독을 쓰겠냐고, 괜한 걱정이 아니냐 말하긴 했지만.’
유연걸이 독을 쓸 거란 확신이 있었다.
“자, 삼키게.”
“…….”
백무량은 유연걸이 건넨 환약을 내려다보았다.
한 시진 동안 유효한 산공독과 독기를 중화시키는 약재가 뒤섞인 환약이었다.
‘저 안에 무언가를 더 넣었겠지.’
장로뿐만 아니라 평제자 모두가 보고 있으니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는 독은 넣지 못했을 터였다.
그렇다고 하여 위험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꽈아악.
백무량은 피독주를 꽉 쥐었다. 피독주 겉면의 가시가 피부를 파고들며 쓰라린 고통이 침습했다.
피독주의 기운이 전신에 휘도는 동안 백무량이 유연걸에게 물었다.
“사대사행에 별일은 없겠지요?”
“그럴 리가 있겠나. 허허.”
유연걸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무량의 시선이 가까운 곳에 있는 제성진인에게 향했다.
“…….”
백무량이 보낸 시선에 제성진인이 눈을 내리깔았다.
유수행의 이상을 알고 있는 그가 짙은 실망감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제성진인 옆에 있는 도사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안 되냐는 물음이었다.
백무량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장문인이나 장로라는 놈들은 부정을 감추기에 급급한데, 저들은 그렇지가 않으니.’
저 모순을 깨트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한번 망해 보면 잘못을 깨닫겠지.’
백무량이 환약을 꿀꺽 삼키자 혀가 저릿했다.
약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이 있었다. 백무량의 시야가 순간 흐릿해지고, 몸이 둔해졌다.
“…….”
백무량이 입술을 어물거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유연걸이 독을 넣었다고 말을 할 수 없게끔 처리한 듯했다.
‘비열한 놈.’
“자, 어서 가지.”
유연걸의 비웃음이 귓가를 스쳤다. 유수행에 가라앉히다가 치료를 빌미로 사로잡을 계획이 뻔히 보였다.
단지 백무량이 미리 예상했을 뿐.
“하하.”
백무량은 유연걸에게 환히 웃었다.
산공독과 신경독 모두 피독주에 해독된 것이다.
백무량의 웃음을 본 유연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이제 깨달았을 터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뭐 하고 있나, 얼른 가지 않고.”
백무량이 유연걸을 채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