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신검 (2)
‘눈을 기억한다니.’
백무량이 듣기에도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만금상단의 패를 보지 않았다면 송우현이 매병에 걸렸거나 사람을 착각했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아니, 그를 믿고 싶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주백천의 흔적이 하나둘 사라지는 이때 자신 말고도 기억해 주는 이가 있다면 좋을 테니까.
백무량이 묘한 웃음을 머금자, 송우현이 머쓱하다는 듯 팔뚝을 긁었다.
“이상하게 들릴 거라곤 생각했다. 하지만 내 보기에 너무 닮았던 게야. 그래서 그분의 자식인가 생각했지.”
“그렇게 비슷한가요?”
“그게 아니라면 내가 뭣 하러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내겠느냐!”
정작 말을 꺼내고 나니 민망함이 큰 듯했다.
몇 마디를 더 툴툴거린 송우현이 작은 함을 꺼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겉에 칠해진 옻은 대부분 벗겨진 상태였다. 하지만 함 안에서 풍기는 청아한 향은 쇠하지 않았다.
과거 주자령이 장문인이 되었을 때 맡았던 그 냄새.
백무량은 송우현의 말에 거짓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이걸 왜 저한테 보여 주시는 건가요?”
“확신했으니까.”
송우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여기에 머무른 지 수십 년이 지났다. 그동안 곤륜산을 찾아가고, 도사님을 수소문했지만, 어디에도 없더구나. 인정할 때가 된 게지. 백련교의 난 때 횡액을 입으셨다고 말이다.”
“…….”
백무량이 침묵하는 사이, 송우현이 말을 이어 갔다.
“기껏 구한 태청신단을 무덤에 가져가긴 아깝지 않으냐. 그래서 원래는 곤륜파에 가져갈 생각이었다. 네가 오기 전까지는…….”
“제가 그분과 닮아서 그럽니까?”
“아니, 네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송우현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만한 장작을 패는데 어떤 아이가 쓸린 상처로 끝난단 말이냐?”
“……!”
“말하지 않았느냐, 만금상단에 있으면서 많은 도사와 중놈을 만났다고. 무인을 단숨에 알아볼 만큼 눈썰미가 길러질 수밖에 없지.”
백무량은 송우현에게 물었다.
“제가 무인이면 더 경계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요요, 꼬마 놈.”
백무량의 말이 가소롭게 느껴진다는 듯, 송우현이 피식 웃었다.
“운산보의 지부를 공격했다는 놈이 너 아니냐?”
“그게 무슨 소립니까?”
백무량은 태연하게 잡아뗐지만, 송우현의 대답은 달랐다.
“수십 년 동안 토박이로 있으면서 은인의 위치를 수소문하다 보니 청해에 정보망이 생기더구나.”
송우현이 창가를 가리켰다.
값이 비싸 보이는 전서구가 자기 날개를 핥고 있었다.
그걸 본 백무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거짓말해서 죄송하단 말은 안 나오고, 요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송우현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래도 뭐, 통쾌하긴 했다.”
그 모습을 보니 도리어 백무량이 당황스러웠다.
그는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을 숨겨 준 셈이었다.
“제가 곤륜의 도사인 것도 아십니까?”
“지금 처음 알았다. 아니, 애초에 한낮에 사파 소굴로 쳐들어가서 사람 죽이는 꼬마는 중원에도 없어!”
송우현의 말에 백무량은 순간 뜨끔했다.
“그거야, 그, 백선신검의 소문을 알아보고…… 그들이 잡아간 무인을 구출하기 위해…….”
“살인에 미친 놈인 줄 알고 긴장 좀 했다.”
“…….”
백무량이 할 말을 잃자, 송우현이 낄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농담이다, 이놈아, 반은.”
“제가 진짜 악인이었으면 어찌하려고 그랬습니까?”
백무량이 진지하게 물으니 송우현이 말을 빠르게 쏟아 냈다.
“과거에 인연을 맺은 대협에게 부탁을 해 봤겠지? 안 그래도 운산보 때문에 짜증 나는데 어린 살인귀에 마음 졸이고 싶진 않거든.”
“미리 다 생각이 있으셨군요.”
“없이 살았으면 이 나이까지 못 살았다.”
송우현은 태청신단이 든 함을 백무량에게 건넸다.
“자, 받아라.”
“곤륜파에 전하란 겁니까?”
“네가 써라.”
“예?”
백무량의 눈이 커졌다.
“눈이 비슷하다고 이런 보물을 준단 말입니까?”
“운산보 놈들을 죽인 걸 보니 싹수는 있고, 이런 보물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거짓말이군.’
백무량이 인상을 찌푸렸다.
주백천의 이야기를 꺼낼 때 그는 강한 정념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유야 간단했다.
“그냥 솔직히 말씀하시죠, 영감님. 자기가 너무 늙었다고 말입니다.”
눈이 비슷하다?
다시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이유였다. 애초에 송우현이 사형의 눈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어폐가 있었다.
곤륜파의 장문인인 현노윤도 사형을 잊었는데, 잠깐 마주친 것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단지 백무량이 그걸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또, 저 영감님이 말하지 않았던가.’
백무량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곤륜파의 도사를 수소문하다 보니, 그들을 알아볼 식견도 지니게 되셨겠지요.”
“…….”
송우현이 침묵했다. 백무량은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곤륜산맥은 강인한 장정도 오르기 힘겨워하는 곳입니다. 곤륜파는 그 산맥의 가장 높은 곳에서 운산보를 피해 다니고 있지요. 영감님이 찾아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현노윤과 안면이 있었던 우중조차도 곤륜파를 찾아오지 못해서 산 중턱에서 소리를 질렀다.
하면 외부인인 송우현은?
그가 심부름꾼을 불렀어도 마찬가지다. 곤륜산맥을 둘러싼 운해는 만만한 게 아니었으며, 길 또한 척박했다.
백무량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정말이지, 속아 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객잔의 시서화를 통해 백선신검에 대한 단서와 주백천이 남긴 유산을 동시에 얻었다.
뒤이어진 송우현의 회상은 달콤하기까지 했다.
덧붙인 거짓말을 믿고 싶을 정도로.
백무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상인이라 그런지 진실과 거짓을 절묘하게 잘 섞으시는군요.”
“그러면 끝까지 속아 주지 그랬더냐.”
그 말을 꺼내는 송우현의 목소리가 몹시 무덤덤했다.
백무량이 왜 그랬냐고 묻기 전에, 그가 먼저 입술을 달싹였다.
“은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을 때, 미련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타지에 두고 온 가족에게 돌아갈 시간이라 여겼지.”
“저한테 줘 버리고요?”
“원래 네 문파의 물건 아니더냐? 다시 파느니 은인의 사문에 돌려주는 게 낫다고 여겼다.”
송우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 아까 장작을 패는 네 모습을 보았다. 단순한 칼질처럼 보였지만, 뭔가…… 곤륜처럼 보였다.”
‘검해 때문이군.’
백무량은 오늘 했던 수련을 떠올렸다.
심상을 반복하면서 단 한 번, 검해의 파도가 희미하게 실렸을 때가 있었다.
아마 그때 곤륜의 무공임을 확신했으리라.
내막을 알아차린 백무량이 송우현에게 물었다.
“이렇게 줘도 괜찮습니까?”
“아까 말하지 않느냐, 사문에 돌려주겠다고 말이다.”
“미련이 남지 않겠습니까?”
“없다고 하면 거짓이겠지. 하지만…….”
백무량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
“내가 그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서화를 유심히 쳐다본 것입니다.”
“네가 그분을 어찌 안단 말이냐? 어린 꼬마 주제에!”
송우현의 목소리에 짙은 피로와 분노가 담겼다.
이제 포기하려는데 왜 괜한 희망을 주느냐는 투였다.
백무량은 그에게 대답했다.
“영감님이 찾는 사람의 이름은 주백천입니다. 곤륜의 이십육 대 제자로서 학문에 능하며 시서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요.”
“……주백천.”
송우현이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렸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백무량은 그에게 물었다.
“기억이 나십니까?”
송우현은 말없이 시서화를 바라보았다.
청년과 소년 도사가 뛰노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수백수천 번은 넘게 들여다본 것이었다.
일다경 정도가 지났을까.
‘……아!’
송우현의 눈이 커졌다.
백무량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었으되, 거짓이 아니었다.
눈을 기억한다.
단지 은인의 눈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소년 도사와 이 꼬마의 눈이…….’
단순한 우연일 뿐인가?
아니면 은인이 의도한 것이었을까?
송우현의 얼굴이 메마른 노송처럼 변했다. 칠십 년을 훌쩍 넘긴 삶에서 가장 큰 충격이었다.
“인연이로다, 은인께서 점지한 인연이로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송우현은 시서화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백무량을 바라보았다.
“수십 년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도다.”
송우현의 두 눈에서 깊은 감격이 흘렀다.
***
몇 마디의 대화를 더 나눈 뒤, 백무량은 이 층으로 올라갔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이 강호행을 다니는 사이에 사형은 미래를 위한 안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도와줄 인연 또한 차곡차곡 쌓아 주었다.
한편으로는 원망스럽기도 했다.
‘천기가 흐려질까 봐 말해 주지 않은 거겠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사제에게 언질이라도 주면 무엇이 덧난다고.
요에 몸을 뉜 백무량은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송우현과의 대화를 통해 세 가지는 확실해졌다.
‘세간에선 곤륜파가 백련교를 막아 냈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 백련교는 곤륜산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백련교주가 살아 있을뿐더러, 주백천을 추격하기 위해 곤륜산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던가?
갑자기 사라진 게 아니고서야.
백무량은 복잡한 마음을 한숨으로 풀었다.
‘두 번째는 시서화를 그린 시점이 백련교의 난 이전이라는 거지.’
백련교의 난 때 곤륜파의 유물과 비급을 악착같이 챙긴 이유가 안배를 위해서였다니.
그걸 끝까지 숨긴 사형의 심경도 편하진 않았을 터였다.
물론 결심도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사부의 시신을 눈앞에 두고도 냉정할 수 없었을 테니까.
백무량은 송우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화산파와 종남, 무당, 보타암. 그리고 이곳까지 총 다섯 개.
송우현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은인께서 남긴 다섯 점의 그림이 각 도문에 하나씩 있지.
사형의 그림들이 당대 최고로 꼽혔다나?
특히 도가적인 색채가 강한지라, 유명한 도문에서 사들였다고 했다.
그중 보타암은 사형이 직접 가서 그렸다는데, 이곳의 시서화처럼 사고팔 수 없는 유형이란다.
제일 황당한 건 따로 있었다.
‘나는 왜 몰랐을까?’
그 시기에 백무량이 강호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사문에 무관심했으면 사형이 당대 최고로 불리는 걸 알지도 못했다.
그만큼 무공에 미쳐 있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모르도록 무언가 조처한 걸까.
‘후자였으면 좋겠군.’
심각한 후레자식이 되기는 싫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은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백무량은 송우현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꺼냈다.
“내가 여기 있다는 소문을 내 주십시오.”
“죽으려고 아주 고사를 지내려느냐?”
송우현의 얼굴이 당황과 분노로 시뻘겋게 변했다. 하지만 백무량의 기색은 침착함을 넘어 냉정하기까지 했다.
“기왕이면 백선신검도 가지고 있다고 해 주시고요.”
“이놈!”
진노한 송우현을 향해 백무량이 말했다.
“저, 백무량입니다.”
“……뭐?”
백무량이라면 주백천의 사제이자, 백련교를 무찌른 영웅의 이름이 아니던가?
농담이 지나치다고 생각한 송우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백무량은 달랐다.
“그게 제 이름입니다.”
“어른한테 장난질을……!”
송우현이 뒤늦게 떠올렸다.
아직 꼬마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첫 소개를 가명으로 할 후레자식은 아니라는 것을.
“……계획은 있는 거겠지?”
“물론이죠.”
송우현의 걱정에 백무량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