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0화 (20/275)

백선신검 (7)

백선신검을 쥐자, 오래된 가죽 특유의 감촉이 손바닥에 진득하게 남았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여기저기 녹이 가득 슬어 있었다. 칼을 맞대기는커녕 돌에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곤륜파 사조전에 있었던 유물의 상태 그대로였다.

‘하긴 수백 년은 족히 된 물건이니, 어쩔 수 없나.’

이게 어찌 새로운 삶에서 도움이 된단 말인가.

백선신검을 들여다보던 백무량은 오른손으로 녹이 슨 칼날을 매만졌다.

그 순간, 손끝에서 따끔한 감각이 스쳤다.

“뭐야?”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보니 검지에서 핏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녹이 잔뜩 슬어서 종이 한 장 베지 못할 칼날이 어떻게 피부를 베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무량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간, 백선신검의 녹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이건……!”

그제야 그의 시야에 오른 손등이 들어왔다.

태청신공의 공력을 한껏 머금은 운룡이 자그마한 빛을 틔우고 있었다.

그 빛에 닿은 부분의 녹이 떨어지고 있었다.

백무량은 서둘러 오른 손등을 백선신검 곳곳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칼날에서 서늘한 검기가 일렁였다.

피부가 아니라 뼈를 가져다 대기만 해도 잘릴 것 같았다.

“이게 정말 백선신검이라고?”

백무량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녹이 다 벗겨진 백선신검을 바라보았다.

관리는커녕 방치에 가까웠던 유물이 절세의 보검으로 바뀐 셈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신검을 얻은 협객이 바로 나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 놓고, 저잣거리에 나도는 영웅담이나 떠올리고 있다니.

과거 강호행에서 많은 걸 보고 겪은 백무량이었지만 가슴이 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사형이 남긴 편지와 그가 남긴 안배까지 모두가 완벽했다. 꿈이라면 계속 꾸고 싶은 길몽이었다.

스르릉.

힘을 조금만 주었음에도 백선신검이 가볍게 뽑혔다.

“그래도 가죽은 교체해야겠는데.”

제아무리 운룡일지라도 가죽까지 새것으로 바꾸진 못한 모양이다.

옅은 웃음을 머금은 백무량은 야명주를 담은 봇짐을 어깨에 묶었다.

그러고는 벽을 기어올라 비밀 통로로 동굴에서 탈출했다.

바깥에 나오고 허리를 쭉 폈을 때, 백무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흐른 거지?’

분명 동굴로 들어갔을 때만 하더라도 정오였는데, 지금은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밤이었다.

감각을 되찾기 위해 백무량은 곤륜의 오랜 가르침에 따라 호흡했다.

동굴에서 좁아졌던 시야가 넓어지고, 이제 막 손질한 칼의 쇠 냄새가 인중을 스쳤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모양인데.’

이런 낭패를 겪지 않기 위해 배를 모두 불태우지 않았던가!

백무량의 입술이 바싹 말랐지만, 사실 그의 착각이었다.

단순히 정오에서 밤이 된 게 아니라 이틀의 시간이 지난 것이다.

이를 모르는 백무량은 바닥에 엎드리고는 토벽 끄트머리로 기어갔다.

“크음, 음냐…….”

“……!”

백무량은 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토벽 바로 아래에서 네 명의 무인이 야영을 취하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야.’

백무량의 시선이 모닥불 앞에서 자는 무인에게 향했다.

본래 불침번을 취하고 있어야 할 놈이 눈을 뜨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운산보가 지역의 패자라고 한들 결국 사파 무리란 뜻이다.

‘여기서 제거하느냐, 아니면 이곳에서 물러나느냐.’

전자는 자신의 위치를 알리게 될 것이고, 후자는 안전하게 몸을 내뺄 수 있었다.

여기선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백무량은 자신의 선택에 무엇이 달렸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내빼면 그놈들이 누구한테 화풀이할까.’

어부들이 모인 촌락이 여기서 멀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자신을 찾기 위해 청류강 근처, 곤륜산맥을 탐색하는 조원을 늘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씨 조손이 더욱 위험해질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매만졌다.

‘그놈, 엄청 열 받겠는데.’

이곳에 오기 전에도 이미 세 번의 기습을 통해 무인 스물셋을 죽이지 않았던가.

여기서까지 각개격파를 시도한다면 과연 적산이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까?

한쪽 입술을 비튼 백무량이 토벽에서 소리 없이 내려왔다.

‘검뢰벽천.’

좌에서 우로, 내공을 한껏 머금은 검기가 네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모두가 죽었음을 확인한 백무량은 모닥불의 잿가루로 토벽에 몇 마디 글귀를 남겼다.

스슥, 스스슥.

이것으로 그가 바라는 그림이 완성되고 있었다.

***

“이런 미친!”

적산은 추상과 같은 기세로 토벽을 내리쳤다.

그곳에는 어린 곤륜도, 백무량이 남겼을 듯한 글귀가 남겨져 있었다.

-이번에도 잘 놀다 간다.

여기까지 와서도 농락당했다는 굴욕이 적산의 몸을 휘감았다.

몸이 달 대로 단 적산은 이를 빠득 갈며 아래 글귀를 노려보았다.

-이틀 뒤 오시(午時 : 11~13시)에 연기를 낸 곳으로 찾아와라.

이게 함정이냐.

그건 이제 중요치 않았다.

어떻게든 그놈이 목숨을 구걸하는 꼴을 보아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모두…… 손님을 맞을 준비를 단단히 해라!”

적산의 노호에 부하들이 직감했다.

어쩌면, 만에 하나라도 소년에 의해 적산이 죽는다면.

곤륜 지부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겠다고.

***

적산이 이를 가는 동안 백무량은 줄곧 수련에 몰입하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위해.

그것은 곤륜파가 운산보 곤륜 지부를 일소하며 세상에 곤륜이 살아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운산보주가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지부 따위에 곤륜을 붙인 건 청해인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였을 거야.’

운산보가 곤륜파를 이겼다.

단순히 이겼을 뿐만 아니라 그 일대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유치한 짓이지만…….’

이만큼 간단명료한 장면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정체 모를 거대 문파가 운산보를 돕고 있으니 알 만한 지식인도 입을 꾹 다물게 된다.

백무량은 그 연쇄를 완전히 부수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적산을 죽이는 것으로 끝내선 안 됐다.

‘할 거라면 철저하게, 그들을 압도적으로 꺾어야 해.’

등정로 앞에서 구름을 용의 형상으로 빚어냈을 뿐만 아니라, 일곱 무인을 단숨에 절명시킨 힘.

검해로 적산과 휘하 무인을 몰살하는 청해인이 보고, 바깥에 알려진다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곤륜파가 멸문하지 않은 채 청해에 존재하고 있다!

그 사실이 무림맹을 움직이게 할 테고, 운산보의 움직임이 둔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수장인 운산보주는 당연히 옴짝달싹도 못하게 될 터였다.

‘바깥에 소식을 알리는 건 송 노야한테 일임해야겠지.’

백무량 개인이 아니라 곤륜파가 다시 부흥하기 위한 큰 그림이었다.

지금도 수련에 매진하고 있을 후인(後人), 현종휘를 위해서라도 반석을 닦아 놔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현노윤이 평생 품은 업이기도 했다.

의지(意志)와 염원(念願).

처음 깨어난 뒤 보름 동안, 자신에게 그런 마음은 없었다.

원치 않은 방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칠십여 년이 지난 마당에 무얼 하겠냐는 공허와 회한이 구천검 백무량을 먹어 치웠다.

하면 지금은 어떠한가?

백무량은 그 답을 떠올리기 위해 눈을 감았다.

‘나는 곤륜파의 도사야.’

구천검은 백련교주에게 죽었으나, 백무량은 살아 있음을 안다.

살아 있는 이상, 남아 있을 곳이 있는 이상.

백무량은 구천검을 잊고 그보다 높은 곳으로 가야만 했다.

‘의념을 그림처럼 펼쳐 놓은 곳이 바로 심상일지니.’

마음을 의념(意念)에 집중시키니 백선신검을 붙잡은 감각마저 점차 희미해졌다.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득한 세상이 펼쳐진다.

쏴아아…….

폭포수가 세차게 떨어지며 물보라를 그렸다.

백무량이 만드는 심상은 늘 그러했다.

구름이 항상 머무는 곤륜과는 달리, 그는 항상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심상을 그렸다.

그랬다. 백무량은 늘 곤륜을 답답해했다.

강한 힘을 가지고도 청해에 머무는 까닭이, 구파일방의 말석처럼 취급받으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마교와 싸우다 자멸하는 엉망진창인 역사까지, 전부.

‘지겨웠다. 아니, 지겨워했었지.’

백무량은 폭포 앞에서 검을 들었다.

그 검은 백선신검에 비하면 평범하다 못해 날마저 무뎠다. 아주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예전의 구천검이 강호를 주유할 때 쓰던 검이었다.

구천화우검을 전승했다는 이유만으로 명성이 붙었다. 군소 사파를 손봐 주며 별호에 협(俠)이 붙고 객(客)이 뒤따라왔다.

그것이 검을 무디게 만들고, 관리하지 않게 만들었다.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어야 했다.

만일 최선을 다했다면 백련교주에게 패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이 공허와 회한을 불렀고, 새 삶의 보름을 무용하게 했다.

그러나 지금의 백무량은 안다.

‘구천검은 허명.’

별호를 버린 도사가 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후회는 과거와 함께 사라졌으니.’

미련을 버린 남자가 폭포를 노려보고는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구천화우검의 이 초, 창천명월(蒼天明月).

의념을 머금은 검기가 폭포를 갈랐다.

콰아아!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던 폭포수가 한순간 끊어지더니, 조금씩 옆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마땅히 위에서 아래로 흘러야 할 폭포가 허공을 부유하는 게 정상은 아니었다.

하나 백무량은 만족했다는 듯이 씩 웃었다.

‘길은 가까스로 열었나.’

백무량이 고개를 돌리니 옆으로 흐르는 폭포가 거대한 강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 강의 끝에는 분명 바다가 있을 터였다.

백련교주와의 싸움에서 보았던 그 바다, 검해가.

지평선을 지켜보던 백무량은 문득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하, 하하하.”

평범한 칼이 어느새 백선신검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사(奇事)라면 기사지만, 이제는 그런 거로 놀랄 것도 없었다.

백선신검을 들여다보던 백무량이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 그랬구나!”

사형, 주백천이 글귀를 남겼었다.

-백선신검은 앞으로 네가 새로운 삶을 살아감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게다.

백선신검이 어떤 도움이 되느냐, 처음 편지를 읽을 땐 몰랐었다.

하나 심상 수련을 통해 백무량은 알 수 있었다.

“검해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였어! 사형은 이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그래서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챙겨 줬던 거겠지?”

백무량은 말을 빠르게 쏟아 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백선신검뿐만 아니라 손등의 운룡 또한 사형이 안배한 대로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러다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사형이 말했었지. 천리를 거슬러서라도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이 있다고…….’

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사형이 순리를 어기게 한 걸까?

백무량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경각심이나 불안, 두려움 따위는 절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 백무량이니까.”

언젠가는 사형, 당신을 찾아가 직접 물으리라.

백무량은 눈을 떠 심상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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