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4)
소식을 접한 송우현이 운산보와 결탁한 상인을 축출하기 위해 전서구를 날린 사이.
“어떻습니까?”
백무량은 서녕에 남아 고성진의 용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앞으로 반년은 정양해야겠지만 뭐, 도사는 괜찮아.”
주겸이 땀을 닦아 냈다.
그의 얼굴에 짜증과 피로가 얼룩져 있었다.
“개새끼들. 혼자 도망치지 자기 몸 귀하다고 약재까지 싹 쓸어 갈 줄이야.”
주겸의 욕지거리에 의원이 땀을 뻘뻘 흘렸다.
서녕에 살다 보면 운산보에게 소소한 도움을 받기 마련이고, 이는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어…….”
“아가리 꽉 다물고 있으쇼. 저기 있는 도사랑 다르게 난 근본 없는 거지새끼라 사람 때리는 거야 간단하거든.”
주겸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꾸짖자, 의원이 조용히 물러났다.
백무량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도망친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랄, 우리가 여기 있으니까 설설 기지. 딴 데선 운산보 있을 때가 좋았는데……라고 말할 놈이야.”
주겸은 의원이 떠난 자리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침상 위에 숨이 고르게 변한 고성진과 시신이 된 노태랑이 누워 있었다.
“선배가 의술을 알아서 다행입니다.”
“의술은 무슨. 거지가 다치면 봐 줄 사람이 없으니까 어깨너머로 조금씩 배운 거지.”
“조금 배운 것치고는 꽤 정확하게 보이는데요.”
실제로, 백무량이 보기에 주겸은 의술을 펼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처음 고성진을 봤을 때 쇠사슬을 풀고 지혈부터 시작한 것 자체가 일반적인 무림인보단 의원의 행동에 가까웠다.
백무량이 그것을 정확히 지적하자, 주겸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건데, 이해해 줄 거지?”
“……예.”
굳이 억지로 물어볼 정도는 아니다 싶어, 백무량은 대화를 정리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침묵에 젖은 그때였다.
드륵, 투두두둥……!
사두마차가 맹진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비교적 먼 거리에서 단숨에 이곳으로 달려오는 듯했다.
백무량은 자연스럽게 백선신검을 매만졌다.
운해처럼 유형화한 태청신공의 공력이 손목을 감쌌다.
노태랑과의 싸움으로 깨달은 것 중 하나였다.
“저, 적인가?”
주겸이 침을 꿀꺽 삼키던 순간, 사두마차의 굉음이 멈췄다.
뒤이어 문이 열리며 경첩이 비명을 질렀다.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한 백무량이 앞으로 성큼 걸었다.
“장문인?”
“…….”
마차로 이동하며 쌓인 여독에 현노윤의 혈색이 초췌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노태랑이 누운 자리로 뛰어갔다.
얼굴을 가린 천을 벗긴 순간 현노윤이 입술을 달싹였다.
“……담정아.”
노태랑의 옛 이름을 말하는 현노윤은 갈라진 틈 사이로 물이 새는 바위와 같았다.
금방이라도 쩍쩍 갈라질 것처럼 현노윤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
그러나 노태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죽은 사람이 소리를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허.”
긴장이 갑자기 풀린 탓일까.
백무량은 허물어지려는 현노윤의 상반신을 꽉 붙들었다.
“지금의 그는 노태랑이고, 운산보주일 뿐입니다.”
“추태를 보여 미안하구나.”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끄럽고…… 현노윤은 황망한 음색으로 부정적인 단어를 줄줄이 쏟아 냈다.
백무량으로선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가 저렇게까지 약한 모습을 보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담정, 아니, 노태랑이 현노윤의 역린이었던 걸까.’
백무량은 현노윤의 어깨를 주무르며 그를 진정시켰다.
그러는 동안 주겸을 흘깃 곁눈질했다.
[다른 곳에서 곤륜의 장문인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전음이 끝나기도 전에 주겸이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만일 그가 전음을 할 수 있었다면 아가리를 곱게 놀리겠다는 다짐이라도 했을 터였다.
주겸에게 시선을 뗀 백무량은 미리 준비한 봇짐을 현노윤에게 건넸다.
“이게…….”
평소처럼 백무량에게 존댓말을 하려던 현노윤이 주겸을 발견하곤 말을 고쳤다.
“무엇이더냐?”
“운산보주가 남긴 기록입니다. 일기라고 해도 되겠지요.”
“…….”
현노윤이 떨리는 손으로 봇짐을 받아 들었다.
감정이 그답지 않게 마구잡이로 흐트러져선,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끝내 흘리지는 않았다.
도리어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비망록을 펼쳤다.
“……음.”
현노윤이 차가운 눈으로 비망록을 훑어보았다.
혹자에겐 무성의한 독서처럼 보일 테지만, 백무량에겐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를 중심으로 퍼지는 파문에서 진한 슬픔이 느껴졌다.
냉정하게 보지 않고서야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을 터였다.
턱.
첫 비망록을 덮은 현노윤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랬구나.”
네 음절의 짧은 단어.
그 속에서 백무량은 현노윤의 고뇌와 한탄을 읽어냈다.
“장문인이 그러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힘을 위해서 움직였을 겁니다.”
“담정을 제자로 거둘 때만 해도, 나는 구천화우검의 비급만 있으면 곤륜파가 부흥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현노윤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자,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땐 내가 너무 젊었어. 혈기가 있었고, 욕심도 있었다. 그걸 보고 자란 제자가 힘을 원하고 명성에 목이 마르는 거야 당연했겠지.”
현노윤은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그동안 나는 곤륜파가 몰락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었고 말이야.”
“……장문인.”
백무량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변하자, 현노윤이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칭얼거리는 것도 이제 그만하마.”
“앞으로 벌어지지만 않으면 됩니다. 장문인의 잘못도 아니고요.”
“그렇게 말해 주어서 고맙구나.”
대화를 마친 현노윤은 노태랑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백무량과 주겸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는가?”
“예? 한창 흥미로워지던…….”
주겸이 툴툴거리기가 무섭게, 백무량은 그를 붙잡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일각이 지나고 난 뒤, 방으로 돌아왔을 땐…….
“…….”
현노윤이 노태랑의 죽음 앞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송우현을 중심으로 백무량의 명성이 계속해서 무림을 떠돌았다.
전에는 일개 지부를 부순 맹랑한 소년이었다면, 이번에는 무게가 달랐다.
단신으로 일문을 파(破)한다.
그것은 무인의 피를 들끓게 하는 이야깃거리로 충분했고, 소문의 삼분지 일이라도 사실이라면 백무량의 경지가 후기지수를 아득히 초월했다는 뜻이었다.
특히 사천을 중심으로 한 강서 무림의 객잔에서 뜨겁게 들끓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제 십 대라며? 약관도 되지 않은 놈이 어떻게 그런 짓을…….”
“그러게. 아무래도 뭐, 주변에 있는 도문이 도와줬겠지.”
무인 대부분이 그 소식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는 했다.
백무량이 달마대사나 검선 여동빈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 나이에 한 문파를 멸문시킨단 말인가.
게다가…….
“검강이 무슨 개 이름이야?”
백무량이 검강으로 운산보주를 물리쳤다는 소문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누군가는 평생 수련해서도 이룩하지 못하는 게 성강의 경지였다.
그런데…… 그 경지를 십 대의 소년이 이뤘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차라리 단신으로 운산보를 멸문시켰다는 게 그럴듯했다.
설령 그 소문이 진짜라고 한들.
“검기랑 강기 구분도 못 하는 호사가 새끼들이겠지.”
“아가리로는 무슨 절대 고수 된 사람들?”
“뭐, 검기를 이루었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뛰어난 기재긴 하지.”
그걸 본 사람이 무공을 모르는 병신일 거라고 여겼다.
“그래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한 무인의 물음에 객잔이 고요해졌다.
무림인은 강호에 흐르는 소문을 절대 좌시하지 않았다.
설령 과장이 들어갔다고 해도 백무량이 이룬 업적은 동 나이대의 어느 사람과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심지어 소림의 불영신동(佛瑩神童)이나 화산의 매화비룡(梅花飛龍)과 비교하는 이도 많았다.
그들이 약관에 가깝거나 넘었음을 생각하면 백무량의 명성이 전보다 훨씬 높아졌다는 걸 방증하는 셈이다.
곤륜신성 백무량이 이룬 업적은 그만큼 대단했다.
그렇게 강서 무림에서 시작된 소식은 들불처럼 옮겨붙어, 무림맹이 있는 호남성으로 향했다.
***
천장에 금으로 장식된 칠성(七星)과 고풍스러운 가구가 값비싼 허영과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 지역의 유명한 수다쟁이일지라도 입을 꾹 다물 듯한 방이었다.
그 방의 주인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남자였다.
“자존심이 상하는군.”
검왕(劍王) 남궁진(南宮眞).
다른 칭호로는 무림맹주.
정파 무림의 대표로서, 청해에 오랜 시간 동안 사파가 주인 노릇을 했다는 게 용납이 되질 않았다.
“일 군사.”
“예.”
남궁진의 말에 무림맹의 일 군사, 제갈후가 착잡한 안색을 드러냈다.
“지금 당장 청룡대를 청해에 보내겠습니다.”
“음.”
“그리고 무림맹의 눈을 가린 놈들이 누군지 당장 발본색원하겠습니다.”
그 말에 남궁진이 즉답했다.
“찾을 필요는 없다.”
“이미 알아내신 겁니까?”
“예전부터 사귄 지우(知友)가 증거를 찾았다고 하더군.”
“확실합니까?”
제갈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평소 과묵한 성정만큼이나, 남궁진은 지우의 말이라면 뭐든지 믿어 왔기에 자신이 걸고넘어질 필요가 있었다.
좋게 말하면 의리가 있는 남자고, 나쁘게 말하면 쉽게 이용당할 수 있는 셈이다.
“만금상단에 수기로 적어서 보내겠다는군.”
그 단점을 남궁진 또한 알고 있었다.
다만 쉽게 고치지 못할 뿐.
제갈후는 남궁진의 말을 곱씹고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원본은 보여 주지 않겠단 겁니까?”
“그래.”
“……무림맹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이십 년 가까이 무림과 단절되었으니 그럴 만하지.”
남궁진은 묵직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다시 생각해도, 내 대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군.”
“어쩌실 생각입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선례를 남기는 게 어떻겠나?”
“뿌리까지 파헤치실 생각입니까?”
제갈후의 물음에 남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몰락했다지만 구파일방이었던 곤륜을, 그것도 약해진 틈을 타 공격했단 점이 너무 꼴사납지 않나.”
남궁진은 들끓은 불쾌함을 털어 내듯 지껄였다.
“당대의 무림맹주로서, 그런 문파가 강호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지워야 속이 풀리겠어.”
“구파일방 중 하나가 그랬다면 어떡하실 겁니까?”
“…….”
남궁진은 순간 침묵했다.
제갈후가 꼬집은 부분은 무림맹주 이전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알력싸움을 의미했다.
그가 꺼낸 답은 그의 평소 성정처럼 우묵한 것이었다.
“오욕으로 추해지기 전에 친히 문을 닫아 주는 것도 무림맹주로서의 직무겠지.”
“과연.”
제갈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