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배 (1)
‘양옆과 뒤를 동시에 점한 합격이라…….’
누군가에게는 일촉즉발의 위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무량에겐 아니었다. 곤륜파의 무학으로 강호 십 대 고수에 오른 주자령의 유일한 제자가 바로 그였다.
-곤륜의 무공은 언제나 지극한 호흡에서 시작됨을 잊으면 안 된다.
백무량은 주자령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진각을 밟았다.
쩌억!
지극한 호흡을 용천혈로 연결한 뒤 내딛는 진각.
그 짧은 동작 안에 곤륜 무학의 진수가 담겨 있었다. 백무량이 괜히 현종휘의 정강이를 때려 가며 가르친 게 아니었다.
그러나 무인들이 보기에는 단순한 진각에 불과했다.
“흥, 포기한 모양이군.”
세 방위에서 칼이 날아드는데 진각이라니?
무인들의 얼굴에 조소가 맺혔다. 그들은 백무량이 목숨을 포기했다고 여기며 적산에게 할 보고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망념을 끊은 건 한 줄기의 불협화음이었다.
카앙!
한 치에서 두 치 사이.
살갗이 닿을 듯한 거리를 앞두고 세 개의 칼이 동시에 잘렸다.
잘린 칼 조각들이 땅을 두들기고 나서야 시뻘건 불똥이 튀었다. 합격을 펼쳤던 세 무인의 입가에서 핏물이 뚝뚝 흘렀다.
어느새 백무량의 우수에 검이 쥐여 있었다.
무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언제 뽑은 거지?”
“대체 어떻게?”
진각을 밟았던 백무량이 어떻게 세 개의 검을 베어 낸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검법이나 초식 따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후우.”
백무량이 숨을 내뱉었다.
작은 숨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만큼, 주위가 적막으로 가득했다.
그 적막을 깬 자는 합격을 시도했던 무인 중 하나였다.
“감히 분광검으로……!”
“분광검?”
질 나쁜 농담을 들었다는 듯, 다른 무인들의 인상이 구겨졌다.
***
분광검이 무엇이던가?
쾌를 펼치기 전에 속검의 이치를 알기 위한 발판.
마치 권사의 육합권처럼 검객이라면 누구든 익히게 되나, 금방 수련을 멈추는 무공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곤륜파는 달랐다.
곤륜만의 폭발적인 호흡에서 시작되는 분광검은 세간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분광검의 기수식을 이루는 일점분식(一點分式).
일점분식에서 이어지는 살초인 삼절광식(三絶光式).
삼절광식을 한데 묶어서 완성한 승검신광(乘劍神光).
그렇게 완성된 곤륜의 분광검은 백련교도를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았었다.
때문에 백무량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있는 누구도 곤륜의 분광검을 알지 못하는가?”
“분광검이 분광검이지, 옛날에 망한 곤륜이 왜 나온단 말이냐?”
한 무인의 대꾸에 다른 무인들이 크게 웃어젖혔다. 그러나 소리만 요란할 뿐,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백무량의 기세를 미리 죽여 놓으려는 모양새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가소롭다는 듯 한쪽 입술을 비튼 백무량은 분광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 모습을 본 무인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
“…….”
아무리 백무량이 강해도 분광검만으로는 열이 넘는 손을 감당할 순 없다.
그렇게 판단한 무인들이 무기를 움켜쥐었다. 그들의 눈동자엔 곤륜파를 멸시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대곤륜의 명예가 이렇게까지 떨어졌단 말인가?’
백무량은 사문의 몰락에 한탄했다. 한탄은 곧 분노가 되어 온몸을 휘감고, 사부인 주자령을 떠올리게 했다.
살아야 할 사람은 죽고, 죽어야 할 짐승은 살아가고 있다.
그 사실이 백무량에게 너무도 아프게 다가왔다.
“후우…….”
백무량의 입술이 가늘게 벌어졌다.
지극한 호흡이 용천혈을 통해 온몸을 휘돌아 전신의 기혈을 넓히니, 진기가 벽력과 같은 속도로 대맥을 내달린다.
다른 문파라면 기혈이나 심폐가 터지고 말겠지만, 곤륜파는 달랐다.
고지대에서 동공(動功)을 십 년 이상 수련하는 문파는 드넓은 강호에 오직 곤륜파뿐이었으며.
당금에 이르러 그런 도사는 백무량 한 명밖에 없었다.
“검뢰벽천(劍雷劈天).”
대맥을 내달린 진기가 곡지혈을 통해 검에 도달한 순간, 백무량이 검을 좌에서 우로 장절하게 휘둘렀다.
위험하다.
무인들의 감각이 경종을 울린 순간 폭음이 울렸다.
“아악!”
백무량의 검에 팔이 잘린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 광경을 본 무인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칼이 맞부딪친 것뿐이었다.
겨우 그뿐인데도 칼이 엿가락처럼 휘고 두 팔이 잘렸다. 첫 초식이 합격을 쳐 낸 것에 불과했다면, 이번에는 살기가 자욱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얕다!’
백무량은 송곳니로 입술을 깨물었다. 적어도 두셋은 죽였어야 할 초식이 한 명에서 그쳤다.
이유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근골은 그대로지만, 실전의 감각은 달랐던 거야!’
한 치의 거리만으로 승부가 결정되는 게 무림이었다.
한데 지금의 백무량은 스무 살이 넘게 어려졌다. 신장은 물론 사지까지 소년의 것이다.
백무량이 실수를 인지하고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으나…….
“동시에 쳐야 한다!”
그 전에 일곱 무인이 땅을 박찼다.
후웅-!
바람이 칼날에 난자당했다. 그 사이로 쇠 냄새가 들어앉고, 난잡한 기운이 백무량을 향해 쏘아졌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백무량은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위험하단 생각은 없었다. 곤륜의 무공을 견식하지 못한 자에게 패배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저 중에 하나라도 허용했다가는…….’
생각을 멈춘 백무량은 단전이 토해 내는 진기를 느끼며 검을 움켜쥐었다.
다행히도, 활로는 사부의 가르침에 있었다.
초식의 이름은 무(武)를 펼치는 자를 돕기 위해 만들어졌노라고.
일섬운월(一閃雲刖).
백무량은 초식명을 속으로 되뇌며 앞을 바라보았다.
시야 전체가 무인들의 칼이며, 피였다. 후자는 자기편의 허벅지나 옆구리를 베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에게 난도질당한 바람은 쇠 냄새와 살기로 가득했다.
“…….”
백무량이 칼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머릿속엔 오로지 일섬운월의 심상만이 그윽했다. 백무량의 검이 그리려는 것은 오직 하나의 초식이었다.
콰아아……!
태청신공의 기운이 담긴 검이 바람을 내리치자, 살기가 사라졌다. 쇠 냄새는 새롭게 분 바람에 밀렸다.
“……!”
그 순간 백무량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일섬운월의 검기 끄트머리에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검해.
곤륜파의 무공으로 이루어진 바다, 그 일렁거림이 무인들의 검을 모두 잘라 냈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검해의 단서가 심상에 있었던 것일까?’
백무량이 자신의 검을 회수하자, 검해의 잔향이 사라졌다.
뒤이어 그가 앞을 바라보니.
“맙소사.”
일곱 명의 무인 모두 일검에 절명해 있었다.
백무량은 검해가 가진 가능성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
일각 뒤, 붉은 철문 안.
“이보시오! 난 정말 죄가 없소! 그런 소문 따위 퍼트린 적 없단 말이오!”
무인은 목소리가 쉴 정도로 고래고래 외쳤다.
이곳에 끌려온 것도 오래된 과거처럼 느껴졌다. 정신을 갉기 위해 만들어진 감옥엔 한 톨의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단전을 부수고 진행하는 고문도 버티기가 어려웠다.
이제는 한계다.
그렇게 생각한 무인은 혀로 안쪽 어금니를 건드렸다. 따끔한 통증과 동시에 둥근 감촉이 느껴졌다.
이 단약을 깨물기만 하면 끝이다.
‘부디, 부디…….’
무인이 속으로 유언을 남기려던 그때였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지금 구하러 왔습니다!”
“이, 있소! 있습니다!”
단약을 제자리로 원위치시킨 무인은 머리로 땅을 내리찍었다.
“여기! 여기!”
“금방 열 테니 그만…… 피? 뭔 짓을 하는지 몰라도 그만두시지요!”
“하하, 하하하.”
죽을 필요가 사라졌으니 얼마나 기쁜가!
바깥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아무렴, 상관없었다.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질 않았다.
끼리릭…….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조금씩 빛이 들어왔다. 무인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협!”
“대협이라…….”
돌아오는 목소리에 고저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황한 모습을 보이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무인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으나, 오랜 어둠 탓에 눈이 부셔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저어,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비밀.”
짧은 대답이었지만, 여러 번 듣다 보니 한 가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대는 상당히 앳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열 살에서 열다섯 정도.
물론 그걸 내색할 생각은 없었다.
무인은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 저기, 사파 쪽은 아니시겠지요?”
“그랬으면 내가 뭐 하러 열어 줬을까.”
“대협께서도 백선신검의 소문을 듣고자 한 건 아닙니까?”
“…….”
잠깐의 침묵이었으나,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영원과도 같았다. 무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들으려고 열었지. 사파한테 억울하게 붙잡힌 사람을 구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아, 정말 감사…….”
“하지만 실제로 보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
인영(人影)이 한순간에 작아졌다. 눈을 가늘게 떠서 보니 자신의 머리맡에 쭈그려 앉은 듯했다.
달라졌다는 생각이 몹시 궁금했고, 두려웠다.
“이름은?”
상대의 질문에 무인은 대답했다.
“청성의 삼 대 제자, 조현성(組縣星)이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청유검(淸幽劍)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증명할 패라도 있라도 있나?”
“징표라면…… 제 옷과 밖에 있는 검을 보시면…….”
상대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청성이라면 사대사행(四大蛇行)으로 유명하다지?”
“예. 사대사행이라면 유수…….”
“거꾸로.”
“……!”
조현성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당최 무슨 사람이기에 아픈 사람에게 이리도 모질게 군단 말인가!
조현성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협은 대체 누구시기에 이토록 의심이 많으신 겁니까!”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상대가 말했다.
“내가 조금 전에 잡놈들이랑 싸우고 왔거든. 형편없는 것들이라 그런지, 잡스러운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더라고.”
“……?”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스르륵.
칼날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조현성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따라갔다.
‘……운룡?’
상대의 손등에 새겨진 운룡이 미미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조현성은 곧바로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깜짝 놀란 모습을 숨길 자신이 없었다.
‘반드시 청해를 빠져나가야 한다!’
조현성이 결연한 마음을 품던 그때, 뒷머리가 갑자기 들려졌다.
“예전엔 어금니였는데, 지금도 같으려나?”
꽈악!
상대, 백무량은 조현성의 양 뺨을 움켜쥐었다.
“웁, 우웁……!”
그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