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재인(崑崙在人) (1)
심상에서 벗어나 허리를 곧추세우니 밤바람이 뺨을 때리고 있었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른 걸까?
적산에게 선전포고했던 약속마저 심상과 함께 흘러가 버린 건 아닐까?
백무량은 두 눈을 끔뻑였다.
‘……아니, 한 시진 정도 남았네.’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이 답을 말해 주고 있었다.
‘검해와 마주해서 그런가?’
언제까지 갈진 모르지만, 다가올 싸움에 큰 도움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한 백무량이 팔을 휘돌렸다.
뿌드득.
오랫동안 경직되었던 근육이 풀리니 기분이 개운해졌다.
“……하하.”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오늘처럼 높은 성취를 이룬 게 얼마 만인지,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적산과의 전투가 아니었다면 한자리에 죽치고 앉아 얻은 걸 점검했을 터였다.
검해.
존재만 어렴풋이 느낀 상승의 경지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으며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았다.
‘단기간에 도달할 순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가능할 거야.’
어쩌면 강호 십 대 고수보다 더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피식 웃은 백무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생각해 봐야 허황한 꿈이요, 할 일을 미뤄 두고 하는 망상에 불과했다.
한 시진.
그 정도면 판을 만드는 데 시간은 충분했다.
백무량의 시선이 송우현이 있는 산하객잔으로 향했다.
***
“정말 괜찮은 겁니까?”
한 어부가 송우현에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곤륜 지부 전체가 백무량을 죽이러 떠났는데, 돕질 못할망정 그걸 구경하라니?
하물며 몇몇은 아예 싸우기 직전에 청해를 떠나란다.
상대가 ‘그’ 송우현이니 참는 것이지 다른 상대였다면 열불을 냈을 상황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송우현은 담백한 목소리로 답했다.
“운산보가 소문을 수습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처리해야 하네.”
“하지만…… 그 아이는…….”
“걱정하지 말게.”
송우현의 말에 어부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껏해야 열두세 살이나 되었을 법한 아이가 죽게 생겼는데 속 편한 소리를 하냐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송우현의 속내는 달랐다.
‘그놈, 은인의 연자 아니랄까 봐.’
어찌나 맹랑한 말을 하던지.
송우현은 백무량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곤륜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눈을 빛내는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송우현이 어부의 어깨를 두드렸다.
“언제고, 내가 부탁하면 의심하지 않고 믿어 달라고 하지 않았나?”
“송 형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어부가 한숨을 내쉬었다.
촌락에서 잔치를 한 까닭도 송우현이 모든 인원을 불러모으란 이유였다.
“몰래 숨겨 놓은 배로 움직이겠습니다.”
“잘했네.”
송우현이 씩 웃었다.
배라면 자신이 보낼 전서구 외에도 다른 지역에 소식을 전하기 용이할 터였다.
그렇게 되면 강호도 알게 되리라.
곤륜에 사람이 있음을.
청해에 부도덕한 문파가 자리를 잡고 있단 사실을.
‘뭐, 백 가에게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듣는 사람이 적어야 비밀이 유지되는 법인데.
송우현은 백무량이 있을 청류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무사히 돌아오너라.”
은인이 남긴 그림과 같은 눈을 가진 아이.
그에게 있어 백무량은 말년의 희망이었다.
***
지금의 백무량은 어렸다.
태청신단과 백선신검을 얻고, 내공의 기연을 얻었다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무쇠로 만들어진 인간이 아닌 이상 어린 몸으로 연전을 펼친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불굴의 정신이 있었다.
비단 검해의 깨달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사부, 태청선 주자령을 쉽게 꺾은 백련교주와 사투를 벌인 건 오로지 백무량의 의지가 있어서였다.
그 의지는 어려진 지금이라 해도 여전히 백무량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곤륜파가 몰락한 이래로 도대체 몇 명이 불행해졌는가?’
현씨 조손, 송우현, 운산보에게 고통받는 청해인.
그들의 면면을 떠올린 백무량이 미간을 찌푸렸다.
운산보가 대두된 게 십구 년 전이라지만, 그동안 속앓이가 없었을 리 없었다. 불행은 연속되기 마련. 알게 모르게 청해인을 괴롭힌 왈패 집단 또한 있을 터였다.
‘그들이 모인 게 운산보겠지.’
이제는 그 순환을 끊어야 할 때였다.
백무량은 행낭에서 화섭자를 꺼냈다.
치익!
화섭자에서 튄 불똥이 모아 둔 나뭇가지에 옮겨붙자, 매캐한 연기가 하늘로 활활 올라갔다.
그것을 올려다보던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가볍게 쥐었다.
가죽이 손바닥에 쩍 달라붙는 감각이 좋진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만들어 주었다.
곧 싸움이 일어난다.
“저기에 있다!”
연기를 보고 온 건지, 수십 명의 무인이 달려오고 있었다.
백무량은 무심한 시선으로 무인의 숫자를 세었다.
‘삼십 명 정도인가.’
저들이 한 명씩 싸워 줄 리 만무하다. 어쩌면 나무 위에서 암기를 던질 인원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온갖 어려움이 백무량을 덮쳤다. 강호의 호사가가 보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일전이라고 평할 터였다.
그러나 물러나선 안 되는 싸움이 있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구천검의 과거와 사형 주백천이 남긴 안배가 있었다.
백무량이 어깨를 펴곤 숨을 가다듬었다.
휘르르…….
구름의 운행처럼, 고요하지만 깊은 흐름이 전신을 맴돌았다.
수십 번 맴돈 숨은 작은 폭풍이 되어 턱까지 올라왔다.
“오라!”
백무량의 외침이 들을 내리쳤다. 고개를 들었던 잡풀 따위가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꺼꾸러졌다.
반대로 고개를 쳐드는 자 또한 존재했다.
“어르신에게 오라 가라 하느냐!”
대도를 짊어진 사내, 적산이 누런 이를 드러냈다.
호걸과 같은 인상에 살기가 시퍼런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부하를 잃은 원한인가? 아니면 자존심의 상처 때문인가?
사실, 알 필요는 없다. 무인의 싸움에서 분노의 이유란 불필요한 법이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적산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야말로 노도와 같은 기세로 신법을 극성으로 펼친 듯했다.
하지만 백무량의 시야에서 그는 정물(靜物)과 같았다.
심상에서 본 폭포, 그 끝에 있던 검해와 비교하면 움직이느니만 못하다.
‘여기서 끝을 봐야겠군.’
백무량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전신을 휘도는 숨의 티끌을 떼어 용천혈로 인도했다.
그것은 적산이 익힌 근본 없는 신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운중용형보의 공타식(空打式).
내공이 부족하여 펼치지 않았던 곤륜의 절기가 세상에 드러나니.
쩌억!
메마른 땅이 갈라지며 백무량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폭발적인 기세를 이기지 못한 앞섶이 걸레처럼 해졌다.
그걸 본 적산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발로 허공을 때리면서 움직인다는, 상식에 벗어난 광경이 그의 눈동자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공타식을 처음 본 무인이라면 당황할 수밖에 없으리라.
‘내 초식이 더 빨라.’
백무량은 그 반응을 예상하였기에, 백선신검으로 팔 자를 그렸다.
삼절광식의 삼 초, 분광검결(分光劍訣)이 적산에게 휘둘러졌다.
“……이게 무슨!”
적산이 뒤늦게 대도를 뽑았다.
그의 눈가에 경악이 들어찼다.
그저 애새끼라고 여겼던 놈이 자기보다 빠를 뿐만 아니라, 발검의 순간까지 놓칠 정도란 말인가?
자존심이 상한 적산은 내공을 전력으로 운용했다. 그러자 시뻘건 기운 따위가 대도에 휘감겼다.
“뒈져라!”
적산의 대도가 세로로 휘둘러졌다. 검법이 아니라 도축에 가까운 일격이었다.
하지만 단순하기에 강한 것도 있기 마련이다. 청류강 때와 비교하자면 세 배. 백무량은 대도에서 강한 압력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힘에서 밀리게 된다.
직감이 보낸 경고에 백무량이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카앙!
대도와 백선신검이 부딪치니 불똥이 일었다. 적산의 빈약한 내공 수위를 타고난 힘이 받쳐 준 셈이었다.
그 일 합으로 적산은 깨달았다.
‘이놈, 언제 이렇게……!’
청류강 때만 해도 승리를 점쳐 볼 만하지 않았던가!
겨우 이틀 사이에 이만큼 성장했다면, 여기서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놈이 운산보주마저 넘어설지도 모른다.
그렇게 투지를 다지는 적산에 비해 백무량의 내심은 단순했다.
‘힘이 부족한가?’
싸우는 와중에 잡생각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어떻게 해야 상대를 빨리 죽일지 고민하기에도 바쁘다.
고개를 갸웃거린 백무량은 전보다 더 강한 힘으로 내리쳤다.
“……큭!”
적산의 자세가 조금 낮아졌다.
그걸 본 백무량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백선신검을 휘둘렀다. 아무런 묘리도 담기지 않은, 단순히 마구잡이로 내지른 것에 불과했다.
차이가 있다면 힘이 조금씩 더 강해지고 있다는 정도.
그것뿐이었지만 적산의 손아귀가 피로 젖어 들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대장, 뒤로 물러나십쇼!”
백무량의 양옆에서 칼이 쇄도했다.
적산과 함께 온 곤륜 지부의 무인 전원이 차륜진을 구성한 듯했다.
백무량이 여태껏 마주한 무인들과는 달리 합격의 기본을 아는 놈들이었다.
“귀찮게 굴기는!”
하지만 주백천의 안배를 취한 백무량은 청류강 때와는 경지가 달랐다.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휘두를 때마다 사지 중 하나가 날아가고, 아차 하는 순간 목이 날았다.
서른의 무인이 무용했다. 심지어 나무 위에서 날리는 암기조차도 귀신처럼 쳐 냈다.
‘곤륜의 도사가 저렇게 강했던가?’
아니, 저런 속가 제자가 강호에 남아 있던가?
적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대로 저놈들이 뒈지게 두고, 서녕으로 도망갈까?’
고뇌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사실, 사파 무인에게 의리란 크게 의미가 없었다.
“하아, 씨팔.”
적산의 시선이 안섶에 넣어 둔 폭혈단으로 향했다. 요사스러운 눈깔의 남자가 준 물품. 먹으면 단기간에 강해지지만, 칠공이 터져서 죽는 환약이었다.
한숨을 내쉰 그는 폭혈단을 피에 젖은 손아귀에서 굴려 댔다.
그렇게 고민하는 와중에도 부하는 시시각각 죽어 나가고 있었다.
‘저 괴물 같은 도사 놈.’
어린 외견임에도 살인에 일가견이 있었다.
하기야, 저렇지 않으면 객잔에서 그런 칼자국을 낼 리가 없었다.
그래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 열두세 살 정도의 소년에게 곤륜 지부 전체가 털렸다는 것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저놈에게 죽은 부하는 또 몇 명이던가…….
그 생각에 적산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 새끼한테 죽느니, 차라리 자살하고 말지.”
이걸 먹었던 삼류가 검기를 이룬 일류를 상대로 몇십 초를 버텼으니, 과연 자신은 어떨까?
히죽 웃은 적산이 폭혈단을 삼켰다.
“……!”
두근두근, 하는 소리와 함께 적산의 혈맥이 두세 배는 늘어났다. 그와 동시에 머리가 좌우로 쪼개지는 통증이 일었다.
그의 시야가 붉게 물드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크으, 크으윽!”
적산이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리자 부하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프면 걸리적거리지 말고 꺼지쇼, 대장.”
“이놈!”
갑자기 고함을 내지른 적산이 대도를 휘둘렀다.
퍼억!
살풍경한 모습에 백무량의 눈동자가 커졌다.
“괴력난신이 임한 게 아니고서야.”
그렇잖아도 거한인 적산의 몸이 붉게 달아올라선, 팔 척 장신의 금강역사와 같았다.
그걸 본 백무량은 숨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