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9화 (19/275)

백선신검 (6)

“구름의 운행이란 항상 같은 게 아니란다.”

“그게 뭔 소립니까? 구름의 운행은 도도히 흐른다며요?”

주자령의 말은 지금까지 쌓아 온 백무량의 무공 체계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주자령은 알고 있었다.

고수란 언젠가 자신이 쌓아 온 체계를 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좁은 우물에서 고일 뿐이었다.

주자령은 백무량이 우물에서 벗어나 커다란 하늘을 목도하길 바랐다.

‘지금은 그저 혼란스럽겠지만, 언젠가 이해하겠지.’

주자령은 백무량의 오성을 신뢰하고 있었다.

“구름은 때때로 비를 뿌리며, 번개를 때리고, 돌풍을 몰아온다. 그와 마찬가지로 도 또한 다르다. 나무꾼에겐 나무꾼의 도가 있기 마련이고, 푸줏간의 백정에게도 우리와는 다른 도가 있는 게지.”

주자령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알겠느냐?”

“모르겠는데요.”

“그 나이에 알기엔 어려운 법이지.”

주자령은 백무량의 투정을 귓등으로 흘렸다.

버릇은 없어도 사부의 말은 흘려듣지 않는 제자였다. 언젠가는 자신이 한 말을 깨달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곤륜산에 이는 높은 바람은 어떻겠느냐?”

“아, 몰라요.”

그 뒤로 팔십여 년이 지난 지금.

백무량은 주자령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

“나도 나만의 도가 있는데 말이야.”

그 길은 죽기 직전에 깨달았다.

검해.

곤륜의 무공으로 이루어진 검해를 향해 정진할 뿐이다.

백무량은 두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돌풍의 정중앙으로 걸어갔다.

찌직, 찌지직!

양팔의 소매가 찢어지며 붉은 피부가 드러났다. 돌풍은 그야말로 검수지옥(劍樹地獄). 동굴 구석에 고인 바람이 연약한 피부를 헤집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차분히 공력을 운용해 음기 사이를 파헤쳤다.

외상과 내상. 양쪽에서 생긴 큰 고통이 백무량을 덮쳤다.

‘태청신단에 비하면 별거 아니야.’

한 걸음, 한 걸음이 억겁과 같다. 뒤집힌 피부는 뻘게지다 못해 피가 흐를 지경이다.

그러나 백무량은 끝끝내 인내했다. 눈을 깜빡이거나 숨 한번 들이쉬지 않았다.

돌풍 중앙에 선 백무량은 심상을 넓혔다. 찰나가 수없이 겹치며 늘어졌다.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구름이었다.

천하를 뒤집을 구름. 천둥과 폭풍을 품은 첩운(疊雲).

백무량은 그 심상을 꺼냈다.

백련교주와 싸웠을 때 느낀 검해의 감각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쿵, 쿵!

한 점의 진기가 대맥을 내달렸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전신을 가득 채운 음기가 쉬이 자리를 내줄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구천화우검의 검형(劍形)을 취했다.

이유는 몰랐다. 당연히 그래야 하니, 그랬을 뿐이었다.

‘……아.’

백무량은 깊은 충만감을 느꼈다. 심상에 검해의 잔영이 일렁였다. 손을 조금만 뻗으면 닿을 것처럼, 검해의 잔영은 얄밉게 움직였다.

그래, 마치 구름의 운행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도도히 흐르는 그 운행처럼.

콰콰콰콰!

천둥과 폭풍이 담긴 첩운이 순식간에 돌풍을 먹어 치운다.

무수한 굉음이 돌풍을 휘감았다. 동굴이 무너지기라도 할 듯 맹렬한 파괴음이었다.

그러나 정작 정중앙에 있는 백무량의 안색은 편안하기만 했다.

‘좋다, 좋구나.’

백무량이 검무를 추자, 첩운 또한 춤을 추듯 흔들렸다.

그토록 맹렬했던 파괴음도 점차 가라앉았다. 곤륜의 무학에 길들여지며 스스로 고개를 숙인 것과 같았다.

스르르르…….

이빨을 감춘 돌풍이 백무량의 온몸을 감싸더니, 삽시간에 손등의 운룡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돌풍이 백무량의 단전에 자리를 잡아 가기 시작했다.

“…….”

정작 백무량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구천화우검으로 이루어진 검무를 이어 갈 뿐이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검을 늘어뜨린 백무량은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차가운 바람이 일천에 가까운 세맥까지 휘돌았다. 곳곳에서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괜찮았다.

그보다 훨씬 큰 경쾌함이 단전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단순한 내공이 아니다!’

백무량은 섬전과 같은 속도로 검을 출수했다. 분광검의 삼절광식이 허공을 수놓으며 바람을 갈랐다.

동공을 펼치자 단전의 내공이 꿈틀거렸다.

“하, 하하…….”

깜짝 놀란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원래 있었던 공력에서 오 년이 늘어났다.

어디 그뿐이랴?

휘르르…….

검봉에서 한줄기 바람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주 약소한 힘에 불과하나, 무언가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화산파에서 말하는 매향지경이나 공동파 복마검의 대주천(大週天)처럼.

‘곤륜파의 유실된 무학 중에서 그들에게 비견되는 무학이 있었다는 걸까?’

검해를 마주한 이래로, 보다 높은 경지를 올려다보게 되는 듯했다.

어쩌면 사부 주자령조차 이루지 못했던 태청신공의 대성에 대한 실마리도 검해에 있는 게 아닐까.

백무량은 진지한 표정으로 검봉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당장 이뤄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곤륜 지부에서의 싸움에서 느끼지 않았던가?

‘시간이 필요해.’

근골이 완성되었다고 한들 내공과 신체는 아직 싸움에 적합하지 않았다.

태청신단과 오 년의 공력이 늘어났어도 마찬가지였다.

백무량이 바라보는 목표는 낮지 않았다.

‘곤륜파의 부흥과 사형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부 주자령을 죽이고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패배를 안겨 준 자.

백련교주.

그를 포함한 백련교 모두가 곤륜산에서 하산한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백무량에게 늘 불안으로 자리했다.

‘물론 무림맹이 바보는 아니지.’

곤륜산에서 사라진 백련교를 찾으려고 많은 시간과 인력을 투자했을 테고, 수십 번의 재고 끝에 ‘곤륜파에게 패배했다’는 판단을 마쳤을 터였다.

하지만 백무량의 생각은 달랐다.

수없이 마교와 싸움을 벌였던 곤륜파의 도사였고, 실제로 백련교주와 마주했던 마지막 영웅이었다.

그런 백무량의 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백련교는 강호 어딘가에서 존재하고 있으리라.

“내 착각이라면 좋으련만.”

혼잣말을 중얼거린 백무량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려진 몸으로 이곳을 거닐자니 옛 추억에 차츰 젖었다.

사형과 뛰놀고, 그러다 넘어져서 울어 버렸다는 추억.

추억은 빠르게 되감기고 재생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사형이 자신을 앉혀 놓고 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곤륜의 협객이 신검(神劍)을 얻게 되는 이야기.

“나이도 먹을 대로 먹어 놓고는, 뭔…….”

그때는 진지하게 들었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고 나니 터무니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자신이 겪은 강호라면 그렇게 흘러가지 않을 테니까.

협객이 신검의 도움을 받다가, 한낱 도리와 자존심 때문에 마인에게 덤볐다가 죽는다. 아니면 다른 문파의 고수에 의해 빼앗긴다.

그런 광경을 몇 번이고 보니 영웅담(英雄譚)을 잊게 되었다.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게 맞겠지만.’

가끔은 그런 영웅을 기다리곤 했었다.

특히 백련교의 난 때 영웅의 등장을 간절히 기대했는데, 지금 떠올리면 그저 웃음만 나오는 일이다.

어째서 백무량 자신이 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는가? 왜 불가능하다 여겼는가?

그런 각오가 있었다면 검해를 완벽히 끌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까?’

백무량은 과거에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사형에게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겠다던 약속.

‘어쩌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되살아난 게 아닐까?’

백무량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망념(妄念)에 불과한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무척 편해졌다.

곤륜파의 부흥과 청해의 평화, 어딘가에서 암약하고 있을 백련교까지. 자신의 어깨에 들러붙은 짐은 많았으나 그렇게까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백무량이라는 도사를 믿어 주는 사형과, 멸문한 사문을 지켜 온 후인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걸음에는 망설임이나 의심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저건가?”

백무량의 시선이 갈림길의 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땅에 꽂힌 백선신검과 낡은 편지가 있었다.

-무량아.

주백천의 서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칠십여 년의 세월을 건너뛴 방랑자였던 백무량은 그 편지 앞에서 과거의 구천검일 수 있었다.

편지가 아니라 사형과 실제로 마주한 듯이 환하게 웃었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백무량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그렇게 된 거요? 왜 멀쩡한 흔적이 사라지냔 말이오, 사형?’

사형의 흔적과 마주한 반가움이 입가에 웃음을 그렸지만, 슬픔이 미간을 찡그렸다.

명예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던 주백천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치는 듯했다.

백무량은 물기 젖은 눈으로 다음 줄을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알아볼 수 있도록 주백천이 꾹꾹 눌러서 쓴 흔적이 인상적이었다.

-부덕한 사형 때문에 사바세계로 돌아왔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느냐? 미안하구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천리(天理)를 거슬러서라도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이 있단다.

“천문을 익힌 건 알았지만, 천리까지 해박하셨던가?”

백무량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어구였다.

뒤이어 그에게 큰 죄책감이 찾아왔다.

무림으로 나간 이후 본산에 들른 적이 없다시피 했으니까.

귀동냥으로 주백천의 학식이 뛰어나단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후우.”

자신은 얼마나 불민한 사제였던 걸까. 백무량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다음 단락으로 넘어간 순간.

백무량의 눈동자가 멎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강호 전역을 돌아다녔다.

“역시!”

백무량이 환하게 웃었다.

전에 예상했던 대로 사형은 샛길을 통해 백련교의 마수에서 벗어난 것이다!

백무량은 서둘러 다음 단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미리 남긴 안배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오해는 하지 말아 다오. 부덕한 짓은 너를 되살린 것 외에는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내가 설마 사형을 의심하겠습니까.”

너무 반가웠기 때문일까.

백무량은 편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마치 대화라도 하듯이 껄껄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마지막 단락으로 눈길이 향했다.

-백선신검은 앞으로 네가 새로운 삶을 살아감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게다. 그 연유는…….

“……!”

백무량의 눈가가 좁아졌다.

편지 끄트머리에 피 얼룩 따위가 묻어 있었다.

다음 줄에는 직전과는 아예 상반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다음 안배를 찾아 주길 바란다.

편지의 내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백무량은 송우현이 말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화산파와 종남, 무당, 보타암. 그리고 이곳까지 총 다섯 개.

-은인께서 남긴 다섯 점의 그림이 각 도문에 하나씩 있지.

“그림마다 안배를 하나씩 준비해 뒀단 건가?”

그 안배들 또한 이곳처럼 자신이 아니고서야 알아볼 수 없는 것이리라.

백무량은 편지를 고이 접어, 품 안에 넣고는 다짐했다.

‘모두 찾아가야겠어.’

그러나 멸문에 가까운 사문을 두고 떠날 생각은 없었다.

백무량의 시선이 백선신검으로 향했다.

“금방 올라가마, 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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