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신검 (5)
외견은 다른 바위와 다를 바 없지만, 표면을 자세히 보면 구름을 잔뜩 머금다 생긴 주름이 있었다.
이 때문에 곤륜파의 제자는 운함석에 운룡대팔식의 연습을 하곤 했다.
주름을 훼손하지 않고 발자국을 남긴다면 오 성을 이뤘다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처음 깨어났을 때 보았던 절벽 또한 그 바위로 이루어진 운함벽(雲含壁)이었다.
백무량이 바위에 손을 대는 순간, 희망찬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백련교의 난이 칠십 년도 넘었는데…… 이 바위가 여기 있으려면 산사태 이후에 옮겼다는 소리잖아?’
적어도 삼십여 년 전까지는 주백천이 살아 있었단 뜻이다.
어쩌면 송우현처럼 지금까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주백천에게 무공의 재능은 없었지만, 그래도, 선약(仙藥)을 복용했다면 장생 정도는 가능할 테니까.
“살아 계시길 비오, 사형.”
백무량은 활짝 웃었다.
칠십여 년의 세월을 격하여 되살아난 뒤,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내가 반드시 찾아갈 테니!”
하나 지금은 위태위태한 곤륜파를 안정시켜야 할 때다.
백무량은 바위를 두 팔로 껴안고는 조금씩 밀기 시작했다.
스릉, 스르릉…….
바위가 움직이면서 잡초 따위가 으깨졌다. 백무량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아주 사소하지만, 추적에 익숙한 자라면 발견할지도 모르는 흔적이었다.
그와 동시에 바위에 가려져 있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
백무량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흔적이 남고 있단 생각이 단숨에 날아가고, 입이 쩍 벌어졌다.
“맙소사.”
야명주.
하나하나의 값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보석이 양쪽 벽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 있었다.
그걸 보자니 백무량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백선신검이 그렇게 값진 보물이었던가?”
벽면에 박힌 야명주라면 호광성에서도 널찍한 장원을 살 수 있었다.
그만한 물건을 내부를 밝히는 용도로 두었다면, 안에 있을 백선신검이 진짜 보물이라는 뜻일 터.
‘내가 모르는 공능이 있었던가?’
동굴 내부로 들어선 백무량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야명주를 매만졌다.
그러고는 하나씩 빼서 봇짐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이 또한 곤륜을 위해 남긴 안배라고 믿겠소, 사형.”
어디엔가 있을 사형에게 두 손을 모아 올린 백무량은 야명주를 모두 챙겼다.
“아, 든든하다. 든든해.”
백무량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횃불에 화섭자를 그었다.
화륵!
불꽃이 붙음과 동시에 좌우로 흔들렸다. 그걸 본 백무량의 미간이 좁아졌다.
“생각보다 둘러볼 여유가 있겠는데?”
바람이 통하고 있지 않다면 불은 제자리에서 대기를 먹어 치우고 있었을 테니까.
‘야명주도 모자라서, 대체 어디에다가 구멍을 더 뚫어 놨을까?’
산사태의 토사를 뒤집어쓴 동굴에 숨구멍을 뚫는다?
그건 솜씨 좋은 장인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백무량은 주백천의 안배에 거듭 감탄하고는 사형이 남겼던 시구를 떠올렸다.
금녀검, 군옥산동유.
일난풍화사, 동방청.
‘금녀검이 군옥산의 동굴에 있고, 서왕모의 노래가 동쪽에 들려온다고 했지.’
군옥산의 동굴은 그림에 그려진 이곳을 말한다.
어린 시절에 주백천과 함께 자주 놀러 왔던 곳이었다.
일난풍화사, 동방청.
이 시구는 그림으로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기억에 틀림이 없다면 이 동굴에 갈림길이 있었다. 아니, 기억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백무량은 주백천이 남긴 안배를 신뢰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그렇게 일각 가까이 걸어갔을까.
“역시!”
백무량이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왼쪽과 오른쪽.
주백천과 술래잡기를 할 때가 저절로 떠올랐다.
백무량이 감회에 잠긴 눈으로 갈림길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바람인가?”
동쪽에서 실낱같은 바람이 느껴졌다.
단순한 착각은 아니라는 듯, 횃불의 불꽃도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고 여겼다가, 큰 화를 입기 마련이지.’
백무량은 야명주로 빵빵해진 봇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봇짐의 무게가 상당한지라, 퉁 하는 소리가 났다.
저벅, 저벅.
백무량은 앞으로 걸어가면서 감각에 집중했다.
산들바람에 불과했던 기류가 점차 거세졌다.
동굴에 고인 바람이 원의 형태로 휘돌고 있었다.
곤륜산맥 어딘가에서 항상 일고 있는 용권풍과 같다.
파앙!
백무량의 소맷자락에서 커다란 소음이 일었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팽팽해진 소매가 으지직거렸다.
“장난치고는 너무 심한 거 아니요, 사형.”
제자리에서 멈춰 선 백무량은 오른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이대로 걸어간다면 가장 연약한 눈부터 짓이겨지고, 살갗이 벌겋게 물들 것이다.
그 뒤는 들을 필요도 없다. 돌풍에 휘말린 사람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기 마련이었다.
‘시험이 있으리라곤 생각했지만…… 사형답지 않아.’
백무량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신이 아는 주백천이라면 사람이 죽는 기관진식이 아니라 안온한 방법을 택했을 테니까.
하지만 거기에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 여겼다.
단적으로.
‘곤륜의 정통 무학을 익힌 고수라면 이 돌풍은 가볍게 돌파할 수 있어.’
문제가 있다면, 지금은 고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격차를 없애기 위해 백무량은 가져온 함에서 태청신단을 꺼냈다.
꿀꺽.
태청신단을 삼키자 청량한 기운이 대맥을 꽉 채웠다.
그것만으로 모자라는지, 대맥에 곁가지처럼 퍼져 있는 전신 세맥으로 치달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백무량은 고통을 참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뒤이어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청량한 기운이 전신 세맥에 쌓인 노폐물을 없애기 시작했다.
막혀 있던 세맥이 강제로 열리는 고통은 몽둥이로 몸을 내리치는 것과 같았다.
하물며 그것이 전신에 걸쳐 동시에 열리게 된다면?
“크으윽……!”
백무량의 눈에 핏줄이 불거졌다. 아무리 입을 틀어막아도 고통 어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고통이 지나고 나면 쾌함이 머릿속을 씻고, 또다시…….
우두둑.
막혀 있던 세맥을 뚫기 위해 청량한 기운이 일보를 전진했다. 이렇게 고통과 쾌함이 반복되니 고통은 매번 생경하게 느껴졌다.
“끄윽!”
백무량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 대단한 벌모세수도 대맥의 노폐물을 없애기만 했지, 일천에 가까운 세맥을 건드리지 않는 법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몸 안에 피 분수를 만들 수 있었다. 아니, 대부분이 그렇게 죽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무림에서 세맥은 기괴한 무공이 아닌 이상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러니까 곤륜파의 장문인이 항상 강호 십 대 고수의 반열에 들었지!’
버틸 수만 있다면 완성된 그릇을 더욱 확장할 수 있다.
백무량이 이를 악물고 버티려 했지만, 고통은 점차 심해졌다.
몽둥이로 때리는 데 그쳤던 게 벌레가 핏줄을 물어뜯는 것처럼 변했다.
찰나에 불과할 시간을 격통이란 놈이 두 손으로 잡아서 늘렸다. 태청신단을 취한 지 일다경밖에 흐르지 않았는데도 한 시진처럼 느껴졌다.
조금씩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
백무량의 의식이 점차 흐려지던 그때였다.
“……이건!”
손등의 운룡에서 환한 빛이 발했다.
순식간에 고통이 멎고, 따스함이 찾아왔다. 백련교주와의 싸움에서 느꼈던 심상 속, 권청(勸請)의 순간이었다.
고통이 극에 달하여 찾아온 것일까, 아니면 태청신단의 효험이었을까?
백무량은 그것을 분간할 수 없었다. 좁쌀만도 못한 힘을 쥐어짜서, 손을 뻗어 볼 뿐이었다.
휘이이-.
손이 안개를 휘저었다. 단순히 그뿐이었다. 검해처럼 뚜렷한 심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이대로 끝인 걸까, 백무량이 속으로 탄식을 흘리던 순간.
“…….”
안개 속에서 눈이 부리부리한 노인이 자신을 뜯어보고 있었다.
삐뚤빼뚤한 수염과 심천(心天)이라 쓰인 도복이 개성적이었다.
백무량은 그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
노인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백무량에게 닿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가, 그런 표정을 하던 그가 입술을 이죽거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다음에.]
외마디 전음이 백무량에게 꽂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백무량은 노인의 경지에 전율했다. 그가 보인 기예는 전음입밀로 설명하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랐다.
내공이나 입술의 달싹거림 없이, 오로지 뜻을 전달하는 기술.
“혜광심어!”
백무량이 깜짝 놀라서 외치자, 노인의 수염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의 얼굴이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뒤이어 운룡의 빛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심상을 뒤덮었던 안개도, 노인의 형상도 모두 사라졌다.
남은 건 가부좌를 틀고 있는 백무량 자신뿐이었다.
“……끝인가.”
진한 아쉬움이 백무량의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다음에라고.’
언젠가는 다시 마주할 날이 있을 것이다.
백무량은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청의 순간이 흐르고 난 뒤, 태청신단은 완전히 몸속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후웅!
주먹을 휘두르니 전보다 몸이 가벼웠다. 그뿐만 아니라 대기의 흐름이 팔뚝에 감기는 듯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전보다 두세 배 이상 강해졌다.’
청류강에서 마주했던 적산의 괴력도 이제 두렵지 않았다.
몸 상태를 확인한 백무량은 눈앞의 돌풍에 시선을 집중했다.
정공법은 운중용형보의 공정식(空停式).
아무리 돌풍이 거세도 잠재워서 흩뜨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걸 썼다간 내공을 모두 소모하고 말 거야.’
바깥에 있을 적의 숫자가 어디 한둘이던가?
하물며 적산이 추가로 증원을 요청했다면 십수 명은 늘어났을 것이다.
가급적이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 채 백선신검을 회수해야 했다.
“후우…….”
뜨거운 숨을 고른 백무량은 자신이 익힌 무학을 회고했다.
구천화우검, 분광검, 유운검, 소청권, 운중용형보, 운룡대팔식…….
천하의 어느 무공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곤륜의 보물이다.
백무량은 곤륜의 무공에 강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사형도 마찬가지였어.’
주백천이라면 반드시 활로를 만들어 두었으리라.
오로지 곤륜의 도사만이 거닐 수 있는 생로(生路)를.
돌풍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백무량이 순간 조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게 있었지.”
백무량은 곤륜의 가르침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