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조 (4)
한편, 같은 시각. 곤륜산.
수련을 마친 현종휘는 불안한 표정으로 현노윤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공동에서 온 그분은 어떻게 된 걸까요?”
“글쎄다. 자기 멋대로 행동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갑자기 말없이 내려가다니…….”
“현사조님처럼요?”
그 말에 현노윤의 미간이 좁아졌다.
“적어도 사조님께서는 송 노야를 통해 소식을 전하셨다.”
“그분은 소식도 없고요.”
현종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짧은 시간이나마 같이 지내면서 고성진에게 정이 든 듯했다.
“크흠, 흠.”
가볍게 헛기침을 한 현노윤이 현종휘와 시선을 마주했다.
“괜찮을 것이다.”
“정말요?”
“그래. 전에 나와 사조님이 말하지 않았느냐. 공동파를 대표하여 온 도사가 녹록할 리가 없다고 말이다.”
“……아!”
“백 사조님만큼은 아니겠지만, 그에게도 무언가 중대한 뜻이 있어서 내려간 거겠지.”
그 말에 현종휘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하지만 현노윤의 속내는 여전히 어두웠다.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는 건, 그가 위험에 처했거나 너무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다는 뜻이니까.
‘송 노야도 모른다고 할 정도라면…….’
서녕 옆, 청해호에 가깝다는 의미이리라.
현노윤은 현종휘의 머리를 매만졌다.
“자, 네 수련이 끝났으니 이제 철 사제에게 가서 기본공을 알려 주어라.”
“네, 할아버지!”
현종휘가 철유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것을 보며, 현노윤은 정성을 담아 하늘에 염했다.
부디 백무량과 고성진에게 별 탈이 없기를.
멀쩡한 모습으로 곤륜파에 되돌아올 수 있기를…….
***
‘보름 전이었던가?’
고성진은 장문인에게 곤륜파를 도우라고 명령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련에 시간을 아무리 들여도 모자라는데 뭐 하러 다 망해 가는 문파를 도우러 가라는 건지.
짜증이 나서 다짜고짜 장문인을 찾아가서 따졌다.
“왜 하필 접니까? 다른 사제들 많잖아요!”
“장문인의 명을 거절하시겠다?”
“아니, 곧 있으면 저도……. 예? 아시잖아요! 곧 있으면 육 성의 성취인데!”
“그래서 가라는 것이다.”
“예에?”
어찌나 기가 막히는지, 고성진의 미간이 사납게 뒤틀렸다.
그 모습을 본 장문인이 술잔을 바깥에 내던졌다.
“타문에 선발대로 보내는데 모자란 놈을 보내랴?”
“모자라다뇨! 제 사제들도 수련 열심히 해요!”
“열심히만 하니까 문제다, 문제!”
화를 토해 낸 장문인이 고성진에게 손가락질했다.
“네 사제가 다 너 같으면 걱정도 않지!”
“가서 깽판 칠 겁니다!”
장문인이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깽판은 무슨, 사내놈이 숫기가 없어서 완전 체면이고 낯이고 다 가리면서…… 가능한 소리를 해라!”
“…….”
“그리고, 네 생각보다 곤륜파는 훌륭한 문파다.”
“망했잖습니까?”
고성진의 말에 장문인이 피식 웃었다.
“곤륜파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망했는지 아느냐?”
“그거야, 제 사문이 아니니까 모르지요!”
“그렇게 개처럼 무시했던 문파가 몇이나 깨졌는지 알고?”
“…….”
고성진이 조용히 입을 앙다물자, 장문인이 비아냥거렸다.
“모르면 그렇게 입이나 다물어라, 절반이라도 가니까.”
“장문인이 그렇게 말씀하실 만큼 곤륜이 대단합니까?”
“대단하지. 칠십여 년 전의 백련교가 어땠는지 네가 들었다면, 그딴 소리는 못 했을 거다.”
노기를 가라앉힌 장문인은 진지한 목소리로 고성진에게 말했다.
“가라. 가서 네가 직접 봐라, 곤륜파가 어떤 곳인지.”
“예! 제가 거기서 무슨 짓을 벌이는지 지켜보시지요!”
공동파에서 출발하기 전까지도 고성진은 장문인과 실랑이를 벌이며 가기 싫다고 칭얼댔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장문인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곤륜산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고성진은 보았다.
곤륜의 기상을 온몸에 품고 있는 듯한 소년을…….
‘마음에 드는 후배야.’
고성진은 어둡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천휘성을 둘러싼 암성과 낙성.
열흘도 전에 보았던 천문이 아직도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흉조였다.
백무량을 죽일 고수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다는 흉조.
이 때문에 고성진은 곤륜산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후배. 곤륜산에서 가만히 있기가 어렵더라고.’
“네놈은 누구냐?”
어둡고 낮은 목소리가 고성진의 귓가에 꽂혔다.
이곳이 서녕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내공이 심후한 걸 보면 그의 정체는 명명백백했다.
운산보주.
곤륜파를 몰락으로 몰고 간 악한이자, 암성의 주인.
그에게 고성진은 단순하게 답했다.
“지나가던 도사.”
“……도사라.”
운산보주, 노태랑은 검을 뽑았다.
“도사와는 계속해서 엮이게 되는군.”
두 무인이 서로를 응시했다.
곤륜파에 운룡대팔식과 구천화우검이 있다면, 공동파에는 현천신장과 칠상권이 있다.
강호의 호사가라면 모두가 아는 공동파의 절학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동파가 바깥에 드러내고 있는 무공일 뿐.
-실체는 하나로도 족하다.
공동파의 장문인, 현천신검(玄天神劍) 척준환(陟俊煥)이 말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공동파에는 복마검(伏魔劍)이 있다.
현천신장과 칠상권도 뛰어난 무학이지만, 오직 하나. 복마검에 비할 수는 없다.
그 말을 들은 고성진은 척준환에게 물었었다.
-공동파에게 복마검이란 무엇입니까?
-공동파가 공동파로서 자답(自答)하는 힘.
반드시 이겨야 할 때, 무적(無敵)이어야만 하는 순간에 필사의 의지로 펼치는 심검(心劍).
-그리고…… 강대한 마를 굴복시키는 검.
그렇게 운을 뗀 척준환이 손수 복마검을 펼쳤다.
그 검은 하늘을 닮아, 높은 경지로 올라설수록 수없이 많은 검로를 담는다던가.
그것이 바로 복마검의 대주천.
대주천복마검(大週天伏魔劍).
숨을 가다듬은 고성진이 어깨를 강하게 휘둘렀다.
“대천행(大天行).”
콰아아!
장강에 이는 파도처럼, 고성진이 운용한 내공이 허공에서 일렁였다.
삼절검, 소양검, 개천검에 이르기까지.
그 파도에 공동파의 고절한 무공과 초식이 잠들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대주천복마검의 대천행.
오로지 장문인의 적전 제자만이 펼칠 수 있는 절기일지니.
“……!”
대천행 앞에서 노태랑의 기세가 단숨에 짜부라졌다.
그 직후.
“……허.”
노태랑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난생처음, 구파일방의 고수가 펼치는 진수(眞髓)와 마주했다. 그가 침입자가 아니었다면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무를 논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말했다.
지나가던 도사, 단지 그뿐이라고.
사파에게 대화란 불필요하다고.
“그 오만이 부럽구나.”
노태랑의 입술이 비틀렸다. 단번에 질투와 분노가 뒤섞였다.
그가 단숨에 발검했다.
까강!
노태랑의 칼날에 수십 갈래로 이루어진 검기가 부딪쳤다.
어느 하나 가볍지 않으며, 단순하지 않았다. 복마검의 여러 형태가 복잡하게 얽히며 파도를 일으켰다.
지저분한 쇳소리가 두 무인 사이에서 일어났다.
시뻘건 불티가 허공을 날며 휘어졌다.
화공이 허상의 그림을 그리듯, 불티로 이루어진 나비가 허공을 날았다.
‘이상하다.’
노태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앞의 도사는 겨우 검기를 이루었을 뿐이고, 자신은 성강의 고수였다. 범인이 보기엔 같은 고수일지언정 수많은 벽으로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고성진의 검기는 자신에게 밀리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해서, 노태랑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고성진의 대천행이 물러난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이제야 대천행의 흐름이 보인다.
노태랑의 얼굴에 짙은 조소가 맺혔다.
“몰아치는 게 늦어.”
“……!”
고성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건 노태랑이 생각보다 강해서도, 대천행의 흐름이 무너져서도 아니었다.
아니 저건. 고성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건…… 후배가 하던…….’
호흡.
주변의 대기가 빨려드는 듯한 위화감이 노태랑에게서 느껴졌다.
그다음 순간, 노태랑의 검이 허공을 찢어발겼다.
꽈과과과!
검강으로 이루어진 일검이 뇌성벽력을 일으켰다.
고성진의 고막이 찢어질 듯이 아리고, 눈앞이 번뜩였다.
그것은 생존 본능이었다.
자신의 경지로는 막지 못하며, 오로지 피해야만 하는 일격.
고성진은 그 일검에서 백무량이 펼쳤던 곤륜파의 무공을 느꼈다.
‘분광검!’
검을 쥔 고성진의 오른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곤륜파의 분광검을, 이놈이 익히고 있어!’
운산보주가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 필요가 없었다.
곤륜파를 멸하려는 의도를 가진 악한.
그런 자가 곤륜파의 무공을 익혀서 사용하고 있다는 건, 도문의 도사로서 용인할 수 없었다.
고성진의 눈동자에 분노가 들끓었다.
“놈!”
무적이어야만 할 때 펼치는 검, 대주천복마검의 대천행이 와류(渦流)를 그렸다.
카가강!
분광검과 와류가 부딪치며 풍파가 일었다. 두 칼에서 튕긴 불똥이 어두웠던 밤을 한순간이나마 밝혔다.
번뜩이는 순간마다 노태랑은 자신만만한 모습이었으며, 고성진의 얼굴에는 패색이 짙어졌다.
대천행의 흐름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고성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축으로 삼은 왼발이 한여름의 진흙에 파묻힐지언정, 점차 죽음의 위기에 이르게 될지라도.
‘회천행(回天行).’
오히려 조금씩 앞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고성진의 기세가 분광검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
노태랑으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검기로 이루어진 무공으로 어찌 성강의 고수를 상대한단 말인가?
하물며 저 의지란, 타지에서 목숨을 거는 이유는…….
노태랑이 순간 욱하여 외쳤다.
“명문 거파의 자존심이라는 거냐?”
“…….”
고성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좋겠구나, 그렇게 훌륭한 무공을 가지고…… 같잖은 정의감까지 갖출 수 있어서!”
“……헛소리를 하느냐.”
고성진은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나의 행(行)에는 도리가 있으며, 도사로서 이루고자 하는 길이 있다. 무공은 행의 수단일 뿐이다.”
“…….”
“하면, 이제 내가 묻겠다.”
고성진의 검이 노태랑을 밀어붙였다.
“곤륜파의 무학을 가지고 악행(惡行)을 이루는 너는 누구냐?”
“시끄럽다……!”
“대답해라!”
“시끄럽다고 말했다!”
노태랑의 검이 단숨에 팔자결을 그렸다.
분광검의 삼절광식이 일변도로 펼쳐지며 고성진이 펼친 회천행을 끊었다.
“…….”
고성진은 그 광경에도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검이 반쯤 깨어질 듯 위태했지만, 복마검의 대주천은 무한히 흐르는 법이었다.
하늘에 도도히 흐르는 기류처럼.
공동파의 무학이 녹아든 총결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천행, 회천행, 유천행.
중간중간 펼쳐지는 와류와 변초는 노태랑의 호흡을 끊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때마다 노태랑은 눈을 부릅떴다.
질투와 분노가 가득하다 못해, 흘러내릴 듯한 눈빛.
‘과연.’
한계가 가까워진 고성진은 백무량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후배의 말이 맞았어. 운산보주, 저놈은…… 곤륜파와 관련이 있는 놈이었던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곤륜파의 분광검을 대성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물며 자신의 무공을 보고 드러낸 감정은, 아주 긴 시간 동안 고이고 썩어 버린 것이었다.
‘그와 백무량이 마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성진은 그가 왜 ‘암성’인지 깨달았다.
“여기서 네놈을 죽여야겠다.”
휘르르…….
대주천복마검이 또 다른 흐름을 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