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3)
“걸작이구나. 걸작이야! 말만 들으면 무슨 강호 십 대 고수인 줄 알겠다! 뭐, 불가능한 것 같진 않다만.”
송우현이 큰 소리로 웃어젖히고는 백무량에게 물었다.
“곤륜파의 명성을 훔치러 올 후레자식까지 직접 처리를 하시겠다, 이거냐?”
“처리라니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오해는 무슨, 정리하겠단 놈이 곤륜 지부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옆에서 본 사람이 나인데…….”
“그거야 그놈들은…….”
“사파라 이거지? 네 말은 이제 중간만 들어도 대충 알아듣겠다.”
“예, 그렇지요.”
도저히 말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다.
백무량이 피식 웃자 송우현의 얼굴에 맺힌 웃음이 도드라졌다.
“전부터 느꼈지만, 기개만큼 실력이 있으니 다행이지. 자칫 잘못하면 현 노야한테 고개도 못 들었을 것이다.”
“가능하니 가능하다 했고, 계획이 있는 걸 있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녀석. 어른한테 이겨 먹으려고 들기는.”
그렇게 말한 송우현이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이게 뭡니까?”
“좋은 거지.”
“호오…….”
호기심을 느낀 백무량은 송우현에게 주머니를 받았다.
그것을 동여맨 끈을 느슨하게 푸니, 청량한 향이 그윽하게 퍼졌다.
전에 먹었던 약병보다 더욱 냄새가 짙었다.
백무량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태청신단을 사느라 전 재산을 쓰셨다지요?”
“누가 초면에 그런 걸 미주알고주알 말해 준다고!”
“거짓말이었습니까?”
백무량의 말에 송우현이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이야 같은 편이니까, 서로 몰랐던 때는 조용히 넘어가자고. 내가 미안하니까 이런 것도 퍼 주지 않느냐?”
“앞으로는 진실하게 대합시다.”
“아이고, 내가 저런 꼬마한테 훈계나 듣다니. 늙어서 서럽지…….”
“장난인 거 압니다.”
그를 가볍게 무시한 백무량은 주머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여러 약재가 뒤섞여 있었는데, 기혈의 기틀을 닦는 데 필요한 것들이었다.
하나하나는 귀하지 않으나 적절히 섞는다면 몇 곱절의 효능을 볼 수 있었다.
‘태청신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당금의 곤륜파에 가장 필요한 물건이기도 해.’
현종휘를 비롯해 앞으로 입문할 도사가 취한다면 내공의 운용이 훨씬 편해지리라.
백무량은 송우현이 새삼 달리 보였다.
“이걸 어떻게 알고 가져오신 겁니까?”
“객잔에서 말하지 않았느냐. 은인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고. 그러다가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인 셈이지.”
그는 품 안에서 또 다른 주머니를 꺼냈다.
“이건 네 것이다.”
“정말요?”
백무량의 물음에 송우현이 눈을 굴렸다.
“저건 곤륜파를 위해 가져온 거고, 이건…… 그러니까, 곤륜 지부를 없앤 보답이라고 하자.”
‘저번에 준 약병이 그 보답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백무량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방금 거짓말을 했었냐고 놀렸는데, 또 딴지를 걸었다가는 송우현이 토라질지도 몰랐다.
“어떤 보답입니까?”
“눈이 없느냐?”
“거, 노인네 성질 하곤.”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답한 백무량이 주머니를 열었다.
그곳에는 척 보기에도 잘 만들어진 칼집이 있었다. 여기가 청해임을 고려하면 지역에서 꽤 유명한 무두장이인 듯했다.
“전에 보니 칼집이 많이 헤져 있더구나.”
송우현이 백선신검을 곁눈질했다.
동굴에서 수십 년 동안 방치되면 칼집이 습기에 눌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사정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눈썰미가 얼마나 예리하면 이런 걸 준비한단 말인가.
백무량은 송우현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쓰겠습니다.”
“아이고, 이제야 인사를 받아 보네.”
어깨를 으쓱인 송우현이 현씨 조손이 있는 안채를 흘낏 바라보았다.
“손아귀에 닿는 대로 줬는데, 어때? 먹고살 만하다더냐?”
“넘치지요. 특히 어린놈이 좋아서 죽으려고 합니다.”
“요놈! 네놈도 애가 아니더냐?”
송우현이 주먹을 쥐었다가 펴고는 백무량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강호에 있는 도사가 돌아오려면 적어도 삼십 일은 넘게 걸릴 거다. 그사이에 운산보가 쳐들어오면 어쩔 생각이냐?”
“언제 제가 그들을 기다린다고 했습니까?”
백무량의 말에 송우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말이었다.
“강호에 흩어진 곤륜 출신의 도사 없이, 뭘 어쩌겠다고?”
송우현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백무량은 대답하기 전에 백선신검을 그에게 선물 받은 칼집에 넣었다.
착 달라붙는 질감이 좋았다.
앞으로 검술을 펼침에 있어 감각이 흐트러지진 않을 것 같았다.
그제야 백무량이 송우현을 바라보았다.
“청성과 공동의 도움으로 부강해진다면 언젠가는 갚아야 할 빚이 됩니다. 하물며 첩자가 침투할 가능성도 있지요. 저는 그런 곤륜파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곤륜이 청해의 패자로서 자립하기 위해선 그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지요.”
호흡을 고른 백무량, 곤륜파의 영웅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청성과 공동에 보낸 전서구로, 강호의 이목이 쏠렸을 때, 운산보주의 목을 벨 겁니다.”
“……뭐?”
질 나쁜 농담을 들었다는 듯, 송우현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십 년 동안 청해에 자리를 잡은 운산보를 아무런 도움도 없이 상대하겠다니? 하물며 운산보주의 목을 벤다?
자살 행동이었다.
그에게 닿기도 전에 수백의 무인과 연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송우현의 눈동자에 번진 우려와 불신에 백무량은 대답했다.
“난 이미 곤륜 지부를 상대하며 삼십을 동시에 상대했습니다.”
“여긴, 미친놈아! 변방의 지부고! 서녕엔…….”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요.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닐 겁니다. 곤륜의 무학에 능히 그러할 수 있는 답이 있습니다.”
태청신공을 운용하니 백선신검에 시퍼런 검광이 번뜩였다.
내공을 머금은 검광은 이윽고 검기가 되어 곤륜산맥 전역에 번진 운해를 흩어 낸다.
천지간의 결을 따라, 구름과 바다의 흐름을 빗겨 내듯이.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후웅!
그러자 검로를 따라 운해가 양옆으로 갈라졌다. 하늘을 먹어 치운 층운이 스스로 길을 열어 주는 듯했다.
‘……허!’
송우현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과거에 보았던 곤륜파의 도사들과는 천양지차였다.
아니, 비교하는 것조차 불손했다.
자연히 그의 목소리가 엄숙해졌다.
“이게 네가 말하는 답이더냐?”
“지금 보일 수 있는 답은 여기까지지요.”
“……과연.”
앞으로 더 많은 걸 보여 줄 수 있다는 건가.
송우현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지금 당장은 운산보와 대적하기보다 다른 문파에 빚을 지는 게 어떠냐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부드러움을 이기려는 강함인가.’
과거에, 송우현은 부드럽고 선한 도사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었다.
하나 지금은, 꺾이지 않는 강인함을 지닌 도사와 마주하고 있었다.
두 도사 모두 그림에 있는 사람과 판박이였다.
‘우연인가, 아니면…….’
잠시 고민하던 송우현의 눈동자가 별안간 밝아졌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한번 그에게 걸기로 한 이상, 괜한 고민은 행동만 느려질 뿐이었다.
“시일은 정했느냐?”
“운산보주가 습격당했으니 그쪽에서도 무언가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백무량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일단은 그쪽을 지켜보지요.”
***
“오해한 모양이네, 미안하게 되었다.”
……운산보주를 습격한 고수가 갑자기 떠나며 한 말이었다.
그가 상처 부위에 붕대를 감으며 부하에게 물었다.
“청해 바깥으로 나간 적이 있더냐?”
“없습니다.”
“상단을 습격하거나 전서구를 죽인 적은?”
“습격한 적은 없었고, 전서구는 죽일 여유가 없었습니다.”
“여유가 없었다니?”
“그게…… 바깥에서 백의를 입은 노인이 난장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래?”
운산보주의 눈동자에 진한 파문이 일었다.
자신이 흑의의 노인과 싸우는 동안, 바깥에선 백의의 노인이 있었던 모양이다.
상황을 정리한 그가 부하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보냈는지 파악했느냐?”
“처음에는 곤륜 지부를 습격한 곤륜을 의심했습니다만…….”
“자기 밥줄도 챙기기 힘든 놈들이 어찌 고수를 시켰겠느냐.”
부하를 차가운 목소리로 꾸짖은 운산보주가 서쪽을 바라보았다.
“됐다.”
“예?”
“노인은 이미 떠났고, 나는 살아 있다. 서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단 말이다.”
서쪽을 바라보던 운산보주의 눈가가 좁아졌다.
“한데…… 다 죽은 줄 알았던 노루 따위가 발버둥을 치고 있구나.”
강렬한 분노가 담긴 시선이었다.
***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백무량은 송우현에게 얻었던 태청신단과 영약을 모두 전신에 녹였다.
‘이제 안심하고 수련할 수 있겠군.’
하단전에 그대로 두면 삼단전의 균형이 깨질 터였다.
무엇보다, 무학의 수련도 중요하지만 중단전과 상단전을 이용한 심상 수련도 중요했다.
‘물론, 내 마음대로 하진 못하지만.’
의지와 염원이 극점(極點)에 이르는 의념.
그렇게 심상에 이르러야만 백무량은 검해와 마주할 수 있었다.
‘아직은 물결이 고작인가.’
백무량은 가로로 기울어져 흐르는 폭포 앞에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백련교주에게 마지막으로 펼쳤던 일 초가 파도였다면, 지금은 물결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단념하지는 않았다.
‘반복하다 보면 도달하게 되어 있어.’
천부적인 재능 이전에 숙(熟)하게 익히느냐의 문제였다.
심상이란 외공이나 내공처럼 높은 경지의 무공으로 단숨에 취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부단한 노력을 무학에 쏟고, 그것을 실체화하려는 의념이 중요했다.
“하압, 합!”
심상에 불과할지언정, 현실보다도 전력을 다해서.
백무량은 폭포 앞에서 곤륜파의 무학을 쉼 없이 펼쳤다.
이렇게 수련하다 보면 기력이 떨어지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뢰할 만한 동생이 있었다.
“현사조님, 저녁이에요.”
현종휘가 어깨를 두드리자 백무량이 심상에서 깨어났다.
“벌써?”
“네. 할아버지가 빨리 모시고 오래요.”
“둘이서는 편하게 말해도 된대도.”
“그러다가 나중에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실수하면 어떡해요…….”
“녀석.”
백무량이 현종휘의 뺨을 쭉 잡아당기던 그때였다.
“이보게,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나!”
현노윤의 불쾌한 음색이 백무량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와 동시에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백무량은 그 기척과 감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청성의 선배십니까?”
“네가 그 소문이 자자한 곤륜신성이더냐?”
청성의 도사, 송학검 등자평이 무표정한 얼굴로 백무량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