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0화 (10/275)

하산 (4)

“본문의 귀물인 백선신검을 얻기 위해 사람을 해칠 잡놈이 청해에 수없이 깔려 있다. 늙었다고, 어리다고 봐줄 놈도 아니지.”

“…….”

백무량의 말에 현노윤의 눈썹이 뒤틀렸다.

그의 기분이 상한 듯 보였으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의 곤륜파는 군소 문파만도 못했다.

무공을 모르는 학도사와 열 살짜리 아이.

일문(一門)은커녕 일가(一家)로 불리기에도 모자랐다.

“만일 오늘 내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백무량은 다시금 현실을 되짚었다.

“천 년 곤륜의 역사가 색마 하나 따위에게 저물었을 것이다. 특히 곤륜의 마지막 전인(傳人)인 종휘는 흡정을 당해 폐인이 되거나, 더욱 끔찍한 꼴을 당했을 테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조님이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뭐가 위험하다고 그러냐.”

백무량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강호 십 대 고수의 적전 제자였으며, 백련교주와 싸운 영웅이 네 눈앞에 있지 않느냐. 이번 일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

“그 이후에 함께해도 늦지 않아.”

백무량이 현노윤에게 괜한 허세만 부린 건 아니었다.

첫째로, 백무량은 현재 운산보에게 노출되지 않은 유일한 곤륜도이며.

둘째는 강일산과 객잔에서의 싸움을 통해 운산보의 무인이 어느 정돈지 겉핥기나마 파악했기 때문이다.

현노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할 만큼 아둔하지 않았으며…….

“아침이 되기 전에 떠나겠습니다.”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백무량은 부스스한 머리를 매만졌다.

주변을 돌아보니 새벽에 쪄 놓은 감자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현노윤이 어제 했던 말 그대로, 아침이 되기 전에 짐을 챙겨서 떠난 모양이었다.

“쩝.”

백무량은 감자를 깨작이면서 행낭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현노윤의 판단을 칭찬해 주고 싶었다.

‘걱정이 한결 덜었어.’

일찍 떠날수록 운산보의 추격을 늦출 수 있을 테니까.

현노윤이 수많은 악재 속에서 곤륜파의 명맥을 유지했던 만큼 아주 영민한 판단이었다.

백무량은 감자를 마저 먹어 치우며 생각에 골몰했다.

‘백선신검에 대한 진위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인데…….’

소문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무인이 붙잡혔다는 운산보 곤륜 지부에 침투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객잔에 있었던 놈이 말하지 않았던가.

적산.

운산보에서 신망받고 있는 신진 고수.

‘우중이 본 무인 중에 가장 강하다고 했던가.’

촌로가 가장 강하다고 말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냐마는, 강일산과 싸우던 자신을 포함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가벼운 마음으로 상대할 자가 아니란 뜻이니까.

어디 그뿐이랴?

운산보 곤륜 지부에 머무르고 있을 적은 얼마나 많겠는가?

백무량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신중해야 해.’

이 작은 손에 달린 것이 너무도 많다.

마음을 다잡은 백무량은 곤륜파 가옥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떠올랐지만.

이곳은 사형, 주백천이 자주 머물렀던 곳이었다.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기로 했었던가.”

혼잣말을 중얼거린 백무량은 봇짐을 어깨에 들쳐 멨다.

대관절 무슨 일이 있어선지, 사형은 모두에게 잊혔다. 기억하는 이는 오직 백무량뿐이었다.

그것은 절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되살아난 것처럼 말이지…….’

그 까닭에 분명 사형 주백천과 관련되어 있으리라.

가옥에서 시선을 돌린 백무량은 서둘러 하산했다.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

째앵…….

객잔 문이 열리며 종소리가 객잔 내부를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무인 다섯 명이 무기를 쥐었다.

어제 칼부림을 부린 고수가 다시 찾아왔을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온몸에 휘감겼다.

“누구냐!”

적의가 한껏 깃든 외침에 주방 안쪽에서 젊은 아낙네가 신음을 흘렸다.

‘제발…… 아버지, 저를 도와주세요.’

그녀는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객잔 주인의 여식으로, 고수가 나타난다면 인질로 삼기 위해 끌고 온 차였다.

그때 문에서 한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낙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문 쪽으로 내밀었다.

“수, 술…… 심부름, 왔는데요.”

펑퍼짐한 옷에 꼬질꼬질한 얼굴.

촌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구쟁이였다.

무기를 쥔 무인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냐?”

“어르신들이 시켜서요…….”

“쯧.”

혀를 강하게 찬 무인이 알아서 볼일 보라는 듯 아이에게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아이가 주방에 있는 아낙네에게 쪼르르 달려가 물었다.

“근처에 더 있어요?”

“뭐, 뭐가?”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긴 뭐가요. 당연히 운산보 잡놈들 말하는 거죠.”

“……?”

아낙네는 순간 기절초풍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운산보의 무인들에게 그런 소릴 했다가는 목이 달아나는 게 요즘의 청해였다.

아낙네의 표정이 자연스레 어색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니?”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아줌마도 곱게 나가진 못할걸요.”

“……!”

아이의 말대로, 이대로 있다가는 운산보에게 끔찍한 짓을 당할 게 뻔했다.

아낙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와주실 분이라도 계시니?”

“네. 신호하면 바로 뛰쳐나올 거예요.”

“정말이지?”

“물론이죠.”

아이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아낙네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바깥 골목에 두 명 정도 있었던 것 같고…… 아, 위층엔 세 명이야. 확실해.”

“객잔 내부의 다섯을 포함하면 열 명이라…….”

아이의 표정뿐만 아니라, 말투와 목소리까지 바뀌었다.

“어제의 두 배네.”

“……어제?”

아낙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가 마치 어제 객잔에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게 퍽 기이했다.

아낙네의 표정을 본 아이가 피식 웃고는 가볍게 어깨를 휘돌렸다. 그 모습이 어째 몸을 푸는 무인과 같았다.

아낙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도와주신다는 분은 어디 계시니?”

“눈앞에 있잖아.”

“……뭐?”

아낙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에 비하면 아이의 목소리엔 여유가 넘쳤다.

“곤륜의 도사, 백무량이.”

***

“또냐, 또?”

같은 짓거리를 두 번이나 당하다니!

객잔에 뒤늦게 도착한 적산은 이를 빠득 갈았다.

이번에 배치한 부하는 어제처럼 기초도 모르는 얼간이가 아니었다. 최소한 무인이라고 불릴 만큼의 소양을 가진 무인들이었다.

“대체 뭐 하는 놈이기에……!”

적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주도면밀하게 살펴도 상흔에서 무공의 연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푸줏간의 칼질처럼 무성의하게 급소를 내려쳤을 뿐이었다.

적산은 청해에서 이러한 칼질을 하는 무인을 알고 있었다.

‘운산보주…….’

그를 떠올린 적산은 고개를 휘저었다. 서녕에 있는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학살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요컨대, 느낌이 비슷하다.

‘왜 하필 그런 인간 백정 같은 놈이 내 구역에…….’

목덜미를 매만진 적산은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적산의 미간이 좁아졌다.

“……한 놈이 없잖아?”

객잔에 열 명의 부하를 보냈거늘, 발견된 시체는 아홉 구밖에 없었다.

이는 즉 부하를 죽인 놈이 한 명을 따로 빼 가서 정보를 캐내고 있다는 뜻.

‘지금 당장 쫓아야 한다.’

상황을 파악한 적산이 인상을 찡그릴 때, 부하 하나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각 전에 여자랑 애 하나가 객잔에서 포대를 질질 끌고 나갔답니다.”

“포대?”

“사람 하나는 거뜬히 들어갈 크기라고…… 서쪽으로 갔답니다.”

“서쪽?”

서쪽이라면 곤륜산맥이 있는 방향이 아니던가!

적산은 입술을 비틀었다.

“잘했다! 이각이면 멀리 가지 못했을 터이니, 대가리를 으깨 버려야겠다!”

적산이 강한 살기를 드러냈다.

“당장 개를 풀어라!”

“예!”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까?

적산과 운산보의 무인들은 곤륜산 중턱에서 피 묻은 포대와 마주했다.

그것을 열어 보니 심문은커녕, 몽둥이로 때려죽인 흔적만 남아 있었다.

“이, 이……!”

적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놈은 정보를 캐내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자신을 포함한 무인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한 것에 불과했다.

얼굴도 모르는 놈한테 완전히 농락당한 셈이다.

“당장 곤륜 지부로 돌아간다!”

적산은 황급히 몸을 뒤로 돌렸다.

그동안 객잔을 습격한 놈이 무얼 했겠는가?

답은 간단했다.

‘곤륜 지부를 급습할 생각이었구나!’

적산은 경공을 펼치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 머리가 비상하다고 한들, 모두 네 마음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한적한 지부라고 해도 청해 전체를 장악한 운산보의 지부였다.

그곳에 있을 무인의 수가 몇이겠는가!

그들을 쓰러트린다 한들, 외지에서 온 무인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는 데 적잖은 시간을 쓰게 될 터였다.

“죽여 주마!”

적산은 곤륜 지부를 향해 신법을 극성으로 펼쳤다.

***

부스스스…….

부서진 벽에서 흩어진 먼지가 건물 내부를 부옇게 만들었다.

그 속에서 작은 불똥이 튀기도 했으며,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수많은 인영(人影)이 교차하고, 누군가는 쓰러졌다.

그야말로 투쟁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뜨거웠던 열기가 점차 눅진해졌다.

“저, 저깟 어린놈이…….”

수많은 무인을 압도하는 한 명의 소년 때문이다.

일곱 명의 장정을 상대로 열세 살의 소년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연전(連戰)을 이어 갔다. 유효한 타격이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 찰과상에 불과했다.

십 대 소년 혼자 곤륜 지부 전체와 싸우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도 이미 절반은 쓰러트린 상태였다.

‘대체 어디서 저런 놈이 나타난 거냐?’

‘설마, 반로환동한 고수인가?’

무인들의 생각은 제각기 달랐지만 어느 누구도 곤륜파를 떠올리진 못했다.

그야 곤륜파의 무공을 직접 견식해 본 이가 단 한 명도 없으니까.

그들에게 있어 곤륜파란 과거에 멸문당한 문파에 불과했다.

그 사실이 소년, 백무량에게는 몹시 쓰라리게 느껴졌다.

이깟 것들에 핍박당하고 살았을 현씨 조손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 정도였다.

“후우.”

백무량은 숨을 가다듬었다.

찰나에 불과한 행동이었지만, 백무량의 호흡은 곤륜산맥을 뒤덮은 구름의 운행과 닮아 있었다.

태산처럼 무거우나 깃털처럼 가볍다.

백무량이 고요히 서서 호흡을 다스리는 순간.

“……죽어라!”

양옆, 그리고 뒤에서 칼날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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