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2)
“왜입니까?”
담정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냉기가 스민 음색에 허망함과 처량함이 맴돌고 있었다.
“나는 사부의 가르침대로 양민을 괴롭히는 무인을…….”
“그가 청성파의 속가 제자임을 몰랐단 말이냐?”
불이 밝혀진 방문에서 현노윤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담정은 당장이라도 문을 열어젖히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러나 침통한 어조는 숨길 수 없었다.
“우리는 구파일방이 아닙니까? 쇠락했다고 하나, 백련교를 막아 낸 영웅의 후예라고 말씀하셨던 건 바로 장문인입니다!”
“…….”
방문에 비친 그림자가 흔들렸다. 쿨럭거리는 기침 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현노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허하지 않은 강호행을 떠나지 않았더냐. 무공을 빼앗고 근맥을 끊어도 시원찮은 일이다. 도적에서 파낸 것으로 끝내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그것이 다입니까?”
“…….”
“십 년을 가르친 제자를 떠나보내는데…… 사부님은 얼굴 한번 비춰 주질 않으시는군요.”
그 말을 꺼낼 때까지도 담정은 현노윤에게 무언가 사정이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림자가 흔들리고 기침 소리만이 들릴 뿐.
한 시진이 지나서도 현노윤은 침묵했다. 엄동설한의 한기가 담정의 전신을 덜덜 떨리게 했다.
“저는, 저는…….”
담정은 애통한 감정을 담아서 고함을 내질렀다.
“곤륜파의 대협이 되고 싶었습니다. 누구도 아니고, 사부가 가르친 무공을 가지고 말입니다!”
“…….”
“악행을 하는 놈이라면 청성의 속가 제자가 아니라, 무림맹주의 외동아들이라도 꾸짖었을 겁니다. 그게 강호의 도리이지 않습니까?”
“틀렸다.”
방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터질 듯한 감정을 애써 감추려는 것이었지만, 당시의 담정은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틀렸다고요?”
“그 자리에서 속가 제자를 꾸짖을 게 아니라, 그 모습을 적어서 청성파에 전달했어야 옳다.”
“사람이 죽든 말든 내버려 두고요? 정녕 그게 옳단 말입니까?”
담정의 목소리가 갈라지다 못해 애처롭게 변했다.
한기에 목이 얼어붙은 까닭이었다.
그럼에도 현노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도리어 독기를 머금고 있었다.
“당장 떠나라! 십 년을 봐 온 정으로 무공을 빼앗진 않겠으나, 외인에게 펼치는 걸 불허하겠다!”
“…….”
담정은 멍한 눈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한 시진 전부터 그러했듯. 현노윤은 방 안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뿐인 제자를 파문시키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담정의 시야가 부옇게 변했다. 뺨을 타고 차가운 눈물이 흘렀다.
“……예.”
담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파문의 충격은 무겁고 느릿하게 다가왔다.
“그만 가겠습니다.”
자박, 자박.
담정이 눈을 밟는 소리가 문지방을 넘었다.
“크훅, 큭.”
현노윤은 담정이 떠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기침을 애써 삼켰다.
담정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삼 년 뒤.
담정은 노태랑이라는 이름으로 청해에 돌아오게 된다.
***
카강! 카드득!
백선신검과 노태랑의 검강이 부딪치자 둔탁한 소리가 건물 내부를 울렸다.
건물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이 흔들리고, 승검신광의 벽력이 허공에 우짖었다. 누구라도 두려워할 광경이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아예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심상에 한 발을 걸친 채, 곤륜파의 무학을 아낌없이 펼쳤다.
“어째서냐…….”
노태랑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성진과 비교해도 뒤떨어지는 신체와 내공으로 자기와 동세를 이루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백무량에게는 참으로 우스운 혼잣말이었다.
‘백련교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칠십여 년 전에 싸웠던 백련교주는 이보다 수십 배는 무거웠고, 빨랐다. 의념을 집중해도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나 노태랑은 아니었다.
그는 백련교주 때와는 달리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백무량은 확신을 담아 백선신검으로 절기를 펼쳤다.
구천화우검의 이 초, 창천명월.
의념을 머금은 검강이 노태랑의 칼날을 반쯤 훑고 지나갔다. 강기로 이루어진 일 점의 검경(劍經)이 승검신광을 꿰뚫은 것이다.
노태랑의 입가에서 선홍색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하지만 고통보다 창천명월의 일 초에서 느낀 경악이 더욱 큰 듯했다.
“그, 그 나이에 강기라니……!”
노태랑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이제 승부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기이하게 부푼 발목과 가슴팍에 맺힌 울혈.
노태랑이 내공을 조금만 운용하면 울혈이 터지며 내상이 상반신 전체로 퍼질 터였다.
누가 보더라도 중상이었다. 수습하지 않으면 일각 내에 죽을지도 몰랐다.
“……부족해.”
그러나 노태랑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내저었다. 점차 죽어 가고 있음에도 그의 투지는 계속해서 불타고 있었다.
백무량은 그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모든 무공이 막히고 치명상을 당했는데도 저렇게 움직이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목숨을 구걸한다고 하여 살려 둘 생각은 없지만, 사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노태랑이 반쯤 굳은 핏덩어리를 퉤 뱉어 냈다.
“그게 다였느냐?”
척 보기에도 가슴팍에 맺혀 있던 울혈이었다.
저것을 뱉어 냈으니 내상이 급격하게 번질 터였다.
싸워 줄까, 말까. 그것을 고민하며 백무량은 숨을 들이켰다.
답은 간단했다.
“아니.”
그 대답에 노태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가슴팍을 꾹 눌러 점혈하고는 백무량을 노려보았다.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내공을 운용하거나 격하게 움직이면 혈맥이 터지게 될 터였다.
하지만 노태랑은 꿋꿋이 어깨를 폈다. 곤륜산에서 온 어린 고수에게 기괴한 집념을 드러내며 검을 꽉 쥐었다.
“내가 가마.”
외마디 말을 남긴 노태랑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오른 어깨가 앞으로 휘둘러지며 승검신광의 검강이 허공에 녹아들었다. 소리보다 빠른 일격이 백무량의 천령개를 향해 쏘아졌다.
“컥.”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노태랑의 혈맥이 터졌지만, 검강에 담긴 힘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방향 또한 그대로였다.
노태랑의 집념 앞에서 백무량은 발을 어깨만큼 넓혔다. 머금었던 숨을 전신에 녹여 내며 태청신공의 내공을 일으켰다.
극에 달한 의념이 내공을 유형화했다.
그 모습이 마치 심상에서 본 검해와 같았다.
쏴아아…….
태청신공의 내공으로 이루어진 구름이 백무량의 전신을 감쌌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짐작은 가능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무학의 길이 검해에 있을 테니까.’
설령 백련교주와 다시 마주하더라도 패배하지 않겠다는 의념이 그대로 녹은 형상이었다.
백무량은 구름을 휘감은 채 백선신검을 휘둘렀다.
이에 호응하듯 손등의 운룡이 강한 빛을 발했다.
구천화우검의 일 초, 균천관일(鈞天貫日).
그 초식의 검로를 따라 백선신검이 맥동했다. 구름으로 유형화한 태청신공의 시퍼런 내공이 용의 형태로 휘몰아쳤다.
“이거였나.”
노태랑은 균천관일의 검로를 보며 중얼거렸다.
승검신광으로는 도저히 받아 낼 수 없는 상승의 검법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저절로 무인으로서의 피가 뜨거워졌다. 운산보주로 살면서 잊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
그는 호흡을 차분히 가다듬었다.
먼 옛날, 이십구 대 제자였던 담정이 그랬듯이.
장년이었던 현노윤이 가르쳐 준 무공의 이치를 따라 검을 휘돌렸다. 발목이 뜯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입을 꾹 다물어 견뎠다.
그렇게 담정이 검을 휘두르니.
꽈르릉!
승검신광의 진수(眞髓)가 펼쳐지며 벽력이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균천관일의 검강이 벽력을 꿰뚫었다.
꽈과과광!
두 고수의 일 합을 버티지 못한 건물이 와르르 무너졌다.
***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에 주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운산보주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나면 멀쩡한 건물이 무너진단 말인가!
주겸의 양심이 마구마구 찔렸다. 저런 곳에 어린 후배를 두고 나왔단 사실이 폐부를 압박했다.
‘……생각해 보면 저곳에 허리띠도 두고 왔던 거 같은데.’
내던질 땐 대협이라도 된 양 행동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아까웠다.
개방의 이 결 제자라는 완장이 어디 흔하던가?
지금이라도 주워 올까, 주겸이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저벅, 저벅.
저 멀리에서 백무량이 무언가를 쥔 채 끌어오고 있었다.
‘저거 뭐야?’
주겸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거리가 꽤 있는 데다, 건물이 무너진 직후라 그런지 먼지 때문에 물체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뭐. 재물이나 운산보의 부정을 폭로하기 위한 문서 같은 거겠지.’
그렇게 대충 판단을 끝내고 고성진의 상처를 살필 때였다.
“……선배.”
낮은 목소리였지만, 주겸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주겸은 고개를 백무량에게 돌렸다.
“……!”
두 눈에 백무량이 피투성이의 운산보주를 질질 끌고 오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주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담겼다. 기가 찼다는 듯,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감정이 연거푸 스쳐 지나갔다.
“죽어도 싼 놈을, 왜?”
“이놈도 도와주십시오.”
“야, 난 저놈한테…….”
“선배.”
백무량의 목소리에는 항거할 수 없는 단호함이 있었다.
운산보주를 쳐다본 주겸은 침을 바닥에 퉤 뱉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눈에 가시가 돋을 것만 같았다.
“네 말이니까 한다.”
“그리고 이것도 챙겨 왔습니다.”
백무량이 품에서 허리띠를 꺼내자, 주겸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반색했다.
재빨리 웃음을 지우긴 했지만, 백무량의 얼굴엔 저 새끼는 뭐 하는 새낀가 하는 의문이 실려 있었다.
“커흠, 흠.”
헛기침을 흘린 주겸은 고성진을 곁눈질했다.
“이 친구 옆에 눕혀라. 일단 출혈은 잡을 테니까. 그리고…… 너도 좀…….”
주겸의 시선이 피로 물든 도복으로 향했다.
백무량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계속된 전투로 인해 피로와 상처가 쌓여 있을 터였다.
“쉬어라, 이제 다 끝났으니까.”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노태랑을 고성진 옆에 눕힌 백무량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몸으로 되살아난 지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고초와 난관을 겪었다. 사형이 남긴 안배가 없었다면 노태랑에게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지금까진 전초전이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궁무진할 것 같다는 기분은…….
백무량이 입술을 달싹이려던 그때였다.
“잠깐…….”
눈을 힘겹게 뜬 노태랑이 백무량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