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63화 (63/275)

입성 (4)

당문영에게 비밀 통로의 위치를 들은 이후.

백무량은 청룡대가 거주하고 있는 장원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군.’

입구에서 진을 치고 있는 상인들부터 시작하여 방문자를 셈하고 있는 무인들.

그들의 눈을 모두 피할 순 없다. 그렇다고 밤을 틈타 담을 넘을 수도 없었다.

‘무림맹의 청룡대라면 이야기도 들어 주지 않을 거야.’

칠십여 년 전부터 청룡대는 청죽대(靑竹隊)란 별명으로 유명했다.

어떤 유혹에도 불굴하며, 절대 강자 앞에서도 불퇴한다.

칠십여 년 전, 백련교주에게 맨 처음 죽은 천무검성 유성백과 함께한 부대가 바로 청룡대였다.

그들이 과거의 역사를 잇고 있다면 불의한 방법은 절대 용인하지 않을 터였다.

‘곤륜의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아.’

백무량은 청룡대를 내심 존중했다.

그렇기에, 그들을 만나는 데 꾀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

“비켜 주세요.”

상인들을 밀어낸 백무량은 성큼성큼 걸었다. 장원의 대문을 향해서,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당당한 기세로.

밀쳐진 상인들이 백무량에게 불만을 토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여기까지 오는 데 갖은 꾀를 써 놓고 왜 청룡대엔 쓰지 않겠다는 건지, 백무량은 자신의 변덕이 우스웠다.

‘사형이라면 인간답다고 말하겠지만…….’

정을 버리지 못한 영웅이 백련교를 막을 수 있을까?

만일 현종휘가 인질로 잡히면 어떻게 행동할까.

백무량은 지난밤에 든 오한을 씻어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 가능성을 이번 일에서 지워야만 했다.

툭.

백무량이 대문 앞에 서서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청룡장.

청룡대가 머무는 것이 일생의 자랑이라며 장원의 주인이 이름을 바꿨다고 들었다. 그만큼 청룡대의 등장은 사천 사람들에게 굉장히 특별한 일이었다.

그것을 보니, 백무량의 심사가 갑자기 뒤틀렸다.

“어째서일까?”

백무량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곤륜도 청룡대처럼 희생하였는데…….”

누군가 도왔다면 현노윤이 불행한 반생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운산보주 같은 사람도 나오지 않았겠지.

백무량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기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았다.

이유를 모두 알고, 이해하고 있었다.

멸문했으리라 생각한 곤륜파가 다시 새싹을 틔우고 있을 줄 누가 알겠는가!

하물며 청룡대는 무림맹 산하의 무인 집단이니까, 곤륜파와는 경우가 달랐다.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몸이 어려져서 그런가……?’

이립의 백무량은 제법 이지적인 척을 잘했던 것 같은데, 어려진 지금은 뜨거운 가슴이 주체가 되질 않는다.

백무량은 계획을 즉석에서 바꿨다.

‘어차피 만나야 한다면, 극적으로 가자고.’

백무량의 주먹이 청룡장의 대문을 후려갈겼다. 경첩과 같은 쇳덩이가 주르르 떨어졌다.

……쿵!

대문이 뒤로 넘어지는 소리가 거리 전체를 집어삼켰다. 갑자기 위로 솟구친 모래먼지가 백무량의 모습을 감췄다.

“뭐, 뭐야!”

“방금 누구였지?”

상인들과 무인들이 서둘러 백무량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들이 백무량의 정체를 파악하기 전에, 청룡장 안쪽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누가 감히 소란을 피우느냐!”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웅혼한 내력에 좌중이 귀를 막았다. 멀찍이 숨어서 지켜보는 청성의 제자마저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하지만 백무량은 앞으로 걸어갈 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청룡대주님에게 전하십시오.”

귓가에 속삭이듯, 백무량은 아주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곤륜도 백무량이 도착했다고.”

***

“곤륜파의 도인이 언제부터 막무가내로 변했지?”

청룡대의 대주인 창룡비검(蒼龍飛劍) 진자충(眞自忠)은 백무량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작태도 작태지만, 조금의 반성조차 보이지 않는 태도는 필설로 형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얼른 대답하지 못할까?”

“부탁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게 무엇이더냐?”

“제가 당가에 침입하는 동안 사제와 독연화 당문영의 안위를 살펴 주십시오.”

“우리가 보모인 줄 아느냐? 하물며 당가라니? 청성파의 부정이면 몰라도 당가에 대해선 듣지 못했다!”

진자충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백무량의 목소리는 평이하기만 했다.

“그러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뭐라?”

“청룡대가 움직이면 사천 전체가 그것을 알아차릴 겁니다. 좀도둑도 제 발이 저려서 성 밖으로 뛰쳐나가겠지요.”

“그것이 힘이다.”

진자충은 어린 후배를 꾸짖듯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상대를 두려움에 떨게 하며, 도망치게 하는 것이야말로 청룡대가 가진 힘인 게다.”

“그 힘이 통하지 않는 상대가 있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허, 지금 청룡대의 대주에게 무슨…….”

“백련교라면 어떻습니까?”

백무량의 말에 진자충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청룡대라면 항상 잊어선 안 될 이름이었고, 반드시 멸절해야 할 사교였다.

진자충은 그제야 무림맹의 일 군사인 제갈후가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래. 네가 공동파의 장문인께 백련교가 아직 강호에 숨어 있다고 말했다지?”

“예.”

“솔직하게 말하마. 난 네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왜입니까?”

“백련교의 난이 대체 언제 적 일이더냐? 무려 칠십 년이다. 그동안 무림맹이 손을 놓았을 것 같으냐?”

무림맹의 일급비밀이지만, 곤륜파의 후인이라면 들을 자격이 있다.

진자충은 무림맹이 칠십여 년 동안 백련교의 잔당을 일소했단 사실을 백무량에게 말했다.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백무량이 영문 모를 질문을 해 왔다.

“주백천이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그게 누구더냐?”

“…….”

백무량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진자충은 석연치 않은 감정을 느꼈지만 함부로 묻진 못했다.

‘어린놈이…….’

대체 가슴에 무슨 한을 가지고 있기에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가 싶어서, 진자충은 함부로 묻지 않고 넘어갔다.

“그러니까, 네 말은 당가에 백련교의 잔당이 숨어 있다는 것이냐?”

“예.”

“백련교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 말에 백무량이 잠시 침묵하다가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장문인의 허락 없이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장문인께서 말씀해 주셨단 말이냐?”

백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자충으로선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곤륜파의 현 장문인인 현노윤이 누구던가!

비록 무공은 익히지 않은 학도사라지만 실전된 무공인 구천화우검을 되살린 엄청난 무학자였다.

그가 당가에 백련교의 잔당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면…… 무시할 순 없었다. 반드시 확인해 봐야 했다.

진자충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알겠다. 네 사제와 당문영을 청룡대에서 보호하마.”

“감사합니다.”

“하지만 너를 당가에 보낼 순 없다.”

진자충은 엄한 눈으로 백무량을 내려다보았다.

곤륜파의 도인으로서 백무량은 어린 나이답지 않은 용기를 보였다. 대문을 부순 무례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용기와 오만은 다른 문제였다.

“이건 청룡대에서 할 일이야.”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대주님께서 움직이면 그가 알아차릴 겁니다.”

“어떤 마음인 줄 알겠으나, 허락할 수 없네.”

진자충이 기세를 끌어 올리자, 백무량 또한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상충하는 기운이 서로를 밀어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웅혼한 내력이 강하게 압박하니, 백무량의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고 땀이 주르륵 흘렀다.

“물러나게.”

진자충은 백무량에게 진심을 고했다.

“차라리 청룡대가 위험해지는 것이 낫지. 곤륜파의 도인을 죽게 둘 순 없네. 특히 후배처럼 유망한 무인이라면 말이야.”

안 그래도 백련교의 난에 의해 멸문당했던 곤륜파였다.

그로부터 칠십여 년이 흘러, 곤륜신성이라는 걸출한 후배가 운산보를 부수고 청해를 안정시켰다.

그걸 들은 진자충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드디어 곤륜이 재건되었구나!’

백련교라는 대적과 함께 싸웠기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진자충은 무림맹주의 명령을 곧바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

곤륜신성 백무량을 보고 곤륜파의 기치는 쇠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한순간의 오만으로 목숨을 버리지 말게.”

“오만이 아닙니다.”

백무량이 힘겹게 한마디를 툭 던지자, 진자충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네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나조차도 이기지 못하는데, 어찌 백련교도와 싸울 생각을 한단 말이냐?”

“저에겐 백련교와 싸워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백련교주에게 죽음을 당하고 칠십여 년 뒤에 되살아난 까닭이 무엇일까.

백무량은 그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줄곧. 어제도 토막잠밖에 이루지 못했다.

‘사형이 남긴 안배와 심상에 존재하는 검해, 마인에게 반응하는 손등의 운룡까지…….’

되살아나서 마주한 모든 것이 기연이었다. 백무량에게 천의(天意)가 존재하는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하늘이 나에게 무언가를 바랐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백무량은 생애 마지막에 떠올린 집착을 떠올렸었다.

백련교주를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의지와 자신이 곤륜파의 도사임을 뒤늦게 깨달은 후회.

그것을 이루기 위해 되살아난 것이 아닐까, 백무량은 어젯밤 결론을 내렸다.

“무로써 자격을 증명하겠습니다.”

“…….”

진자충이 말없이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은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당장 한 시진 전에 현종휘를 굴복시켰던 자신이 누군가에게 자격을 증명하게 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종휘한테 좀 더 상냥하게 말해 줄 걸 그랬어.’

진자충과의 싸움이 끝나면 미안하다고 말하리라.

백무량이 백선신검에 손을 가져갔다.

두 무인이 눈빛을 교환하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앞으로 걸어가다가 다섯 보를 남겨 두고 멈췄다.

그러고는 검을 뽑았다.

스르릉.

백선신검이 진자충의 검과 마주한다.

이른바, 교검(交劍). 비무를 하기 전에 예를 갖추는 고식(古式)이었다.

그걸 본 진자충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장문인께 배웠는가?”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후배한테 예전이면 대체 언젠지 모르겠군.”

그 대화를 끝으로 두 무인은 마주했던 검을 회수했다.

백무량은 주저하지 않고 분광검을 펼쳤다.

카가강!

검뢰벽천에서 유려하게 이어지는 일섬운월. 날카로운 검기가 십자를 그리며 진자충을 향해 펼쳐졌다.

진자충은 백무량을 은연중에 깔봤던 마음을 곧바로 지웠다. 내력은 부족하지만 검로만큼은 여느 고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검기에는 검기로.

십자의 검기에 맞서 수십 개의 검기를 토한다. 연이어 터지는 불똥 속에서 진자충의 움직임이 속도를 더해 갔다. 그야말로 비검, 칼이 허공을 나는 듯했다.

진자충의 비검을 상대로 백무량은 몸을 빙글 회전시켰다.

구천화우검의 이 초인 창천명월이 수십 개의 검기를 지웠다.

“……!”

그제야 진자충은 목도했다.

백선신검의 칼끝에서 피어오르는 태청신공의 구름을, 곤륜파의 무학에 담긴 경이로움을.

호승심이 진자충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수십 개의 검기를 뿌렸던 손목이 기이한 검로를 그렸다.

풍회뇌동(風懷雷動).

진자충의 검이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의념과 내공으로 이어진 검이 백무량을 향해 비상했다.

백무량은 그것을 보고는 백선신검을 꽉 붙잡았다. 내공이 부족하지만, 진자충을 승복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펼쳐야만 했다.

구천화우검의 사 초인 염천일원(炎天日原)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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