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거삼득 (2)
비록 나이는 어려졌으나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고…….
불의에 눈을 돌린 적이 없었다. 백무량은 그것을 자신의 자긍심으로 삼았다.
설령 상대가 곤륜파를 멸문시켰던 백련교라고 한들, 마찬가지다.
백무량의 눈빛에서 진심을 확인한 송우현이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다. 그동안 진행하고 있는 일에 차질이 없게끔 하마.”
“감사합니다, 노야.”
“지금 바로 갈 테냐?”
백무량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니, 송우현은 몇 마디를 구시렁거리며 한 남자를 불렀다.
특징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한 얼굴.
그를 알아본 백무량이 피식 웃었다.
“어디로 갔나 했더니 여기에 있었군요.”
“대협 덕분에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청해 서부에서 만났던 우상벽.
우상벽이 두 손을 모아 올리자, 백무량도 그에게 예를 갖췄다.
손가락 끝에 물든 먹물에서 그가 근래 어떻게 지내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곤륜의 총관으로 지낼 놈인데 안면은 익혀야 하지 않겠느냐?”
“총관요?”
그저 허드렛일을 시켜 달라기에 송우현에게 보냈건만.
‘노야가 저 사람에게서 가능성을 본 건가?’
백무량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우상벽을 쳐다보자 송우현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욘석아, 지금 당장은 미덥지 못해도 내가 가르치면 그만 아니겠냐. 내가 몸이 두 개도 아니고 언제까지 곤륜의 재정까지 관리하겠어?”
“제가 언제 그랬답니까.”
말을 얼버무린 백무량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뵙지요.”
“예? 예…….”
우상벽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송우현이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은 속으로 생각했다.
송우현 아래에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참 만만치 않겠다고.
그리고…….
‘곤륜에 선연(善緣)이 이리도 많으니 걱정을 덜어도 되겠구나.’
백무량은 근심을 덜어 낸 채 산하객잔에서 나왔다.
“슬슬 가을이구나.”
무더운 날이 조금씩 가라앉고 새파랗던 나뭇잎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간다.
자신이 되살아난 뒤 하나의 계절이 저물어 가니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심상의 검해와 운룡, 백선신검…… 사형이 남긴 편지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만큼 바쁜 나날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어떠한가.
“언제까지 지켜볼 생각이지?”
백무량은 낮은 목소리로 뇌까리며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그러자 나무 뒤에서 숨어 있던 흑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찌릿.
손등의 운룡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백무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시무시한 마기가 피부를 쿡쿡 찌르는 듯했다.
“어떻게 알았지?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건지, 흑의인의 목 위로 시꺼먼 마기가 연기처럼 유형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무량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운룡의 공능. 그것이 백무량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었다.
“늙은이.”
“……!”
자신의 말에 마기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백무량이 보기에 깜짝 놀란 것처럼 보였다.
“곤륜신성이라더니 숨겨 둔 한 수가 있는 모양이구나.”
“그러는 네놈은 백련교의 인면수심이렷다?”
“아해야, 내가 백련교도라면 여기서 한가롭게 이야기나 하고 있겠느냐?”
백무량과 흑의인의 살기가 서로를 난도질했다.
어디 그뿐이랴.
크그긍……!
태청신공과 흑의인의 마기가 부딪치며 허공에 실낱같은 파음을 내고 있었다. 흑의인으로선 매우 뜻밖의 일이었다.
‘뛰어난 후기지수. 딱 그 정도로 여겼거늘.’
직접 마주해 보니 그보다 높은 경지에 다다라 있다.
흑의인은 흥미로운 눈으로 백무량을 탐색했다.
“어디로 갈 생각이더냐?”
“무명소졸에게 말할 건 아무것도 없다.”
“무명소졸?”
강호에 나온 이래로 이런 식으로 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흑의인은 조소를 머금으며 얼굴을 가렸던 마기를 거뒀다.
“못생긴 얼굴 좀 계속 가리지 그랬나.”
백무량이 던진 비아냥거림에 흑의인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핏!
마기로 빚어진 한 줄기 칼날이 백무량의 옷자락을 찢고, 땅거죽을 일그러뜨렸다.
백무량은 일그러진 땅을 슬쩍 보았다가 백선신검을 쥐었다.
상대가 먼저 이빨을 보였으니 주저할 이유가 없다.
스릉……!
백선신검에서 시퍼런 검기가 일어났다.
“오호라!”
흑의인이 탄성을 터트리더니 검극에 주먹을 휘둘렀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백무량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내공을 순간적으로 발에 집중시키지 않았다면 허공으로 날아갔을 터였다.
그 모습을 본 흑의인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겨우 그 정도면서 노부를 도발했느냐?”
마음대로 지껄여라. 백무량은 속으로 흑의인에게 욕을 중얼거리며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꽈아앙!
흑의인의 쌍장과 백선신검이 충돌했다. 내공이 잔뜩 실린 백선신검이 파르르 떨렸다.
다시 밀려나려는 몸을 곧추세우고, 한 걸음. 백무량의 손아귀에서 균천관일과 호천풍연이 연거푸 펼쳐졌다.
찌르기를 막으면 검기가 뺨을 할퀴고, 옷자락을 찢는다.
“……큭!”
흑의인의 얼굴이 처음으로 낭패로 젖어 들었다.
그것은 흑의인이 펼쳤던 일수에 대한 복수이자 백무량의 반격이기도 했다.
흑의인은 그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그의 얼굴에 불쾌함이 자리 잡았다가,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웃어?”
인상을 찌푸린 백무량은 흑의인에게 곧바로 파고들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든 간에 치명적인 틈을 보인 셈이니까.
쩌억!
백무량의 일 장이 흑의인의 가슴팍을 때렸다.
“큽!”
마기를 꿰뚫고 파고든 장력에 흑의인은 입안에서 피 맛을 느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만한 상처는 치유하면 그만이고,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새끼에 불과한 줄 알았더니 이미 범이었구나.’
흑의인은 뒤로 물러나며 마기를 폭사했다. 풍마광란의 일 초가 주변을 휩쓸자 백무량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백무량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몸이 조금만 더 컸다면, 내공의 여유가 있었다면.
마기의 광풍을 뚫고 흑의인의 명문에 백선신검을 내지를 수 있었을 터였다.
그렇게 아쉬움을 털어 낸 백무량이 다음 초식을 펼치려던 그때…….
“네 실력은 잘 알았다. 과연 운산보주를 꺾을 만하구나!”
“…….”
백무량은 흑의인의 말을 무시하고 우장(右掌)을 휘둘렀다.
현천신장의 일초, 천회망룡. 백무량의 장력이 흑의인에게 쇄도했다.
그것을 본 흑의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검법이 아니라 장법. 그것도 공동파의 무공인 현천신장을 백무량이 펼칠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검법과 비교해 조예가 한참이나 부족하다.
파앙!
천회망룡을 한 손으로 흩어 낸 흑의인은 백무량에게 선언하듯이 외쳤다.
“노부의 이름은 흑마(黑魔)다!”
백무량은 또다시 흑마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있어 마인은 백련교든 아니든 죽여야 할 적이었으니까.
그가 누구인진 죽이고 나서 알아도 상관없다.
백무량이 다시금 백선신검을 쥔 채 다가오자 흑마가 작은 목소리로 욕을 중얼거렸다.
“이런 미친……! 너한테 알려 줄 게 있단 말이다!”
백무량에게 당가 지하에 요안의 남자가 있다는 걸 알려 주면 청룡대가 당가로 들이닥칠 테니, 손 하나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그 판단이 조금씩 어그러지는 것을 흑마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내가 뭐라고 하든 듣지도 않겠단 거냐!”
“뭐라는 거냐.”
백무량은 흑마에게 눈을 부라리며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곤륜의 도사가 마인의 말을 잠자코 들어 주리라 생각했느냐?”
“말하는 게 꼭……!”
애가 아니라 이립은 된 도사처럼 보일 지경.
흑마는 혀를 강하게 차고는 뒤로 물러났다.
여기서 백무량을 제압하거나 죽였다가는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지는 셈이었다.
“청룡대와 함께 당가 지하에 가 보거라!”
그 말을 남긴 흑마가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나자, 백무량은 맥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 대놓고 말하는군.”
하기야 자신이 그럴 틈을 주진 않긴 했지만, 의도가 너무 뻔하게 보였다.
‘정말 나한테 알려 주려고 찾아온 걸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한들 마인의 정보를 덮어놓고 신뢰하는 천치는 아니었다.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회수하고는 사천으로 향하는 길을 노려보았다.
“다시 확실하게 알아보는 수밖에.”
흑마가 들었다면 분통을 터트렸을 말이었다.
***
“백 소협이 당가로 출발했다고요?”
잠시 쉬고 있는 사이에 내려가다니.
당문영은 백무량의 발 빠른 행동력에 감탄하면서도, 그에게 닥칠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본 현종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안 됐나요?”
“당연히 안 되죠! 당가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듣고는 갔어야죠!”
당문영이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자 현종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태껏 숙녀처럼 행동했던 그녀가 저렇게 초조해하다니.
평정심을 유지하던 현종휘도 슬슬 백무량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데요?”
“제가 왜 여길 혼자서 왔겠어요.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랬겠죠.”
“청룡대와 함께 간다는데, 그것도 위험한가요?”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죠.”
당문영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백 소협은 지금 독니를 가진 뱀한테 걸어가는 거라고요…….”
아주 긴 시간 동안 사천의 권세가로 지내온 당가.
그들이라면 백무량이 사천에 발을 들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단지 그뿐이면 다행일 텐데.
지금쯤이면 자신이 곤륜에 왔다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한 장로님께 전서구를 보내 봐야 당가 근처에서 잡힐 게 분명해. 청룡대에 보내도 마찬가지일 거야.’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계산을 마친 당문영은 현종휘를 돌아봤다.
“현 소협.”
“예?”
“같이 가요, 사천으로. 가서 백 소협을 도와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당문영의 표정이 몹시 진지했다.
그녀를 본 현종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산 아래로 내려간 경험이라곤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고, 누군가와 싸워 본 적은 아예 없었다.
백무량이 곤륜 지부와 싸울 때도 그저 도망쳤을 뿐이니까.
하물며 그때는 열병에 걸려서 골골대지 않았던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단 사실이 현종휘의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저는…….”
결정을 내리는 한마디를 하는 것조차 현종휘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할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손자인걸요. 이번에 입문한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해야 하고요.”
“…….”
그 말에 당문영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하지만 현종휘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라도 혼자 가야 해.’
그렇게 마음을 정한 당문영은 현종휘를 스쳐 지나갔다.
말없이 곤륜파를 떠나면 현노윤에게 엄청난 무례를 저지르는 꼴이겠지만, 이대로 두면 백무량이 죽는 것뿐만 아니라 당가가 요안의 남자에게 멸문당할 처지였다.
턱.
당문영의 어깨에 둔탁한 힘이 실렸다. 당문영이 고개를 돌리니, 현종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에 물기가 번져 있었다.
“그래도 한 번쯤 사형을 돕고 싶었어요.”
현종휘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당문영은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가 엄청난 각오를 다지고 있다는 것을…….
“가요, 지금 바로.”
현종휘는 허리에 멘 검을 매만지며 의지를 고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