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53화 (53/275)

불청객 (4)

‘당가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라…….’

백무량은 그 말을 곱씹으며 당문영과 눈을 마주했다.

초승달과 같은 눈초리.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다는 듯 집요했다.

“청룡대에 대해서 나 대신 장문인께 여쭤보면 안 될까?”

당문영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백무량은 그것에 속지 않았다.

집요한 시선과 굳은 표정. 그녀에겐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그걸 알아차린 백무량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건 힘들 것 같은데.”

“왜?”

“아까 네가 말했잖아. 갑자기 찾아온 것도 무례인데 장문인과 독대할 순 없다고 말이야. 그럼 내 입을 빌려서 장문인께 여쭤보는 것도 무례 아닐까?”

“그래도…….”

당문영이 재차 부탁하려는 차에 백무량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나이는 어려도 곤륜파의 대사형이야. 그러니까 떼쓰지 말고, 나를 제대로 설득해 봐.”

“……떼라니, 말이 심하네.”

입술을 삐쭉거린 당문영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백무량은 그 손길에서 그녀가 토라졌음을 직감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가의 위세가 높다 한들 아이의 투정까지 받아 줄 이유는 없어.’

그렇게 백무량이 침묵을 지키니, 탁자를 두드리던 손길도 멈췄다.

당문영은 뒤늦게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에겐 어떤 짓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고.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한숨을 내쉰 당문영이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던 진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게,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타난 게 칠 년 전이었대.”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는 듯한 어조.

백무량은 당문영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확실한 정보와 모호한 정보를 구분했다.

칠 년 전, 신기한 독물을 팔러 온 남자가 있었다.

그는 남다른 능력으로 사천당가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식객으로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칠보사(七步蛇)를 시선만으로 제압했다던가 하는 기이한 소문마저 돌 정도였다.

그렇게 남자가 사천당가와 더욱 깊은 연을 맺어 가던 중.

“당가의 지하로 거취를 옮기고 싶습니다.”

늘 겸손하던 남자가 갑자기 과한 요구를 청했다.

사천당가의 지하가 어디던가!

새로운 독을 만들고, 독사의 품종을 개량하는 비처. 그곳을 외인에게 개방한다는 것은 무공 비급을 보여 주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가주는 이미 남자의 능력에 매료되어 있었다.

“하면 우리 가문과 결혼의 연을 맺으시오.”

“기꺼이 그리하지요.”

남자는 평소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여식을 배필로 맞이했다.

이에 몇몇 장로는 우려를 표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지하에 사는 것 외에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사천당가의 독물 연구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삼 년째.

남자가 한밤중에 가주와 독대했다.

“제 친구와 가끔씩 지하에서 만나도 되겠습니까?”

“뭐?”

남자의 두 번째 요구에 가주는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가족도 아니고 친구를 지하에서 만나다니!

어불성설이라 판단을 내린 가주에게 남자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

“…….”

그날 이후.

남자의 두 번째 요구를 받아들인 가주는 큰 변화를 겪었다.

가장 먼저 찾아온 사건은 불운이었다.

“크으윽!”

남자에 대해 우려를 표했던 장로가 피눈물을 흘리고 가슴팍을 움켜쥐다가 죽었다. 하독된 흔적이 없었기에 무척 기이한 일이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할 새도 없이, 크게 기뻐할 일이 생겨났다.

청성파 장문인의 죽음.

비교적 젊은 편이었던 연선하가 급사하면서 청성파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줄어든 것이다.

“다음 부탁은 사 년 뒤에 드리겠소.”

남자의 달라진 말투에 가주는 섬뜩한 예감을 느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고…….

뒤이어 사 년 뒤.

남자가 예고한 날짜가 다가오던 그때, 청룡대가 사천에 찾아온 것이다.

여기까지가 당문영이 말한 자초지종인데…….

‘모르는 척 지나가 주긴 힘들겠어.’

백무량은 그녀가 끝끝내 감춘 비밀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장본인에게 따질 천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당문영한테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장문인께 말씀드릴게.”

“정말요?”

“그래. 그러니까 편하게 쉬고 있어.”

백무량은 당문영에게 처소의 위치를 알려 주고는 현노윤과 송우현을 불렀다.

***

백무량은 송우현의 얼굴이 보이기가 무섭게 물었다.

“사천당가의 후계 구도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당연히 알지.”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흘, 이번에 찾아온 손님이 사천당가였나 보구나.”

송우현은 자기가 아는 바를 간단히 정리했다.

“남자 셋, 여자 하나. 남자는 모두 덜떨어졌는데 느지막이 얻은 여식의 재능이 출중하다고 해. 신기한 일이지.”

“사천당가에서 그런 소문이 났다는 말입니까?”

“허, 넌 무슨 애가 모르는 것이 없냐?”

나이가 겨우 열셋인 꼬마 놈이 자기가 말하기도 전에 정답을 맞히니, 송우현으로선 신기할 따름이었다.

“네 말이 맞다. 사천당가처럼 음침하게 독이나 만지작거리는 놈들은 자식 자랑을 할 필요가 없거든.”

“무지가 곧 무기니까요.”

백무량의 말에 송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가주가 되거나 혹은 후계 구도에 밀리거나, 그런 식으로 당가 내부에서 정리가 되어야 강호에 공개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당문영은 어린 나이부터 재녀로서 이름을 떨쳤다.

이는즉…….

“부족한 나이와 정통성을 명망으로 대신하려 했다는 말이군요.”

상황을 뒤늦게 이해한 현노윤의 말에 송우현이 부차적인 설명을 더했다.

“다른 세가면 몰라도 사천당가에선 어림도 없긴 했지만, 나름 신선한 시도로 보였지요.”

“으음…….”

현노윤이 침음을 흘리는 동안 백무량은 턱을 매만졌다.

송우현의 말에 안개는 대부분 걷혔다. 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면 나보다 더 넓게 보는 사람한테 물어야겠지.’

백무량의 시선이 송우현에게 향했다.

“송 노야가 말한 여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누구랑?”

“혼자 찾아왔다고 합니다. 청룡대가 곤륜 때문에 온 것인지 묻더군요. 그리고…….”

백무량은 당문영이 했던 이야기를 조금도 요약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처음에는 서론이 길다고 투정을 부렸던 송우현이었지만 중간부터 묘한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필시 자신과 같은 위화감을 품은 것이리라.

그렇게 백무량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송우현이 뜻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소문이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그게 무슨 소립니까?”

“너라면 그 아이의 이야기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을 거다. 그렇지?”

“예. 겨우 열한 살 아이가 그렇게 소상히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백무량은 자신이 품었던 위화감을 말하자, 송우현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모르는 척하지도 않는구나, 재수 없는 녀석.”

그 말에 옆에 있던 현노윤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송우현을 꾸짖지는 않았다.

그 나름대로 극찬을 한 셈이니까. 단지 표현의 방식이 거칠 뿐이었다.

송우현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무량아. 네 말대로 당문영은 전부터 사천당가 내부에서 도움을 받아 명망을 떨친 재녀다. 이유야 뭐, 설명하면 입이 아프니까 넘어가마.”

“후계 구도에서 경쟁하기 위해서지요.”

“장문인이 아니라 왜 굳이 너한테 물었겠느냐?”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백무량은 당문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의 행동은 어딘가 어른스러웠지만, 당황했을 땐 현종휘와 다를 바 없는 아이였다.

‘다만 흉중에 품은 야망은 비교도 안 되지…….’

그저 할아버지와 함께 편안히 살아가길 원했던 현종휘와는 다르게, 당문영은 자기가 가진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홀로 곤륜산을 찾아왔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백무량의 궁금증을 해결하는 건 역시 송우현이었다.

“네가 어떻게 대답하든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예?”

“애초에 그 아이의 목적은 청룡대가 온 이유가 궁금해서가 아니야. 아예 다르지.”

송우현의 단언에 현노윤이 인상을 구겼다.

“청룡대를 움직이게 만들 생각이었단 겁니까?”

“장문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백무량 혼자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자, 송우현이 혀를 찼다.

“그 어린것이 왜 사천당가의 전령을 자처해서 혼자 왔겠느냐? 아무리 곤륜이 망했다고는 하나 구파일방의 일원이었고, 공동파가 비호하고 있는데 말이다.”

“……!”

백무량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확실히, 사천당가가 곤륜파보다 강성한 가문이라고는 하나 당금의 상황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백무량의 모습을 본 송우현이 히죽 웃으며 하려던 말을 이었다.

“한때 청룡대가 청해를 향하고 있단 소문도 돌았지. 사천당가라면 그 소문에 대해서 조사를 끝냈을 거다. 적어도 처음 목적지는 청해였단 건 알아냈을 게고.”

“……적어도 청룡대가 곤륜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겠군요.”

“그래. 최근에 네가 우격다짐으로 운산보를 멸문시킨 일도 있었고 말이지.”

백무량의 머릿속에 있던 안개가 걷히는 순간이었다.

“사천당가는 어린아이를 이용해 골칫거리를 없애려고 했단 겁니까?”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분노를 토하는데, 송우현의 표정이 묘했다.

“글쎄. 그것까진 잘 모르겠구나.”

“예?”

“그 아이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사천당가의 상황이 생각보다 급박할지도 몰라.”

“그게 무슨…….”

“그렇게 독 좋아하고, 음험한 놈들이 이렇게까지 속이 뻔히 보이는 계책을 꾸몄을까? 당장 너만 해도 당가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소상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

그 말을 들은 백무량의 뇌리에 한줄기 뇌전이 내리쳤다.

이제는 안개 너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거였구나.’

백무량의 표정을 본 송우현이 빙긋 웃었다.

“시야가 넓어진 기분이 어떠냐?”

“상쾌합니다.”

“이번에도 너 혼자 하지 말고, 꼭 장문인과 함께하거라.”

송우현은 그 말을 끝으로 삭신이 쑤신다며 바깥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현노윤이 백무량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조님?”

“지금의 곤륜으로선 빙산의 일각도 감당하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백무량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사천당가가 휘청거리는 상황이 쉽게 나오는 것도 아니지.”

“들으면서 생각했는데, 이야기에 나온 남자도 조금 수상합니다.”

“백련교일 확률이 높아.”

그 말에 현노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떻게 그걸 확신하십니까?”

“사형이 준 선물이 있거든.”

백무량의 손등에서 운룡이 자그마한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빛이기에 백무량은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현노윤이 먼저 말하기 전까지는…….

“알겠습니다.”

백무량은 현노윤의 눈빛에서 사조에게 보내는 무한한 신뢰를 읽었다.

그것을 보니 무언가 마음이 울컥거렸다.

“이걸 사형이 봤어야 했는데, 내가 이렇게 사손한테 신뢰받고 있다는 걸…….”

“허허.”

주백천이라고 했던가.

현노윤은 그의 내력(來歷)을 모르기에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이 아쉬움을 토로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멀쩡히 있던 봉분과 묘비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사람의 기억이 사라지는 신비가 일어날 수도 있겠지. 송 노야도 그랬고 말이야.’

해답을 찾으려면 다섯 점의 그림을 찾아야 할 텐데, 지금은 곤륜파를 정비하는 데 총력을 다해야만 했다.

‘그리고 사형이 내준 기연도 소화해야 해.’

백무량은 손등의 운룡과 허리에 묶은 백선신검을 훑어보았다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시.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시각.

멀리서 걸어온 당문영을 다시 불러내기는 그랬지만, 사건이 워낙 중대하다.

“나를 은근슬쩍 속이려고 했으니 이번엔 내가 골려 줄 차례야.”

백무량은 짓궂은 미소를 빼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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