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1)
백무량은 주겸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가 싸우는 동안, 저 사람을 구출시켜 줘.]
불처럼 전신에 휘돈 분노는 자신이 후배를 가장하고 있다는 상황을 잊게 했다.
백무량이 보낸 전음에 주겸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주겸이 고성진에게 다가가던 그때였다.
“어딜?”
노태랑이 가소롭다는 듯 빼문 웃음에서 여유와 오만이 느껴졌다.
백무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래서는 안 됐다. 사문의 무공을 악행에 사용하는 그가 저런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의와 도리를 떠나서 인의라는 게 이 땅에 남아 있다면…….
까득.
백무량이 손톱으로 칼 손잡이를 긁었다. 그 끝으로 태청신공의 내공이 연기처럼 부옇게 피어올랐다.
“허!”
감탄을 흘린 노태랑이 내공을 운용했다.
그건 그가 방금까지 보였던 패도적인 기운이 아니었다. 현묘한 기운이 층운처럼 쌓인 정통 도가의 내공이었다.
‘태청신공!’
어떻게 저놈이 곤륜파의 정수를 알고 있단 말인가?
백무량의 머릿속에 뜨거운 열기가 들끓었다.
“감히, 네가!”
“감히……?”
노태랑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곤륜의 무공에 그 정도 무게가 있더냐?”
무덤덤한 목소리가 건물의 내벽을 두드렸다.
짧은 침묵이 두 무인 사이를 맴돌았다.
그동안 백무량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러는 사이에 여러 감정이 들끓었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칠십여 년 전의 자신이었다면 당장 달려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에 달린 무게도 무게지만 건물이 무너지면 고성진이 죽을지도 몰랐다.
“…….”
스릉, 스르릉…….
주겸이 고성진의 전신을 휘감은 쇠사슬을 벗기는 동안, 백무량은 심상에 젖은 채 노태랑을 노려보았다.
심상에서 그와 수십 합을 교환했다.
태청신공의 공력이 부딪치며 반발하고,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는 환각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렇게 백무량이 심상을 부유하고 있던 순간.
파츠즉!
분광(分光)의 일검이 노태랑의 우수에서 발했다.
그것은 검뢰벽천이나 일섬운월의 검로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하물며 분광검결에 비할 바도 아니었다.
휘두르는 순간 닿는다.
과정을 생략하는 극한의 쾌검, 그것이 바로 승검신광의 요체였다.
‘검로를 보는 게 아니라, 느껴야 해.’
백무량은 기감을 돋우자 많은 것이 느껴졌다.
뺨을 스치는 먼지, 피 냄새, 대지에 발을 디딘 안정감.
그 모든 감각을 노태랑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그가 내쉬는 숨소리마저 느껴졌다. 솜털이 쭈뼛 서며 눈가가 가늘어졌다.
‘이제야 보이는군.’
태청신공의 공력이 담긴 무색(無色), 무흔(無痕)의 검로가.
뇌성벽력의 소리마저 앞지른 극쾌의 검, 승검신광이다.
그걸 본 백무량이 오른발을 뒤로 반보 옮겼다.
물러섬이 아니라 받아치기 위해서였다.
쩌적!
백선신검과 노태랑의 검이 부딪치며 파공성이 일고, 불똥이 튀었다.
뒤이어 노태랑이 휘두른 검로를 따라 뇌성벽력이 일었다. 건물의 기둥이 으직거리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휘청였다.
백무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겸에게 외쳤다.
“어서!”
그 외침에 주겸이 서둘러 고성진을 둘러업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본 노태랑의 눈동자에 큰 파문이 일었다.
“어떻게 막…… 아니, 어찌 버티느냐?”
“…….”
백무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노태랑의 압도적인 힘에 손목이 꺾일 듯했고, 내공 또한 부족했다.
사형이 남긴 안배를 취했지만 수십 년 동안 정종의 무공을 수련한 고수와는 동수를 취하긴 아직 어려웠다.
‘석 달, 아니. 한 달만 있었더라도 달라졌을 테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성급하게 움직였다며 질책하겠지만, 자신은 곤륜파의 도사였다. 의를 행하며 선을 위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자신이 했던 말을 지켜야 했다.
‘곤륜파의 무공을 회수한다.’
백무량은 숨을 내뱉었다.
손목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어깨가 흔들릴지언정 호흡은 정(淨)하고 숙(熟)하게 다스렸다.
카강!
백무량의 움직임이 안정적으로 변했다.
노태랑의 눈빛이 순간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전보다 더욱 강한 힘으로 부딪쳐 왔다.
사파의 전형적인 해법이었다.
백무량의 눈썹이 뒤틀렸다.
‘곤륜파의 무학을 대성했으면서 가르침을 모두 잊어버렸단 말이냐.’
실망감이 들불처럼 일어나 분노로 화했다. 하지만 중심은 잃지 않았다.
백무량에게는 심지(心地)가 있었다.
심상에 과하게 빠져들지 않으며, 운해를 마주하면서 삼켜지지 않게끔 만들어 주는 근본이.
휘르륵!
삼보를 밟자 첩풍이 백무량의 발아래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다. 노태랑보다 부족했던 힘이 순식간에 채워졌다.
백무량은 그 힘을 그대로 이용하여, 오른발을 휘둘렀다.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노태랑의 턱이 왼쪽으로 꺾였다.
“……!”
노태랑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난 순간, 백무량의 다른 발이 노태랑의 반대쪽 턱을 휘둘러 찼다.
때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한 바람, 첩풍이 백무량의 발아래에서 휘돌며 회풍(廻風)으로 화한다. 백무량의 연격은 멈추지 않았다. 노태랑의 몸이 계속해서 움찔거렸다.
이래서야 승검신광이 백무량의 박투술에 묶인 셈이다.
어째서, 노태랑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지금 상황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고성진에게도 이런 연격을 허용했다지만, 그는 대주천복마검이라는 희대의 무공을 펼쳤었다.
지금의 백무량처럼 기본공에 당하지는 않았다.
노태랑의 자존심이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놈!”
외마디 노성을 터뜨린 노태랑이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나 백무량은 그것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무량이 휘두른 정강이가 노태랑의 다리를 갈겼다.
으득.
노태랑의 발목에서 서늘한 소리가 울렸다.
두 다리로 꿋꿋이 버티고 있던 노태랑이 뒤로 나뒹굴었다.
“……후우, 후.”
백무량의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태청신공을 극한까지 연공한 탓에 열기가 전신을 잠식한 듯했다.
“왜냐…….”
몸을 일으킨 노태랑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네깟 애새끼가, 어떻게……!”
저놈에겐 말해 줄 가치가 없다. 백무량은 그렇게 생각했다.
-심지를 잃은 무인에겐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법이다.
과거, 사부 주자령이 했던 말이 백무량의 뇌리에 떠올랐다.
-네가 생각하기에 무공이란 무엇이더냐?
-궁리(窮理)죠.
-설명해 보아라.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하기 위한…… 생각요.
백무량은 말을 조금 더듬거렸었다.
사문의 무공을 저잣거리에 떠도는 호신법처럼 말한 것 같아서 아차 싶었다.
하지만 주자령은 자신을 꾸짖지 않았다. 도리어 부드럽게 웃으며 백무량의 대답을 긍정했다.
-실로 옳다.
지금은 강자존의 수단으로 전락했다지만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하기 위한 궁리에서 출발했을 거라고.
말을 덧붙인 주자령이 백무량에게 충고했다.
-무공에 감사해라. 자신이 가진 절기를 갈고닦는 고민을 항시 가지며,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심지를 굳건히 하여야 한다. 알겠느냐?
-……예.
백련교와 싸우기 일주일 전의 대화였다.
칠십여 년이 흐른 지금, 백무량은 그 과거를 잊지 않았다.
빠득!
백무량의 우수가 노태랑의 복부를 강타했다. 빠득하는 소리와 함께 노태랑의 뼈가 부러졌다.
시퍼런 피멍이 백무량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대로 둔다면 울혈이 치명상으로 화할 터.
‘굳이 상대가 좋을 대로 해 줄 필요는 없어.’
구천화우검이 뛰어난 무공이라곤 하지만, 어려진 몸으론 노태랑의 승검신광을 꺾을 수 없다.
백무량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후욱, 후…….”
노태랑의 숨소리마저 느껴지는 한 치에서 두 치 사이.
손가락만 펴도 급소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백무량은 침착했다.
어깨, 팔꿈치, 손목, 수도에 이르기까지.
백무량의 상반신 전체가 무기였다. 하체는 무기를 움켜쥔 손아귀와 같았다.
하나 노태랑은 달랐다. 그의 발목은 한번 비틀렸던 상태에서 균열이 시작되고 있다.
“…….”
백무량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칼날처럼 예리하게 벼려진 살의가 노태랑을 향해 폭사했다.
연격의 시작은 소청권의 우청격부터였다.
쩌억!
노태랑의 가슴팍에 주먹이 틀어박히고, 뒤이어 쌍청장이 심각한 내상을 일으켰다.
기혈에 화약이 터지는 충격이었을 터였다.
“커헉!”
노태랑이 피를 한 됫박이나 토해 냈다. 그가 주먹을 꽉 쥔 것을 보았다. 악다문 입술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 모습에서 백무량은 만족감과 불쾌함을 동시에 느꼈다.
‘……역시.’
만에 하나라도, 운산보주가 이십구 대 제자라는 말이 거짓이길 바랐다. 분광검의 비급을 몰래 훔쳐서 달아난 병신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분개한 모습에서 진실임을 느꼈다.
소청권은 곤륜파에 정식으로 입문하면 가르치는 기본 무공이었으니까.
‘삼재검법에 얻어맞는 기분이었겠지.’
백무량은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손이 피에 젖어선지 질척거리는 감촉이 좋지 않았다.
“현노윤의 문하였느냐?”
“그래.”
백무량의 물음에 노태랑이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상하긴 했지만, 피로가 확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백무량은 입술을 달싹였다.
“곤륜의 무공에 무게가 있냐고 물었었지.”
“……?”
“내가 보여 주마.”
백무량이 마보세를 취하며 백선신검을 쥐었다.
그 모습을 본 노태랑은 비틀거리며 검을 쥐었다.
발목은 부을 대로 부어서 움직이지도 않았고, 가슴팍의 내상이 너무 커서 내공의 운용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승부를 피하지는 않았다.
파츠즉!
노태랑의 검극에 승검신광의 벽력이 번뜩거렸다.
***
이십이 년 전, 강호행을 나갔던 도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곤륜산에 돌아왔다.
그의 표정만큼이나 새까만 밤이었고, 엄동설한의 겨울이었다.
“하아.”
도사의 입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피부가 시릴 정도의 냉기가 곤륜산을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비정한 강호보다는 따뜻했다.
그가 품었던 청운의 꿈은 강호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도사는 착잡한 마음을 안고서 장문인이 기거하는 방으로 다가갔다.
스윽.
그렇게 문을 열려던 그때였다.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 게냐?”
“……예?”
도사는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장문인답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제자에게 차가운 거야 그렇다 쳐도 대면조차 하지 않은 채 꾸짖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심, 왜 이렇게 되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저, 저는 그저 옳은 일을 위해서 움직였을 뿐입니다.”
“이십구 대 제자, 담정(擔丁).”
장문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담정의 처분을 고했다.
“하루의 말미를 주겠다. 내일 해가 뜨기 전에 곤륜산을 떠나거라.”
“자, 장문인!”
“파문이다.”
스르륵.
담정은 부릅뜬 눈으로 장문인이 안에 있을 방문을 노려보았다.
방문에 비친 그림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자신을 놀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