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8화 (28/275)

협력자 (1)

“나는 청성의 도사인 송학검 등자평…….”

“멈추라고 하지 않았는가!”

현노윤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등자평을 꾸짖었다.

평소 그의 온화한 성정을 생각하면 등자평의 무례함이 도를 넘었다는 방증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존장. 급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등자평의 목소리에는 자기가 잘못했다는 감정이 좁쌀만큼도 없었다.

하물며 현노윤을 장문인이 아니라 존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백무량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등자평에게 말했다.

“무공은 배웠으되 도학은 멀리하신 겁니까? 어찌 장문인을 존장으로 부른단 말입니까?”

“너와 입심을 겨루러 온 줄 아느냐?”

“그러면…….”

“자.”

백무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자평이 품에서 용모파기가 그려진 종이를 내밀었다.

갸름한 얼굴에 단정하게 묶은 머리.

척 보기에도 고생을 모르고 자란 화초 같은 놈이었다.

백무량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건 누굽니까?”

“곤륜 지부에 청성의 도사가 갇혀 있었다 하던데, 그게 사실이더냐?”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 알기로, 곤륜 지부에는 조현성을 쓰러트릴 자가 없어서 묻는 말이다.”

조현성이라는 이름에 백무량은 붉은 철문 안에 갇혀 있었던 사내를 떠올렸다.

그가 자칭했던 이름이 청유검 조현성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용모파기와는 다르군.’

운산보와 싸우느라 알아볼 겨를은 없었지만, 그는 청성파의 도인을 사칭한 무언가였다.

어쩌면 백련교일지도 모를 위험한 인물.

하지만 등자평이란 도사도 곤륜에 호의적이진 않았다.

‘예의를 안다면 적어도 사흘 전에 연락했겠지.’

하물며 장문인에게 보인 무례는 어떠한가?

곤륜파를 존중하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니, 등자평의 출신이 청성임을 생각하면 알면서도 행하는 패악질이었다.

‘그렇다고 동문의 죽음을 겪은 사람에게 따져 묻는 건 도리에 어긋나니.’

한숨을 내쉰 백무량이 입을 열었다.

“청성파 도인임을 사칭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사칭이라…… 곤란하게 되었구먼.”

등자평이 인상을 구기자, 백무량의 뇌리에 의아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백무량은 그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우습게도, 답은 금방 나왔다.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

“살아 있는지는 왜 묻지 않습니까?”

“…….”

등자평이 무표정해짐과 동시에, 백무량의 속내에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의 반응이 백무량에게 많은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현노윤에게 일관적으로 무례했던 모습이나, 자신에게 다짜고짜 따져 물었던 건 곤륜파는 안중에도 없단 뜻이요, 동문이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사칭’을 곤란해하며, 인상을 구기는 것으로 끝이다.

백무량은 등자평을 호의적으로 볼 수 없었다.

“대답하십시오.”

“도(道) 이전에 예(禮)가 있음을 모르느냐? 하긴, 그깟 잡배 몇 놈 잡고 나면 세상이 우습게 보이기 마련이지.”

등자평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의 약지에 끼워진 옥가락지가 유난히 돋보였다.

뒤이어 그는 현노윤을 돌아보았다.

“이놈의 소문이 강호에 왜 떠들썩한지 알겠소. 이런 천둥벌거숭이가 있으니 시끌벅적할 만하지.”

등자평의 신랄한 어조에 현노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게.”

“선배 된 마음으로 후배를 일깨우려는 것뿐이오.”

“청성의 도사라는 자가 존장 앞에서 최소한의 예조차 알지 못한단 말이더냐!”

현노윤의 노호에 등자평의 눈이 가늘어졌다.

“용무가 급하여 존장에게 예가 부족했음을 아오만, 이놈 또한 만만치 않지요.”

“청성의 이름이 높다 하여, 모두가 도사가 아님을 자네 덕분에 개안하는군.”

“지금, 청성을 모욕…….”

“시끄럽다!”

현노윤은 시뻘게진 안색으로 등자평을 노려보았다.

과거였다면 여기서 굽혔을 터였다.

곤륜파는 몰락했고, 자신은 몰락한 도문의 어른이었으니까.

먼저 고개를 숙이고 횡액을 피하여, 명맥을 짓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사조와 손자가 보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는.’

누구에게도 당당한 대곤륜의 장문인이어야 했다.

현노윤의 목소리에 노도와 같은 기세가 일었다.

“타문의 외인이면서, 존장 앞에서 후배를 가르치겠다? 순서가 잘못되지 않았느냐!”

“…….”

등자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저 늙은 학도사로 치부했거늘, 지금 그의 모습은 청성의 장문인과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현노윤의 등 뒤에 운해가 있었다.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라! 하늘이 혼란해진 게 아닌즉, 네가 곤륜의 존장을 무시했으며, 그 앞에서 제자를 능멸하려는 모습이 온당하지 않다는 건 천하의 모두가 안다!”

사조라는 단어가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꾹 참았다.

그만큼 현노윤의 내면이 분노로 가득했다.

“강성해진 사파의 모욕을 견디고, 산맥에서 힘겨운 시간을 버텼다. 한데 같은 도문이라는 자가 갑자기 와서는 패악질을 부리는구나! 나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겠느냐?”

“……존장, 너무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청성의 개인이지, 대표로 온 건 아닙니다. 곤륜을 능멸할 의도도 없었습니다.”

“허! 개인이라는 말로 책임을 피하겠다?”

“그게 아니라…….”

등자평이 현노윤의 화를 가라앉히는 동안, 백무량은 ‘또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이상한 건 그게 다인가?’

등자평이 동문의 사칭을 곤란하다고 말한 데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행방불명이나 죽음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로 치부하고 있는 게 눈으로 보였다.

‘거기에는 분명…….’

연결점이 있다고 생각하던 그때…….

백무량의 뇌리에 한 줄기 생각이 번뜩였다.

“등 선배, 한 가지만 물읍시다.”

“무엇이더냐?”

등자평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환했다.

대노한 현노윤에게 벗어났다는 기쁨인 듯했지만, 글쎄.

그의 생각만큼 백무량은 만만한 후배가 아니었다.

“운산보를 전부터 알았습니까?”

“그게 무슨 헛소…….”

“말이 이상합니다.”

백무량의 눈빛에 힘이 들어갔다.

사파 놈들, 운산보, 쓰레기 등등.

하다못해 곤륜에 있는 운산보라고 하지 대놓고 곤륜 지부라고 하는 청해인은 없다시피 했다.

‘저놈은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백무량은 등자평이 했던 말 중 하나를 떠올렸다.

-내 알기로, 곤륜 지부에는 조현성을 쓰러트릴 자가 없어서 묻는 말이다.

사천에 있는 청성의 도사가 청해의 운산보, 그것도 곤륜 지부를 어떻게 자세히 안단 말인가.

“선배가 어떻게 청해의 사파, 그것도 일개 지부의 무인이 얼마나 강한지 어찌 안답니까?”

“말버릇 봐라! 선배를 몰아가려는 게냐!”

“몰아가는 게 아니라 사실이야.”

“이놈!”

등자평의 얼굴이 붉어지자, 백무량은 냉소를 지었다.

“사파가 자기 현판에 뭐라고 적든, 그걸 인정하는 청해인이 없는 마당에 청성의 도사라는 사람이 곤륜 지부라고?”

혼잣말을 뇌까리듯이, 백무량은 처연함과 분노를 담아 중얼거렸다.

‘대체…… 칠십여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등자평이 진심으로 곤륜 지부라 칭했든, 무슨 꿍꿍이가 있었든 간에 곤륜파를 무시했단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저런 불청객을 상대로도 성질, 하다못해 반격조차 하지 못했을 사문과 현노윤이 너무나도 처량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곳에, 백무량이 있었다.

“곤륜의 존장에게 무례한 것으로도 모자라, 청해를 어지럽힌 사파에게…….”

“네 이놈!”

“닥쳐라, 등자평!”

백무량의 눈동자에 불길이 치솟았다.

곤륜산맥에 도도히 흐르는 운해를 닮은 듯한, 시퍼런 분노가 태청신공의 내공으로 유형화했다.

전신에 치솟은 살기가 등자평에게 향했다.

백련교주에게 당당히 맞섰으며, 후대에 영웅이라 불린 남자의 살기였다.

“……큭.”

등자평으로선 감히 받아 낼 수 없다.

그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제아무리 청성의 이 대 제자일지라도 백무량에겐 범과 마주한 촌로와 마찬가지였다.

현노윤의 기세가 노도라면, 백무량의 살기는 해일.

백무량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단어 하나하나를 짓씹었다.

“처음에는! 동문의 도사를 잃었을 기분을 헤아렸다. 하지만, 네놈이 보인 무례는 도를 넘었다! 하물며 사천에 사는 놈이 청해의 사파를 아는 것 또한 묵과할 수 없다!”

내공을 끌어 올린 등자평이 백무량의 살기에 대항하며 외쳤다.

“감히 곤륜이 청성에게 죄를 묻겠다는 게냐?”

“감히 곤륜이라…….”

분노가 극에 오르면 오히려 초탈해진다고 하던가?

백무량의 표정이 그러했다. 분노의 정념으로 가득했던 그의 얼굴에 감정이 사라졌다.

“나는 차라리 네놈이 변명이라도 해 주길 바랐다. 그래, 그냥 곤륜을 무시하는 무뢰배로 여길 수 있게.”

“……!”

“하지만 네놈은 운산보를 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지.”

백무량의 말에 등자평이 침묵했다.

단순한 침묵일 뿐이었지만, 강호를 겪어 본 백무량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살인멸구를 하려고 드는구나.’

현노윤이 궁금해했던 운산보의 협력자가 청성파였단 말인가.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뽑았다.

“정녕 그랬단 말이냐.”

백무량의 목소리에 복잡한 심경이 담겼다.

그저 청성이 곤륜을 무시한다면, 사문이 약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가볍게 웃어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만일, 정말, 청성이 청해를 먹어 치우기 위해 운산보를 돕고 있는 거라면…… 이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겨우 지부 하나를 몰아내기 위해 가산(家産)인 배를 잿더미로 만들었는데.’

배를 태우던 때, 비통하게 울던 어부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들은 울면서도 백무량에게 염원을 담아 물었다.

정말로 운산보를 몰아낼 수 있는 거냐고, 그게 가능한 거냐고.

이십 년 동안 운산보의 핍박을 덤덤하게 버텨 온 자들의 슬픔과 분노였다.

개중에는 운산보에게 목숨을 잃은 복수심도 있었다.

백무량은 진심으로 한탄했다.

‘겨우, 강호의 변방인 청해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고통으로 내몰았단 말이냐.’

그게 뭐가 중하다고.

백무량의 눈가가 붉어졌다.

백선신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검을 들어라, 등자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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