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조 (1)
그것은 틀림없는 흉조였다.
“이놈들아! 남의 집 장손에게 이게 무슨 짓이더냐!”
“늙은이도 뒈지고 싶어?”
전서구가 도달하는 곳마다 비명이 끊이질 않고, 귓불이나 혀가 잘린 남정네가 가족에게 눈물을 흘렸다.
“끄으으…… 어어어…….”
“대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한번 시작된 불행은 계속해서 이어지니 청해 곳곳에 비탄 어린 한숨이 가득했다.
“이십 년 전 그때와 같구나…….”
운산보주가 처음 청해에 나타났던 그때처럼.
노인은 혀가 잘린 장손을 바라보며 서럽게 울었다.
***
이튿날.
현종휘와 함께 수련에 전념하던 백무량은 자신의 어깨를 매만졌다.
어디가 불편하거나 아파서가 아니었다.
‘뭔가 불안하단 말이지…….’
칠십여 년 전 강호행 중 느꼈던 감각과 비슷했다.
아무렇지 않게 흘려 넘길 수도 있었지만, 무인의 예감이란 십중팔구는 맞아떨어지는 법.
“종휘야, 오늘은 일찍 들어가자꾸나.”
“예. 현…… 아니, 사형.”
백무량이 검을 칼집에 넣으려던 그때였다.
“모두 안채로 모이거라!”
뒤에서 현노윤의 날카로운 노성이 들렸다.
웬만한 일엔 꿈쩍도 하지 않는 그가 저렇게 급박한 걸 보면, 무언가 큰일이 벌어진 듯했다.
“이럴 땐 예감이 틀려도 될 텐데…….”
“네?”
“아니다. 얼른 가자!”
백무량은 황급히 검을 회수하고는 안채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얼굴이 잔뜩 붉어진 송우현과 고성진이 주먹을 불끈 쥔 채 정좌하고 있었다.
자연히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송 노야라면 저번에 온 이후로 힘들어서 못 오겠다고 했었는데.’
백무량은 송우현에게 다가가 물었다.
“송 노야, 여기까진 무슨 일입니까?”
“그놈들은 미쳤다!”
“예?”
“미친 게 아니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으냐!”
송우현이 이렇게까지 흥분한 적이 있던가?
두서없이 자기 할 말만 늘어놓는 걸 보면,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듯했다.
“알려 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노야.”
차분한 음색으로 송우현을 타이르자, 그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몹쓸 꼴을 보였구나, 미안하다.”
“일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송우현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였다.
기껏해야 칩거하거나 재산을 옮길 줄 알았던 운산보가 청해인을 공격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곤륜파에 극렬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백무량이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고성진의 손등이 희게 변해 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무공도 모르는 양민들을…….”
“사파는 물론이거니와 흑도도 하지 않을 짓이지.”
송우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노여움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은 건지, 붉었던 안색이 평범하게 돌아와 있었다.
“너무 이상합니다.”
백무량은 차가운 시선으로 현 상황을 정리했다.
“청해의 주인이라는 놈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악독하게 괴롭히다니요. 하물며 개를 기르더라도 말을 안 듣는다고 혀를 자르진 않는 법입니다.”
“사람이 개더냐?”
송우현이 별안간 소리를 내지르자, 백무량이 역으로 되물었다.
“하면 송 노야에게 묻지요. 뒷골목 왈패가 왜 상인의 목을 짜내지 않고 자릿세를 내라고 합니까?”
“그건…….”
“예. 칼부림하느니 칼만 들이대고 돈을 걷는 게 나으니까요! 그렇지요. 상인이었던 노야라면 잘 아는 사실일 겁니다.”
“……내가 너무 흥분했구나.”
송우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작게 숙였다.
백무량의 말대로 운산보가 청해에 칼부림을 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돈을 걷을 사람을 줄이는 것으로 모자라, 반감을 전보다 수십 배는 높이게 되는 셈이니까.
어디 그뿐이랴?
“그놈들은 도망칠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곤륜파를 도발한 겁니다.”
백무량은 그게 너무도 이상했다.
보통 무림맹에 공격당할 사실을 아는 사파나 흑도라면 재산을 숨기거나 몸을 의탁할 장소를 찾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운산보는 그러지 않았다.
숨기는커녕 오히려 칼부림을 벌이며 곤륜파의 소문 자체를 청해에서 없애려고 했다.
그건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운산보는 왜 이렇게 곤륜파를 증오하는 겁니까?”
백무량의 시선이 현노윤에게 향했다.
그의 미간이 좁아진 채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옛일을 억지로 떠올리는 듯했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쓸쓸했다.
***
서늘한 공기가 흐르는 달밤.
운해가 잔뜩 낀 곤륜산에서도 마당이 훤히 보이는 밤이었다.
마치 구천화우검의 창천명월처럼 청명한 기후라.
‘몰래 나가기는 안 좋은 날인가.’
백무량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혹여라도 현노윤이 말리거나 고성진이 들을까 봐, 한밤에 곤륜산을 내려가려는 모습이 떳떳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온당하다 생각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대로 운산보의 악행을 좌시할 순 없어.’
물론 운산보 전체와 싸우기엔 아직 부족함이 많았다. 운산보주가 얼마나 강한지도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운산보주가 있는 곳은 서녕.
잠을 줄여 가며 걸어도 닷새는 걸리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도움을 청하거나 받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사지로 걸어간다는 표현이 적절하겠지.’
그럼에도, 그래도, 가야만 한다고 생각된다면…….
자신은 사지로 걸어갈 사람이었다.
“……후우.”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매만졌다.
사방에 적뿐인 상황과 온갖 어려움이 예견되는 길이지만, 곤륜파의 책무를 기억하는 도사로서 가야만 했다.
저벅.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백무량이 한 걸음을 걸을 때였다.
“어딜 그렇게 가는가, 후배?”
“……!”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가.
그림자 속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던 고성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처럼 여유롭거나 말을 더듬는 일 없이, 고성진의 목소리에 강한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백무량은 걸음을 멈추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곤륜산을 내려갈 생각입니다.”
그 말에 고성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을 해도 되었을 텐데?”
“곤륜파의 도사가 거짓말을 했다는 기억을 남기고 싶진 않아서 말입니다.”
고성진이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어! 잠을 줄여가며 기다린 보람이 있구먼!”
“알고 있었습니까?”
“알기는.”
고성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의 동공에 백선신검을 쥔 백무량이 맺혀 있었다.
“나는 그저…… 후배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을 뿐이야. 곤륜신성이 왜 신성일까? 범인(凡人)은 시도하지 않는 보보(步步)가 있기에 생긴 별호려니 생각했지.”
“…….”
“하지만 곧바로 하산하다니, 장문인께 말씀은 드린 게냐? 운산보가 요즘 얼마나 흉악한지 듣고도 내려간단 말이냐?”
고성진이 쏟아 낸 걱정에 백무량은 즉답했다.
“나는 그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호.”
탄성을 흘린 고성진이 피식 웃었다.
“전에 본 무위는 나이를 초월하였으며, 지금 본 용기는 어른도 쉬이 낼 수 없음을 안다. 후배가 공동의 도사였다면 나는 장문인에게 귀히 여겨 달라 말했을 것이다.”
고성진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너는 고집과 오만으로 잃기엔 너무 아까운 재목이다. 시간이 있다면 강호 십 대 고수에 도전할 수 있을…….”
“서론이 깁니다, 선배.”
“그랬나?”
유쾌한 웃음을 머금은 고성진이 검을 들었다.
“그래, 그렇다면 실력으로 증명해라, 곤륜의 후배야.”
“바라는 대로!”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뽑기가 무섭게.
카강!
재빠르게 달려온 고성진의 검력이 백선신검을 짓눌렀다.
“이게 무슨……!”
“전에는 후배한테 선수를 양보했으니, 이제는 내 차례잖아?”
뻔뻔한 어조로 답한 고성진의 칼날이 세 갈래로 분화했다.
그걸 본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삼절검?’
익히기 어렵지 않아 이제 막 입문한 아이에게 배우게 하는 무공이었다.
백무량은 고성진의 칼을 어렵지 않게 쳐 내며 상체를 숙였다.
“……허?”
고성진이 당황한 음색을 내뱉었지만, 이미 늦었다.
빠득!
상체를 숙인 건 어디까지나 속임수.
백무량은 발꿈치로 고성진의 발등을 내리찍었다.
간단한 움직임처럼 느껴졌을 테지만, 삼보의 첩풍을 가미한 일 보였다.
고성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도사가 되어선!”
“경험이란 거요.”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백무량과 고성진은 동시에 움직였다. 한 치에서 세 치 사이. 숨만 쉬어도 닿을 듯한 거리에서 두 도사가 주먹을 휘둘렀다.
빠악!
서로의 주먹이 복부에 틀어박혔다. 백무량의 우청격과 고성진의 통천권이 기혈을 뒤흔들었다.
“쿠흑!”
고성진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렀다.
진심은 담지 않았다지만, 육신은 칠십여 년 전과 같으니 구천검이라 불리던 고수의 일격을 허용한 것과 같았다.
속이 뒤틀리는 듯했지만, 고성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피식 웃었다.
“주먹이 꽤 맵구나!”
“허세가 심합니다, 선배.”
“하!”
뒤로 살짝 물러난 고성진이 검을 휘둘렀다.
삼절검에 소양검, 개천검에 이르기까지.
고성진의 칼날은 권장보다 매섭고, 무거웠다. 전에 현천신장 때 알아차렸던 것처럼 그의 무기는 권이 아니라 검인 듯했다.
‘기본기도 제법……!’
이 대 제자라더니 웬만한 일 대 제자보다 뛰어났다.
백무량은 고성진의 검을 하나하나 쳐 내며 분광검으로 그의 검로를 희롱했다.
“이런 것도 할 줄 아느냐?”
자기가 펼친 검법이 파훼당하는 것인데도, 그의 안색은 편안하기만 했다.
그것으로 백무량은 깨달았다.
‘역시 실력을 숨기고 있구나!’
처음 무공을 보일 때 검이 아니라 현천신장을 펼친 것처럼, 지금도 기본 무공을 휘두르고 있을 뿐 진신 무학은 아끼고 있었다.
백무량은 가볍게 그를 비웃기로 했다.
“선배는 이길 생각이 없나 봅니다? 이렇게 가벼운 검만 휘두르는 걸 보면.”
“후배한테 이겨서 어디서 자랑이라도 하랴?”
고성진이 백무량의 검을 강하게 밀어내며 말했다.
“내 검은 적을 베는 데 쓰이면 족하다!”
“그것참 든든하군요.”
백무량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없을 때 곤륜파를 지켜 주실 테니까!”
스각!
태청신공의 공력을 머금은 백선신검이 그의 검을 잘라 냈다.
두 동강이 난 쇳조각이 바닥을 두들기고 나서야 고성진이 입을 열었다.
“갈 테냐?”
“예.”
“수십 아니, 백이 넘는 무인이 너를 노린다고 해도 말이냐?”
“…….”
그의 말이 옳았기에 백무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다린다면 공동의 고수가 올 것이다. 본 산에 전서구도 보냈다. 앞으로 열흘 안에는…….”
“그동안 죽을 사람이 몇입니까?”
백무량이 던진 물음에 고성진이 눈을 부릅떴다.
“누가 그걸 모르느냐? 나도 답답하고, 분하다! 하지만 패배할 싸움에 목숨을 버리는 건 천치야!”
“그렇게 보이겠지요. 답답하겠지요.”
미련하고, 바보 같고, 멍청한…….
백무량은 곤륜파의 역사를 그렇게 생각했다. 항상 이기지 못할 싸움에 멸문하고 재건되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천치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백련교의 난에서 끝까지 싸웠던 도사로서, 백무량은 곤륜파의 역사를 진실로 이해했다.
“우리가 영리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억울한 죽음이 구천을 떠돌겠습니까?”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곤륜파는 불의(不義)한 자와의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과거, 곤륜파의 선배로부터 늘 그래 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