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3)
“내게, 내게 ……가 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노태랑이 피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귀를 가져다 대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주겸이 인상을 찌푸렸다.
“함부로 다가가지 마라. 곧 뒈질 놈이라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제발…….”
노태랑의 목소리가 간절함으로 떨렸다. 백무량을 향해 뻗었던 손에 힘이 풀릴수록 간절함은 처절하게 변했다.
주겸의 인상이 더더욱 더럽게 변했다.
“뒈질 거면 곱게 죽지. 발악은!”
“부, 부탁이…….”
“…….”
백무량은 죽어 가는 노태랑을 앞에 두고 턱을 매만졌다.
사실, 그가 조금 이상하다고 여겼었다.
모든 무공이 막히고 치명상을 입었으면 정파의 무인일지라도 도주를 택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노태랑은 도주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과 맞섰다.
‘거기에 이유가 있다면…….’
마음을 굳힌 백무량은 쪼그려 앉아 노태랑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러자 노태랑의 표정이 편안하게 변했다.
“고맙, 고마…….”
“빨리.”
백무량의 고압적인 어조에 노태랑이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저거 봐라. 뭐가 있다니까?”
주겸이 보기에는 불쾌하게 느껴진 모양이었지만, 백무량은 아니었다.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미소.
노태랑이 한쪽 입술만 비튼 건 체력적 한계였을 터였다.
“내, 내 집무실 밑바닥 아래에…… 모아 둔…….”
노태랑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고개를 홱 떨어뜨렸다.
백무량이 그의 턱을 재빨리 붙잡았으나, 눈동자의 생기가 모두 날아가 있었다. 혼백이 빠져나간 것이다.
주겸은 노태랑의 죽음을 날카롭게 촌평했다.
“죽으려면 깔끔하게 악인으로 죽을 것이지, 마지막에 대협처럼 군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찝찝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언가 큰 의도가 있었단 건지.
지금 당장 확인하지 않으면 마음이 복잡해서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백무량은 아직 먼지가 부옇게 올라오고 있는 운산보 내부로 향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야, 어딜 가! 너도 다쳤다니까!”
백무량이 대꾸도 하지 않고 걸어가자, 주겸이 혀를 강하게 찼다.
“저, 저, 저놈 저거. 나도 물어볼 게 많은데…….”
상황이 급박하고 백무량을 존중하여 묻지 않았지만, 그가 보인 건 틀림없이 검강이었다.
검강이 무엇이던가!
성강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만이 쓸 수 있는 특별한 무기였다.
하물며 검강이 휘둘러진 검로는 어떠하던가?
곤륜파에 저런 무공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고절했고, 대단히 뛰어났다. 천 년 소림의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운산보주가 펼쳤던 건 분명히 곤륜의.”
입술을 어물거리던 주겸이 눈을 깜빡였다.
저도 모르게 백무량이 펼쳤던 검강을 떠올려 버렸다.
“이건 잊어도 되는 정보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주겸은 고성진을 서둘러 지혈했다.
***
“당장 꺼져라.”
백무량은 무정한 목소리로 운산보에 남아 있는 사람을 모두 쫓아냈다. 대부분 시시껄렁한 파락호로, 소란을 틈타 물건을 훔치려는 좀도둑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놈들에게는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다.
“허, 허억!”
살기를 드러내는 순간,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기 마련이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본 백무량은 복도를 따라 걸었다.
다행히도 노태랑의 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뭐가 이렇게 화려해.’
황실에서 보면 곧바로 불호령을 내릴 만큼, 노태랑의 방은 문부터 황금색 용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그 내부는 보나 마나 뻔했다.
백무량은 문을 걷어차고는 천근추의 묘리를 이용해 밑바닥을 파헤쳤다.
콰직!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몇 권의 서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표지에 간결한 서체로 적혀 있었다.
비망록(備忘錄). 담정 저.
‘노태랑이 아니라 담정이라는 사람이 쓴 건가?’
혹시 함정이 아닐까 하는 위기감이 고개를 들긴 했지만, 여기까지 와 놓고 안 보기도 뭐했다.
백무량은 나뭇조각을 탁 털어 내고는 비망록을 폈다.
“……!”
그곳에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청성파가 운산보에게 착복한 돈을 어떻게 소비하여 사문으로 끌고 갔는지.
돈의 흐름에 대해 조목조목 쓰여 있는 걸 보면 처음부터 작정하고 준비한 듯했다.
백무량은 황급히 서책 모두를 꺼냈다. 맨 밑바닥에는 가장 오래되어 누렇게 변한 게 있었다.
‘이십일 년 전?’
운산보가 생겨나기도 전의 기록이라면 담정이 누군지 적혀 있을 터였다.
사락.
첫 장을 보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고사성어가 있었다.
유월비상(六月飛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오뉴월의 더운 날씨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었다.
‘이게 무슨……?’
백무량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노태랑이라면 애꿎은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 놈이지 자기가 억울할 위인은 아니었다.
사락, 사라락.
책장을 하나둘씩 넘길수록 백무량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그것은 타락의 기록이었고, 절망으로 얼룩진 회고였다.
“…….”
백무량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구파일방의 위명을 빌려 양민을 핍박하는 속가 제자가 있는가 하면, 대놓고 곤륜파를 깔보는 사파 무인에게 패하기도 했다.
담정의 강호행은 어둡고 축축했다. 발을 내디디면 늪에 빠질 듯 위태로웠다.
비망록을 들여다보는 백무량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칠십여 년 전의 구천검 또한 담정과 비슷한 경험이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곤륜파가 가장 강성할 시기였다. 장문인 주자령이 강호 십 대 고수로서 존재할 때기도 했다.
담정은 그렇지 못했다.
그것이 가장 큰 차이였고, 타락하게 된 계기였다.
“그래도…….”
왜 애꿎은 청해인을 괴롭힌단 말인가.
백무량이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넘기던 그때, 피로 적힌 단락이 눈에 뜨였다.
-청성은 나로써 멸하리라.
백무량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담정이 꾹꾹 눌러쓴 필체에 어두운 집념이 느껴졌다.
다음 장부터 청성과 접촉하게 된 경로와 결탁한 주동자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언제든 청성파를 몰락시킬 수 있도록 증거를 수집한 흔적이 꽤 세세했다.
-밤새, 곤륜의 무공을 수련했다.
중간중간에 곤륜에 대한 비틀린 애정이 적혀 있기도 했다.
방법은 틀렸을지언정 곤륜의 마지막 전인으로서 살아남겠다는 문장과 현노윤을 원망하는 듯한 말이 휘갈겨 있었다.
‘담정은 어찌하여 노태랑이 되었나?’
백무량은 그 과정을 담담히 읽어 내려갔다.
이해는 되었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의 선택은 자신을 스스로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사문의 명예를 짓밟는 행동이었다.
그저…… 이해했다.
‘장문인의 성격상 제자가 청성파에 횡액을 입을까 싶어서 파문시켰을 텐데 말이야.’
그가 운산보주로서 청해에 군림한 지 이십 년 정도였으니 직접 마주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오해는 풀지 못했을 것이다.
비망록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노태랑으로 화한 담정은 현노윤의 마음과 곤륜파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자기를 내친 장문인과 청성의 부덕함에 진저리 치고 증오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백무량은 비망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후배를 벤 셈이구나.”
자신이 이렇게 반응할까 봐 현노윤은 운산보주가 옛 제자였음을 말하지 않은 것이리라.
물론, 후회는 없었다.
한번 길을 잘못 들면 돌이킬 수 없듯 담정과 노태랑은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자신은 운산보주를 베었을 뿐이었다.
그걸 현노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단지 아쉬울 따름이었다.
‘만일 담정에게 주백천과 같은 사형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백무량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개운하지 않은 전투였다.
하지만 얻은 것은 많았다.
‘운산보가 일궈 놓은 토양을 흡수하기만 하면…… 곤륜은 예전처럼 강해질 수 있어.’
청성파를 상대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증거는 덤이다.
모순적이게도, 운산보 덕택에 곤륜파는 바닥부터 시작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백무량은 누렇게 변한 비망록을 깨끗한 보에 감쌌다.
노태랑이 걸어온 행적은 더럽고 어두울지언정 곤륜을 광명으로 이끄는 데 사용할 생각이었다.
***
서녕에서 벌어진 일이 청해 전역에 퍼지기까지 사흘이면 충분했다.
워낙 백무량이 떠들썩하게 싸운 데다, 서녕 시장의 상인이 조금씩 눈치를 보며 청해를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행렬을 보면 무지렁이도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짐작하기 마련이니.
소식을 접한 송우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 허허……. 기어코! 기어코 저질렀구나!”
단신으로 한 문파를 멸문시켰단 업적은 옛날의 민담이나 허세를 부리기 위한 농담으로 여겨지기 마련이었다.
그만큼 강호는 태평성대를 일구고 있었고, 구파일방의 벽은 높고 두꺼웠다.
변화의 바람이 불기는커녕 좁은 곳에서 고여 있을 따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무량이 아주 큰 사고를 친 셈이었다.
‘과연 구파일방의 늙은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송우현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부도덕한 악행을 꾀하던 운산보였으니, 그들의 관점에서 백무량은 정의였다.
명분이야 당연히 정의에 뒤따라오는 법이었다.
그리고 이다음이 가장 흥미롭다.
‘운산보를 돕던 청성파를 모르쇠 취급할 순 없을 텐데 말이야.’
딱, 딱.
책상을 두드리던 송우현은 피식거리며 웃다가 끝내는 하늘을 향해 대소했다.
오래 두고 봤어야 했을 곤륜의 부흥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다 송우현의 뇌리에 상인의 행렬이 스쳤다.
“그래…… 일단은 내가 할 일을 끝내 놔야겠지.”
운산보 옆에서 딸랑거리던 뱀 새끼들을 잡으려면 일단 땅꾼부터 고용하는 게 먼저였다.
송우현은 창가의 전서구에게 다가갔다.
청해에서 지낸 이후로 늘 밥만 축냈던 녀석이었다.
“이제 네가 움직일 때가 됐다.”
꾸르록.
눈을 깜빡인 전서구가 날개를 펄럭이다가, 높은 창공을 향해 비상했다.
그놈의 주둥이 아래에 만금(萬金)이라는 표식이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