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신검 (3)
청해 서부, 곤륜산맥이 장대히 펼쳐진 지역에 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
운산보의 지부를 휩쓴 고수가 청류강 근방에 몸을 숨겼다.
한데 그 모습이 아이와 같더라.
이 소문을 접한 적산은 진위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포대를 질질 끌고 갔다던 그놈이구나.”
그놈에게 희롱당한 게 자그마치 세 번이다.
운산보주에게 대가리가 깨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화병 때문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죽어 나간 부하 또한…….
쿵!
탁상을 내리친 적산이 강한 살기를 드러냈다.
“준비는 되었느냐?”
“예!”
스물이 넘는 무인이 함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세 번의 급습을 당했으니 사기가 낮아야 당연했다.
하지만 높아진 사기엔 이유가 있었다.
백선신검.
곤륜 지부에서 도망친 아이가 백선신검을 가지고 있었단 목격담 때문이었다.
“백선신검을 얻으러 가자꾸나!”
적산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운산보주에게 백선신검을 바친다면 전에 있었던 실수 이상으로 큰 공을 세우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곤륜 지부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운귀들이 도착하기 전에 얻는 편이 좋겠지.’
부하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운귀 열을 요청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고수라고 해 봐야 겨우 어린놈일 뿐!
게다가 몸을 숨겼다는 건 극심한 상처를 입었단 증거다.
그놈의 은신처를 찾기만 하면 복수와 백선신검을 동시에 취할 수 있다.
적산의 얼굴에 희소가 짙어졌다.
‘그 공을 그놈들과 나눌 순 없지.’
죽은 부하의 원한도 제대로 갚아 주리라.
적산은 내공을 이용해 있는 힘껏 외쳤다.
“가자, 그놈의 사지를 찢으러!”
“예!”
곤륜 지부에서 출발할 때까지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 백무량이라는 것을.
……그리고 요청한 운귀 열 모두 흑백쌍마에게 죽었단 사실을.
***
“괴, 괴물……!”
운산보의 운귀, 단안흉(單眼凶)은 한쪽 눈으로 지옥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촤악!
흑의의 노인이 팔을 휘두르면 칼이 꺾이고 뼈가 드러났다.
옆에 있는 백의의 노인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 속이 더욱 매서웠다.
“끄아악!”
손가락에 실린 시뻘건 기운이 무인을 훑을 때면 뼈까지 갈라졌다. 흑의가 어느 정도 사정을 둔다면, 백의는 서슬 퍼런 살의가 느껴졌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단안흉을 제외한 운귀 아홉이 죽을 때까지 일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거기 외눈깔이.”
흑의의 노인이 말했다.
“너희보다 센 놈은 누가 있지?”
“각 지부에 있는 지부장이 있습니다만…….”
불안해진 단안흉은 하나 남은 눈알을 떼굴떼굴 굴렸다.
그 모습을 흑의의 노인이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사파란 놈들이 간은 쥐꼬리만 해서는, 쯧쯧. 적어도 성강의 고수를 말하는 게다.”
“가, 강기요?”
단안흉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청해 무림에 그런 경지에 이른 무인은 단 한 명, 운산보주뿐.
‘말했다가는 목이 날아갈 텐데…….’
단안흉이 대답하기를 주저하니 백의의 노인이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
그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니 거무튀튀한 내공이 기류를 이루었다.
그걸 본 단안흉은 확신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다.
‘여기서 뒈지나, 운산보주한테 뒈지나!’
그래도 살 가능성이 있는 쪽으로 거는 게 낫지 않겠는가.
단안흉은 다급히 외쳤다.
“우, 운산보주! 최근 성강의 경지에 이르렀단 소문이 있습니다.”
“소문?”
“아, 아니. 확실합니다. 강기를 유형화하는 걸 본 놈이 있었습니다!”
“확실해?”
“예. 곤륜 지부장 적산이라는 놈이…….”
“적산?”
흑의의 노인이 계속해서 말꼬리를 잡으니, 단안흉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하나하나 대답했다.
그것도 스무 개가 넘으니 대답할 거리가 떨어졌다. 단안흉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맺혔다.
“대협, 이제 가 봐도 되겠습니까?”
“죽여.”
쫘악!
흑의 노인의 말에 백의의 노인이 펼친 조공(爪功)에 단안흉의 머리가 날아갔다. 단안흉이 청해에서 외공의 고수로 불리는 것을 감안하면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청해 무림의 기준.
중원에서 흑백쌍마로 불렸던 그들에게 있어 단안흉의 외공은 힘을 주면 찢어지는 가죽에 불과했다.
“운산보주라…….”
혼잣말을 중얼거린 흑의의 노인, 흑마(黑魔)는 백의의 노인인 백귀(白鬼)와 함께 경공을 펼쳤다.
목적지는 운산보주가 있는 서녕이었다.
***
화르륵!
백무량이 청류강 나루터에 횃불을 던지자 불이 파도처럼 번졌다.
“아이고, 아이고…….”
“값은 제대로 챙겨 주시는 거지요? 송 노야만 믿습니다?”
주변에서 온갖 곡소리와 물음이 나돌았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두 발로 설 수 있을 때부터 타고 다녔던 배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하물며 멀쩡한 것이었다.
이 모두 백무량의 계획을 위해서였다.
“정말 괜찮은 것이냐?”
송우현이 백무량에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좌중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배야 값을 받기로 했다지만, 운산보를 몰아낼 수 있다니까 허락한 일이었다.
그만큼 운산보에게 쌓인 악감정은 오래되었고, 컸다.
백무량은 송우현과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무량은 스스로 다짐하듯, 강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와도 지지 않을 겁니다.”
설령 누가 오더라도 패배하는 일은 없다.
결의를 되새긴 백무량은 숨을 가다듬었다.
“이제 모두 돌아가십시오. 운산보 놈들이 오면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부들이 백무량을 흘깃 곁눈질했다.
열세 살쯤 된 아이를 운산보와 싸우게 둔다는 게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그들을 본 백무량은 청류강을 향해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일섬운월.
태청신공의 내공으로 이루어진 검기가 수면을 때렸다.
쿠콰콰!
검기를 중심으로 파도가 갈라졌다. 거칠게 튀어 오른 물방울이 삽시간에 어부들의 복식을 적셨다.
그것은 백무량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저건!”
노년의 어부가 백무량의 가슴을 가리켰다.
허름한 겉옷이 젖으며 안쪽에 덧입은 도복이 드러났다.
곤륜(崑崙).
백련교의 난 이래로 몰락하여, 이제는 명맥만 겨우 이을 뿐인 도문이었다. 주변에서 지켜보기엔 그것조차도 버거워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백무량이 펼친 일 초 반식은 운산보의 무인보다도 훨씬 강맹했다.
“곤륜운평천하라…….”
노년의 어부는 어린 시절에 만났던 도사가 중얼거리던 글귀를 떠올렸다.
백련교를 비롯하여 어떤 강적일지라도 물러나지 않던 도사들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현 장문인인 현노윤은 무공을 모름에도 운산보와 부딪치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었던가!
심지어, 이제는 무공을 익힌 어린 도사가 운산보에 맞서 싸우려고 한다.
노년의 어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까지 나는 은혜를 당연하게 생각했구나, 돌려준 적은 없구나!’
크게 탄식한 어부가 백무량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올리며 물었다.
“우리가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백무량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 일이 잘 끝나면 도관이랑 가옥 좀 수리해 주십시오. 매우 허름해졌더군요.”
“……알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지요.”
노년의 어부가 먼저 걸음을 옮기니, 다른 어부들도 뒤따라 걸어갔다.
백무량은 그 뒷모습을 보며 송우현에게 말했다.
“이길 이유가 하나 늘었네요.”
“혹시나 하여 나도 믿을 만한 도사를 한 명 불렀느니라.”
백무량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는 도사가 있으면 왜 진즉 부르지 않은 겁니까? 운산보가 저렇게 날뛰는데요.”
“상인을 그만두었는데 무림과 얽혀 봐야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부르지 않았었지.”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고요?”
“작은 문파나 도와줄까 생각 중이지.”
송우현의 말에 백무량의 미소가 짙어졌다.
“만금상단과 곤륜파의 체감이 클 텐데요.”
“녀석,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입맛부터 다시느냐?”
피식 웃은 송우현이 미리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물론 내 나이가 나이이니, 적당한 후임자가 들어오기 전까지다. 그 전까지 터를 닦고 기둥은 제대로 세워 주마.”
“그것만으로 감지덕지하지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백무량은 송우현의 능력을 높게 예상하였다.
특히 만금상단 시절에 맺었을 인맥이라면 맨땅에서 저택을 일궈 낼 수 있으리라.
백무량은 딱 하나 남은 나룻배에 올라섰다.
“나중에 뵙지요.”
“오냐.”
송우현이 등을 보이며 떠나간 뒤, 백무량은 청류강 중앙으로 노를 저어 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백무량의 시야에 나루터로 몰려오는 무인들이 보였다. 소문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듯했다.
물론, 백무량이 탄 배는 그곳에서 스무 장 이상 멀어진 상태였다.
“처음으로 만나겠군.”
잔학마도 적산이라고 했던가.
백무량은 가까워져 오는 인영에게 손을 크게 흔들었다.
“여기다, 여기!”
“……!”
그러자 몇몇이 이곳을 손가락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장 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뭐라 뭐라 외치는 듯했다.
‘저놈인가?’
백무량이 내공을 눈으로 집중시키자 조금씩 이목구비가 비쳤다.
그와 동시에 적산과 시선이 마주쳤다.
“……오호.”
과연 대장 노릇을 할 실력은 있다는 건가.
백무량은 턱을 매만지며 적산의 행색을 살폈다.
거대한 도, 떡 벌어진 어깨. 척 보기에도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장사였다.
아깝게 느껴졌다. 만일 그가 운산보가 아니라 곤륜파에 입문하였다면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괜히 귀찮은 짓을…….”
힘이 있으니까 뺏었고, 빼앗다 보니 사파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좋은 말로 계도해 봐야 도사의 따분한 소리밖에 더 되겠는가.
백무량이 잠시 고민하던 그때였다.
“저 애새끼였구나!”
멀리서 들려오는 외침에 백무량은 빙긋 웃었다.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알게 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마터면 쉬운 길을 빙 돌아갈 뻔했다.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이 입 모양으로 ‘열다섯’을 중얼거렸다.
독순술을 몰라도 알아차릴 만큼 아주 자세하게, 손가락으로도 열을 펼쳤다가 다섯을 접었다.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운산보의 무인 열다섯을 자신이 죽였으니까.
“……!”
얼굴이 시뻘게진 적산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