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우 (4)
-천하에 알린다.
일필휘지.
강인한 서체로 쓰인 벽보가 성도의 골목마다 붙여졌다. 벽보 아래쪽에 당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천하의 시선이 당가가 공표한 벽보에 모였다.
-사천당가는 곤륜파의 친우가 되었음을, 그리고 무림맹은 곤륜에게 구파일방의 자리를 되돌려주기를 바란다.
벽보에 적힌 내용은 무림을 시끌벅적하기에 충분했다.
***
“판을 너무 키운 거 아닙니까?”
백무량은 당문천과 독대했다. 너무 큰 관심이 곤륜파에 쏠리면 득보단 독이 되리란 판단이었다.
하지만 당문천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우리 가문이 워낙 음침해야지. 이 정도가 아니면 믿어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뭐가 그리 걱정이냐?”
마인을 죽이기 위해 당가의 지하에 홀로 들어왔던 놈이 사문 얘기만 나오면 새가슴이 되고 만다.
당문천은 백무량의 태도가 변한 게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벌인 일은 아니었다.
당문천이 혀를 뱀처럼 날름거렸다.
“전에 듣기로 예전에 속가제자였던 놈들이 곤륜파에 자손을 보냈다고 들었다.”
“예.”
“당가가 이렇게 곤륜파한테 친근하게 구는데, 직접 움직이고 싶지 않겠느냐?”
백무량은 탄성을 터트렸다. 당문천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린 탓이다.
“먹어 치워라.”
당문천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백무량은 그 안에 담긴 독기를 알아차렸다.
당가 제일 고수 구환신수가 걸어온 길.
그 길이 어렴풋이 보였다. 백무량의 육감이 꿈틀거렸다.
‘문영이에게 가면을 씌운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구나.’
무림의 어느 누구도 사천당가를 무시할 수 없게끔 만든 냉혈(冷血)의 고수.
백무량은 내심 섬뜩해졌다. 만일 처음 마주했을 때 당문천이 변덕을 부렸다면 어떻게 됐을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옛 속가제자의 집안까지 먹어 치우란 겁니까?”
“그래.”
“하지만 그건 도의가 아닙니다.”
“도의? 그런 것 따위에 의미가 있느냐?”
당문천이 조소를 머금었다.
“당장 지금도 곤륜파가 부상하니 피를 빨아먹겠다고 자기 자식을 보내지 않았더냐. 그나마 양심이 있는 것이지. 자기가 직접 와서 선배라고 거들먹거리지 않았으니.”
당문천의 말에 백무량은 첫날에 찾아온 노도사를 떠올렸다.
“있었습니다.”
“죽였냐?”
“모욕을 주고 쫓아냈습니다.”
“허. 나였다면 반드시 죽였을 것이다. 그런 놈은 반드시 후환이 되기 마련이거든.”
본색을 드러낸 당문천의 말은 비정했으나 날카로운 정론을 꿰뚫었다.
“그놈들은 곤륜파가 쇠락하면 자기가 원류를 배웠다면서 곤륜파를 자칭할 놈이야. 그 꼴을 보느니 사전에 먹어 치워서, 자강(自强)하는 편이 낫지.”
“…….”
백무량은 침묵했다. 예전이라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겠지만, 송우현과 대화를 나누고 난 뒤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당문천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도의가 그리 중하냐?”
“중합니다.”
“하긴, 그러니까 자기 혼자서라도 마인을 죽여야겠다고 그랬겠지.”
그 의지는 도사로서 존경할 만하다. 어릴지언정 백무량은 당문천이 존중할 가치가 있다.
다만 적으로 만났을 때엔 어떠한가.
당문천의 시선이 날카롭게 일변했다.
“언젠가는 그 태도가 너를 관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래도, 도의 하나 때문에 그놈들을 그렇게 두겠다고?”
“노선배께서 착각하고 계신 게 있습니다.”
백무량은 과거를 생각했다. 그러니까, 칠십여 년 전. 구천검이라는 별호로 불릴 때의 일이었다.
-곤륜파는 답답하다. 도학은 고리타분하다.
이런 얘기를 무덤덤하게 하고 다닐 때.
백무량은 도의를 중요시 여기지 않았다. 영웅은 언제나 단명하기에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면 당문천의 말에 따랐겠지.’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백무량의 얼굴에 쓴웃음이 담겼다.
“도의를 하나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태산과 같습니다.”
태산은 하나로 치부할 수 없다. 태산은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의 또한 마찬가지였다.
반드시 지켜야 하기에, 유지해야 하기에.
정파는 도의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곤륜파는 백련교와의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 가치를 세속적인 것으로 재단할 수 없다. 백무량의 눈에 강한 신념이 담겼다.
그걸 본 당문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린놈이 속이 꽉 막혀서는 무슨 말이 통할 것 같지가 않구먼.”
“뭐, 그렇다고 때리는 대로 가만히 맞아 줄 생각은 없습니다. 언젠가 담판을 지어야겠지요.”
당문천이 걱정하는 점은 백무량도 알고 있었다. 이미 그것에 대해 송우현이나 현노윤과 함께 준비하던 차였다.
단지 당문천의 말처럼 억지로 먹어 치울 생각은 없을 뿐이다.
“허.”
당문천이 질렸다는 눈으로 백무량을 쳐다보았다.
“아주 뼛속부터 도사 놈이네. 대단해. 나 같은 놈이랑은 달라.”
“그건 아닙니다. 저도 예전엔 도의를 고리타분하게 여겼으니까요.”
“너한테 예전이 어디 있냐? 말을 가만 들어 보면 참, 자기 나이를 생각하지도 않고 아주 뻔뻔하게 한단 말이지.”
당문천은 피식 웃었다. 그 얼굴에 짜증은 없었다. 백무량에게 나름대로 신념을 느낀 탓이다.
무엇보다, 백무량에게는 그런 신념을 품을 자격이 있다.
“그 무공으로 신성으로 남을 테냐?”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매화비룡이나 불영신동 같은 놈들 말이다. 구파일방에서 거들먹거리는 후기지수를 꺾고 나면 곤륜파가 빨리 제자리를 찾아가지 않겠느냐?”
“……지금 저보고 가서 시비라도 걸란 말입니까?”
“그게 뭐 나쁘냐?”
당문천이 껄껄 웃었다.
“도의니 도리니 지랄 같은 소린 어디까지나 거추장스러운 사족이고, 결국 무림은 강자존이 아니더냐. 네 힘을 증명하고 나면 시선이 달라질 텐데.”
너무나도 솔직한 말에 백무량마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뭐 하러 그러겠습니까?”
“오호라. 생각해 둔 게 있다?”
당문천이 은근슬쩍 다가오자, 백무량이 몸을 피했다.
“후기지수를 괴롭혀 봐야 뭣하겠습니까.”
“……허. 요놈 봐라.”
당문천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입으로는 이미 ‘건방진 소리’라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눈에는 기대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전자는 무림이 말할 소리였고, 후자는 당문천이 품은 예감이었다.
“처음부터 머리를 치겠다?”
“머리를 치다니요. 어디까지나 곤륜파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행동만 할 겁니다.”
사천당가의 행동은 음침하고 악독하다더니, 당문천의 언행이 딱 그쪽이다.
백무량이 선을 그었음에도 당문천은 싱글벙글 웃었다.
“뒷짐 지고 헛기침하던 놈도 정수리 터럭 하나 건드리면 칼부림할 놈이 부지기수거늘. 자존심을 건드리면 결국 싸우게 되겠지.”
“…….”
백무량은 대답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당문천이 생각하는 무림은 그렇겠지만,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무림맹이 곤륜파를 위해 청룡대를 곧바로 사천에 보냈듯이, 도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정파가 무림에 남아있을 테니까.
그렇게 백무량과 당문천이 눈싸움을 하던 순간이었다.
“사형!”
현종휘가 한 손에 전서를 쥔 채 뛰어왔다.
이에 백무량은 당문천에게 시선을 떼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급하게 왔느냐?”
“그게, 그…….”
현종휘의 시선이 당문천에게 향했다.
타인이 있는 자리에서는 할 수 없는 말인 듯했다. 백무량은 당문천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러자 당문천이 짓궂게 말했다.
“꺼져라?”
“제가 어찌 선배께 꺼지란 말을 하겠습니까. 자리를 비켜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말이지요.”
백무량의 시선이 벽 쪽으로 향했다.
“저기 숨겨 놓은 사람도 치워 주시고요.”
당문천이 눈을 끔뻑였다.
뒤가 구린 짓을 하다가 들켰음에도 그게 전부였다.
“허허. 처음부터 알았느냐?”
“장로님의 호위라고 생각해 드렸습니다.”
“드렸다? 고놈, 말 한번 아프다.”
자리에서 일어난 당문천이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자 벽 속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점차 멀어졌다.
백무량은 목에 힘을 주었다.
“장난을 무례로 판단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나이를 먹으니 의심이 많아져서 말이다. 불쾌했다면 사죄하마. 필요한 게 있다면 나중에 말하고.”
그 말을 끝으로 당문천이 바깥으로 나갔다.
그제야 현종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뵈었을 때도 그렇고, 무서운 할아버지시네요.”
“당가의 사람이니까. 항상 위에 서야 한다는 마음으로 가득한 집안이지.”
지금 당장은 곤륜파의 우방으로 삼았지만, 나중엔 멀어져야 할 가문이다.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이 현종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무슨 용무였느냐?”
“그게…… 무림맹주님께서 이걸 보냈어요.”
현종휘가 꼭 쥐고 있었는지, 종이가 땀에 일부분 젖어 있었다.
서한이었다. 그것도 무림맹주가 직접 수기로 쓴.
백무량은 주변을 다시 한번 경계하고는 서한을 폈다.
-안부는 생략하지.
그걸 본 백무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통은 자기가 누군지 써 놓을 만한데.’
현 무림맹주인 검왕 남궁진이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느껴지는 대목이다.
백무량은 뒷목을 매만졌다.
벌써부터 심신이 피곤해지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잘해 주길 바라네.
설마 저것이 전부인가.
백무량은 서한을 꼼꼼히 뒤적거렸다. 하지만 인장만이 찍혀 있을 뿐, 뒷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보냈던 전서에 대한 대답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엄청 대담하게 보내지 않았던가.
청성파를 정리하면 무림에 빚을 받아야겠다고. 무림맹주라면 반드시 반응할 만한 내용이었다.
‘설마 받지 못한 건가? 아니, 그건 아닐 터인데.’
백무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검왕 남궁진.
세간에서는 그를 역대 최강의 무림맹을 만든 맹주라 추앙하지만, 백무량에게는 달랐다.
‘당문천보다 속이 검은 사람은 처음이야.’
인상을 쓴 백무량이 서한을 구겼다.
그걸 본 현종휘가 깜짝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
“지금쯤이면 약이 바짝 올랐겠지.”
남궁진이 평소 그답지 않은 미소를 머금었다.
앞으로 열심히 해라. 이것만큼 허무한 말이 어디 있겠나.
백무량이 바랄 만한 대답을 일부러 지워서 보낸 서한이었다.
의도는 아주 단순했다.
“앞으로는 선배한테 말을 하려거든 짧게 보내지 말게. 이런 식으로 골탕을 먹을지도 모르니 말이네.”
검왕 남궁진.
그는 세간의 평가에 비해서 속이 상당히 좁은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평가가 틀린 건 아니었다.
“미리 대비해 두길 잘했군.”
남궁진은 책상 위에 놓인 용모파기를 들여다보았다.
백련교주.
곤륜파의 장문인이었던 태청선 주자령을 죽이고 갑자기 사라진 절세고수.
칠십여 년이 지났을지언정 경계심을 지워선 안 된다는 생각에 조직을 만들어 둔 터였다.
그곳의 수장에 적합한 자는 내정해 두었다.
“청룡대주.”
“예!”
진자충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눈에는 남궁진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흡족한 미소를 지은 남궁진은 진자충에게 하명했다.
“청룡대는 지금 이 날, 이 시간을 기하여 임무를 변경한다.”
“……!”
“백련교를 주살하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남궁진의 말에 진자충이 두 손을 모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