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39화 (39/275)

격동 (4)

“조심성이 그리 많아서야 사내라 할 수 있겠나?”

얼굴이 핏물로 젖은 고성진과 평온한 얼굴의 운산보주.

주겸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운산보주……!”

항상 집무실에 있던 그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주겸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보이자, 운산보주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손짓했다.

“잠깐 앉아 보게.”

도망치면 죽여 버리겠단 건지, 운산보주의 살기가 주겸의 전신을 두드렸다.

이래서야 뱀 앞의 개구리가 된 셈이다.

주겸은 인상을 한가득 찌푸리며 제자리에 앉았다.

“젠장. 텄구먼.”

“왜 돌아왔나?”

“저기 저, 동지가 있잖소.”

“동지는 무슨. 그동안 팔아먹은 놈들은 동지가 아니더냐?”

“…….”

주겸은 침묵했다.

운산보에 잡힌 이후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청해에 있는 협객의 위치를 조금씩 말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구파일방의 무인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었지.’

주겸이 입술을 달싹이던 그때, 운산보주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이놈은 도사라서?”

“뭐라고?”

“구파일방에 속한 무인이라서 구하러 왔다, 그런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는 운산보주의 목소리에 기이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주겸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여기서 입을 잘못 털면 저 도사는 물론, 자신까지 죽을 거라는 것을.

“대답해라.”

운산보주의 채근에 주겸은 식은땀을 흘렸다.

생각했던 그대로 답한다면 대가리가 으깨질 것만 같았다.

촌각 동안 번뇌한 주겸이 마침내 꺼낸 답은…….

“……의와 도리.”

방금 만난 백무량의 기상(氣像)이었다.

현 강호에선 누구나 웃어 버릴 정도로 고리타분한 말이었지만, 여기서 의와 도리를 들먹이지 않는다면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주겸은 도망치고 싶었다.

수년 동안 자신을 감금했던 곳에 다시 돌아가는 짓 따위 미친 짓이었다.

그럼에도 여기 돌아온 까닭은 오직 하나.

앞뒤 돌아보지 않고 의를 행하려던 백무량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대답을 들은 운산보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자기가 했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

주겸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의와 도리라는 대답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던 건지, 그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변모해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사람을 팔아먹은 네놈이 의와 도리를 들먹여?”

“…….”

눈을 잠시 감았다 뜬 주겸은 허리에 묶은 매듭을 풀고는, 끈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개방의 이 결 제자라는 신분을 포기한다.

어떠한 말보다도 명쾌한 행동이었다.

그걸 본 운산보주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답을 바꿀 기회를 주마.”

의와 도리란 말이 얼마나 싫으면 저럴까.

주겸은 잠시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곳에 붙잡혔던 동안 자신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협객의 위치를 술술 말했고, 사문의 정보를 몇 가지 팔기도 했다.

쉽게 말해서 박쥐 같은 새끼였다.

개방에 돌아간다면 사지의 근맥이 끊기는 건 물론, 개 잡듯 처맞을 터였다.

그랬다. 자신과 의와 도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저놈이 원하는 답을 해 주고 싶진 않았다.

주겸은 피식 웃었다.

“지랄.”

“살아남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느냐.”

운산보주가 주겸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 모습을 본 주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기랄, 이제 글렀나.’

속으로 쌍욕을 중얼거리며 내공을 운용하던 그때였다.

콰직!

문짝이 뜯기며 나뭇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부옇게 일었다.

도망칠 기회라고 생각한 주겸은 콜록거리며 출구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러면서 눈을 비비니, 태양을 등진 남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필시 문짝을 뜯어 버린 장본인이리라.

“가, 감사합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주겸은 팔다리를 재촉했다.

그때, 그 남자가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피곤함이 젖은 목소리였다.

그제야 주겸은 남자의 상태를 인지할 수 있었다.

피가 방울져 떨어지는 칼끝과 헐떡이는 숨.

어딘가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온 듯한 모양새였다.

결정적으로 체구가 크지 않았다.

“너, 너……!”

주겸은 눈을 크게 뜨고는 벌떡 일어났다.

“왜 여기까지 온 거야!”

“선배가 믿음직스러워야 말이지요.”

백무량이 똑바로 서서, 운산보주를 노려보았다.

“내가 직접 왔다.”

“……네가.”

평소답지 않게, 운산보주의 목소리에 망설임이 담겼다.

“네가 곤륜신성이라는 아이더냐?”

‘아이?’

주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운산보주를 노려보았다.

자신이나 저 도사한테는 고문을 서슴지 않았으면서 백무량한테는 아이라니.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 드느냐?”

“시끄럽다!”

주겸에게 고함을 버럭 내지른 운산보주가 백무량에게 시선을 돌렸다.

“잘 찾아왔다, 후배.”

“……뭐?”

백무량의 표정이 구겨졌다.

갑자기 왜 친하게 구는 건지, 백무량으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침묵하고 있던 고성진이 입을 열었다.

“그만…….”

“괜찮습니까?”

“저놈한테 떨어져라.”

운산보주를 바라보는 고성진의 눈에 짙은 분노가 담겼다.

“저놈은…… 곤륜파를 배신한 놈이다.”

“……?”

그 말에 백무량은 깜짝 놀랐다.

‘배신자라니?’

백무량의 시선이 운산보주에게 향했다.

운산보주, 노태랑의 표정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당당했다.

***

이십삼 년 전.

청해에 한 도사가 청운의 꿈을 품고 있었다.

‘대곤륜의 제자로서 무림에 협행(俠行)을 일구리라!’

품은 꿈만큼이나 그의 근골과 무재는 범상치 않았고, 의지 또한 강인했다. 백 년에 한 번은 아니더라도 오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재였다.

도사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서 장문인에게 찾아갔다.

“저는 곤륜파의 도사로서 의와 도리를 강호에 각인시키고 싶습니다!”

“…….”

그에 반해 장문인의 마음은 예전에 메말라 버렸다.

구파일방에 속했었던 명성은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았고, 약소 문파로서 많은 수모를 당했다.

그런 기억을 제자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도사를 차분하게 타일렀다.

“지금은 협행을 하기보다 수양을 쌓는 게 먼저이니라.”

“저, 저는…….”

“허하지 않겠다.”

그 말에 도사는 좌절했다.

왜 그랬는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수련하는 와중에도 장문인의 한숨과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년이 된 도사에게는 갈증이 있었다.

곤륜파의 이름을 강호에 각인시키고 싶다는 웅심(雄心)!

그렇게 되면 저 한숨도 멎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장문인이 나이가 드셔서 그런가, 겁도 많으시고…… 뭣보다 고리타분해. 무림은 힘으로 증명하면 되는데 말이야.”

도사는 장문인 몰래 곤륜산을 내려갔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일 년 뒤에 장문인이 자신을 파문할 거라는 것을.

***

“나는 곤륜의 이십구 대 제자다.”

“감히 곤륜파를 능멸하려는 게냐?”

백무량은 서늘한 눈빛을 드러냈다.

지나가다 만난 무인도 아니고, 곤륜파를 핍박한 장본인이 저런 말을 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때 노태랑의 검이 허공에 획을 그었다.

꽈과과!

검이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뇌성벽력이 번뜩였다.

틀림없는 곤륜파의 분광검이었다.

백무량의 얼굴이 무심해졌다. 경악이 속에서 들끓었지만, 애써 외면하고자 했다.

“훔쳐 배운 것이냐?”

“명문의 가르침은 하루아침에 훔칠 수 있는 게 아니지.”

노태랑의 말에 백무량이 미간을 찡그렸다.

“초식의 이름은?”

“삼절광식의 일 초, 검뢰벽천.”

“철저하게 고문했나 보군.”

백무량의 대답에 노태랑이 빙긋 웃었다.

“원류임을 깨달았을 텐데, 어째서 부정하지?”

“인정할 수 없다.”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붙잡았다.

파직거리는 소리가 건물 내부를 흔들었다. 마구잡이로 흩날리던 먼지가 뇌기에 뭉쳐졌다.

분광검의 기수식, 일점분식이었다.

그걸 본 노태랑의 눈이 가늘어진 순간.

꽈가가강!

두 줄기의 뇌성벽력이 서로를 향해 내질러졌다.

각자 펼친 무공은 검뢰벽천과 일섬운월.

호흡이 조금만 어긋난다면 먼저 펼친 쪽이 상대의 급소를 찢어발길 터였다.

쿵!

백선신검과 노태랑의 검이 중간에 맞부딪쳤다.

그러자 노태랑이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알겠느냐? 내가 네 선배임을…….”

“알 게 뭐야.”

백무량은 무릎을 노태랑의 몸 깊숙한 곳에 꽂았다.

빠악!

태청신공의 정심한 내공이 명문혈까지 침범하는 듯했으나, 노태랑이 황급히 뒤로 구른 탓에 절명하지 않을 수 있었다.

“네 이놈!”

노태랑의 노성이 건물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고함과 마주하면서도 백무량은 무심을 유지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현노윤에게 운산보가 왜 곤륜파를 증오하냐고 물었을 때. 현노윤은 이렇게 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현노윤의 쓸쓸한 음색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고 답할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의아하긴 했지만 억지로 캐묻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말해 주겠거니 했었다.

‘그냥 내려오지 말 걸 그랬나.’

하필이면 그날 밤에 바로 내려와서 묻질 못했다.

백무량은 공력을 운용하는 노태랑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알아야 할 거였다면, 말해 줬겠지.’

운산보주가 곤륜파의 제자였다면 뭐 어떻다고.

지금은 영락없는 사파 족속이며, 청해의 질병 덩어리가 아니던가?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난 너 같은 선배 둔 적 없어.”

백무량은 숨을 몰아쉬며 노태랑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허.”

노태랑이 헛웃음을 뱉었다.

백무량은 그 웃음에서 단념과 분개를 느꼈다.

“그래, 그랬지. 이제는 그저 사파의 일원일 뿐이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노태랑이 검을 쥐었다.

뇌성벽력이 연거푸 번뜩이며 강한 존재감을 일으켰다.

백무량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초식이 떠올랐다.

“승검신광(乘劍神光)……?”

분광검의 모든 초식을 한데 묶어서 완성한 일 초.

백무량이 호흡을 가다듬자, 노태랑의 눈동자에 이채가 일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모양이구나.”

“…….”

백무량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노태랑이 피식 웃었다.

“아무렴, 상관없지. 내가 곤륜을 지우면 분광검의 새로운 원류가 나로부터 시작될 터인데.”

“……시끄럽다.”

무공의 토대를 쌓아 준 부모라고 할 수 있는 사문에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다니.

백무량은 노태랑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몸을 짓누르던 피로가 단숨에 날아가는 듯했다.

“곤륜파의 적전 제자로서, 네놈의 일신에 깃든 곤륜의 무공을 회수하겠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

노태랑의 얼굴에 짙은 비웃음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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