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배 (2)
“대, 대협…….”
“…….”
백무량은 말없이 뺨을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러자 조현성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덜렁거리는 어금니가 보였다.
그와 동시에 역한 악취가 콧잔등을 스쳤다.
“여전하구먼.”
인상을 찡그린 백무량은 다른 손으로 독단을 빼냈다.
도중에 생니를 한두 개 부수긴 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주르륵.
그의 피에서 흡정마공보다도 더 사특한 기운이 느껴졌다.
‘원래 이렇게까지 기감이 뛰어나진 않았는데.’
백무량의 시선이 따끔거리는 손등으로 향했다.
운룡의 문양이 미미한 빛을 흩뿌리며 사기(邪氣)를 밀어내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문을 열던 중에 피가 안쪽에서 흘러나왔었다. 그때부터 기감이 확장되고, 조급했던 마음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우연은 절대 아니겠지.’
사형과 운룡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하나 더 생겼다.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은 조현성, 아니, 이름 모를 마인의 천주혈을 점했다.
심하면 혼절하거나 죽을 수도 있는 혈도였으나 사정을 봐줄 필요가 전혀 없었다.
마인의 몸이 축 늘어지자, 백무량이 그를 어깨에 들쳤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간 뒤, 단단히 문초할 작정이었다.
백선신검에 대한 소문이나 백련교와 연관되어 있을 터였다.
‘그만한 이유가 아니면 청성의 제자를 사칭할 리가 없지.’
그와 마찬가지로, 운산보가 청성의 제자라는 신분을 듣고도 고문을 자행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인을 구하러 내려왔던 일이 점점 복잡해지는군.’
백무량이 철문을 나서니 허름한 차림의 사내가 보였다.
태양혈이 밋밋하고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모습을 보아 무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백무량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볼일을 모두 마쳤으니 적산이 돌아오기 전에 곤륜산맥으로 도주하려 할 때였다.
……푸욱!
별안간 어깨가 축축해졌다. 백무량의 고개가 황급히 옆으로 돌아갔다. 마인의 등에 네 치 정도 되는 칼이 박혀 있었다.
마인의 목에 손가락을 대 봤지만,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백무량은 마인을 내려놓고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끌끌.”
사내가 백무량의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그의 손이 마인의 피로 얼룩져 있었다.
“네놈!”
백무량은 추상같은 기세로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쿨럭, 큭, 쿠흑.”
백무량의 주먹이 닿기도 전에 사내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젠장.”
마인의 어금니에 있던 독단 냄새와 같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백무량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놈들의 정체는…….’
***
끼익, 끼에에…….
한참 동안 몸을 뒤틀던 벌레 두 마리가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본 요안(曜眼)의 남자가 청해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았다.
두 남자에게 건 주술을 회수하기 위함이었다.
찌릿, 하는 느낌과 함께 붉은 실의 형태를 한 기운이 남자의 눈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하나뿐이었다.
“중간에 끊어졌군.”
남자가 턱을 매만졌다. 아예 없는 일은 아니지만, 청해에서 일어날 일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청해의 도문인 곤륜파는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던가?
만리청(萬里聽)을 끊을 정도의 고수가 그들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하면 운산보는 어떨까?’
남자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따악!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니 천장에서 두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색과 백색.
다른 색의 무복을 입은 걸 제외하면 완전히 똑같이 생긴 둘이었다.
“왜?”
흑의의 노인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긴 왜겠소. 부탁이 있어서 불렀지.”
“부탁은 무슨, 육시랄 놈아. 이게 협박이지, 부탁이냐?”
“싫으면 됐소.”
남자가 요안을 번뜩였다.
그것만으로 두 노인의 온몸이 점차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다경이 지날 때쯤.
“하나가 죽어야 생각이 바뀌겠는가?”
“큭.”
백의의 노인이 신음을 흘렸다.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듯 오른손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흑의의 노인이 눈썹을 뒤틀었다.
“젠장, 간다, 가! 그러니까 이제 그만둬라!”
남자가 범어로 몇 마디를 중얼거리자 두 노인에게 가해지던 압력이 사라졌다.
“지금 당장 청해로 가서 만리청을 깨트린 놈을 데려와라.”
“…….”
“열흘 안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배신으로 받아들이겠다.”
그 말을 듣는 듯 마는 듯, 두 노인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요안의 남자에게 멀어졌다.
흑백쌍마(黑白雙魔).
삼십 년 전 돌연 무림에서 자취를 감춘 고수가 청해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
백무량이 곤륜에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적산과 부하들이 뒤늦게 도착했다.
시체들을 본 무인들의 얼굴에 패색이 짙어졌다.
변명도 한두 번이지, 세 번째에 이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데?”
하지만 적산은 달랐다.
적산의 혼잣말을 들은 부하가 물었다.
“뭐가요?”
“지금까지 그놈은 무공의 연원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상대를 죽인 다음 도축을 해 놨다.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은 놈이었단 말이다.”
“그래서요?”
“야! 이 돌대가리 놈아.”
적산은 한심하단 눈으로 부하를 바라보고는 두 구의 시체를 턱짓했다.
각각 깊은 자상과 독에 당한 시체였다. 특히 전자는 세 치 길이의 단검이 등을 꿰뚫은 상처가 인상적이었다.
“단검?”
뒤늦게 깨달은 부하가 시체로 다가가자, 적산이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내가 이런 것들을 데리고 있으니 보주한테 잔소리나 듣지, 어휴.”
“대장은 잘났다는 것처럼 말합디다?”
“아니꼬우면 한번 뜨든지?”
적산이 피식 웃으니 다른 부하의 얼굴에서 패색이 가라앉았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아예 빈손은 아니게 된 셈이었다.
‘문제는 손에 쥔 것이 쓰레기라는 거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것이 적산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이 개새끼가 감히 나를 가르치려고 들어?’
내가 이렇게 허술하게 죽이는 사람은 아니잖냐, 이건 다른 쪽에서 벌인 일이다, 물론 네 부하는 잘 죽이고 간다…….
이런 의도가 선명하게 보였다.
게다가 두 구 중 하나는 자신이 데려온 무인이지 않은가.
적산은 부하의 옆구리를 툭 찔렀다.
“이놈 옆에 혀 까만 놈 누군지 아냐?”
“우칠이라는 종놈입니다.”
“종놈? 종놈이 왜 독살당한 거냐?”
“똑똑한 대장님께서 저희한테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따악!
부하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적산이 종놈의 입술을 크게 벌렸다.
짙은 악취에서 독기가 느껴졌다. 자신일지라도 일각 안에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독했다.
이런 독을 종놈에게 쓰는 건 아까웠다. 마찬가지로, 종놈이 극독을 가지고 다닐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독을 가지고 다닐 정도면 주머니가 무겁거나 가문이 좋은 놈일 텐데, 청해에 왜 돌아다녀?’
장사는 호북에서, 가문은 안휘에서.
둘과 비교해 청해는 개뼈다귀. 아니, 쥐뿔도 없는 지역이었다. 무엇보다 운산보에다 지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염병할, 적산이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부하가 움찔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일이 어째 복잡하게 흘러간다. 나 혼자선 좀 무리겠다.”
“대장님이어도 말입니까?”
“인마, 내가 청해에서나 어깨 펴고 다니지 저어기 사천만 가도 대가리가 터져요. 응?”
적산은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있었다.
변방인 청해니까 고수란 말을 듣지, 진짜 고수 앞에서는 개망나니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 개망나니가 열 정도면 이야기가 다르지.’
물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했다.
한쪽 입술을 비튼 적산이 부하에게 말했다.
“전서구로 운산보주께 보고해라. 나 혼자서 감당하긴 벅찬 일이라고, 운귀 열을 증원해야 한다고 말이다.”
“열이나요?”
부하가 깜짝 놀라 되묻자, 적산은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그럼 지부가 쑥대밭이 되었는데 그대로 둘까?”
“아, 아닙니다.”
“쯧.”
이번 일이 끝나면 운산보주가 자신을 불러들일 것이다.
적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개놈 하나도 벅찬데 엿 같은 놈도 추가가 되었다.
일단 개놈부터 잡으면 가닥이 잡히리라.
그렇게 생각한 적산은 멀어져 가는 부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술을 홀짝거렸다.
***
같은 시각.
백무량은 청류강 하류의 산하객잔에 도착했다.
청류강을 건너면 바로 곤륜산맥인 데다, 수영으로 가로지를 수 없을 만큼 수심이 깊었다.
게다가 주위에 마을이 없어 사람의 눈을 피하기도 쉬웠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정녕 가출한 것이 아니더냐?”
나이가 지긋한 객잔 주인이 자꾸만 백무량을 꾸짖는단 것이다.
어려진 외모가 이렇게 눈에 띌 줄이야.
백무량은 강하게 손사래 쳤다.
“아닙니다.”
“쯧, 운산보가 요즘 애들을 다 망쳐 놨구먼. 아! 저쪽 서 씨 아들놈이더냐?”
“누군지도 모릅니다.”
“크흠, 씁.”
마뜩잖다는 듯 인상을 찡그린 객잔 주인이 백무량의 어깨를 두드렸다.
“부모님 속 그만 태우고 집에 들어가거라! 무인 같은 것, 멋있지도 않고 돼서도 안 된다!”
“……저도 압니다.”
“알긴 무얼. 네가 내 손자 같아서 하는 말이다.”
거기까지 말하던 객잔 주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기도 저 나이 땐 저랬었지, 하는 눈빛이 훤히 보였다.
“배나 배불리 먹여 주마. 다 먹고 나서는 생각 좀 다시 해 봐라, 알겠느냐?”
“비용은…….”
“됐다, 이눔아! 너한텐 안 받는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백무량은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오해가 깊긴 해도 어쨌든 자신을 위한 선의였다.
다만 무례하기는 싫었다.
“대신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그려. 자기가 먹은 건 자기가 치워야지.”
객잔 주인이 허허로운 웃음소리를 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할 일이 없어진 백무량은 객잔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맨 처음은 도주로였다. 혹여나 운산보나 마인이 나타난다면 일단 객잔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주머니를 털어서 여비가 조금 있긴 하지만, 객잔을 수리해 드릴 형편은 아니니까.’
은혜를 도주로 갚아서 쓰겠는가.
손 속에 거침이 없고 입이 험한 백무량이었지만, 도사였다. 도리에 어긋날 일 따윈 벌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다 백무량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저건?”
주백천(株白闡).
사형의 이름이 날인된 시서화가 벽에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