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 (1)
청해 변방의 한 객잔.
그곳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와 잘 정돈된 기도의 무인이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무인의 오른 뺨에 긴 검상이 나 있어, 무림에서의 관록이 여실히 느껴졌다.
“근래 별일은 없는가?”
무인이 느긋한 어조로 물었다.
“대협이 계신데 별일이 생기기야 하겠습니까!”
남자는 붉어진 얼굴로 헤죽댔다.
남자에게 있어 무인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길에서 사경을 헤매던 무인을 치료했더니, 은혜를 갚겠다며 삼십 일간 호위를 자처한 것이다.
‘그 파락호 같은 운산보와 엮이지 않게 된 게 크지.’
무인의 정체는 모르나, 운산보의 무인 둘을 단숨에 제압한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남자는 무인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한데…… 어디에서 오신 겁니까?”
취기가 잔뜩 올라선지 평소에 묻지 않던 이야기도 꺼냈다.
그 말에 무인이 부드러운 웃음을 보이더니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괜한 걸 물은 모양입니다요.”
남자는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꽤 긴 시간 동안 무인을 지켜본바, 여기서 더 밀어붙이면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그때 무인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곤륜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예?”
“그도 그럴 게, 품새가 헌양한 노인과 함께 나갔다 오지 않았나? 그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는가?”
무인의 말에 남자, 백무량을 진맥했던 의원인 우중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무인이 허튼소리를 중얼거릴 사람은 아니라지만, 현노윤의 불같던 성정이 떠오른 탓이었다.
우중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한 아이가 그렇게- 그렇게 위중하다고 해서 갔는데, 노인네가 과장을 했었지요. 그토록 건강한 아이를 본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무인이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노인의 하루는 걱정으로 시작해서 걱정으로 끝난다고 하지 않던가? 자네가 이해하게.”
“그날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 자, 됐고. 잔이나 받게.”
“아이고, 감사합니다.”
우중과 무인은 왁자지껄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술자리를 이어 갔다.
그렇게 일각이 흘렀을까.
끼이익-.
한여름인데도 열린 문 사이로 한기가 흐르더니, 턱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객잔으로 들어섰다.
정종의 무공은 익히지 않은 걸까?
밋밋한 태양혈에 비해 사지가 성인의 허리보다 두꺼웠다. 내공보다는 외공을 철저히 익힌 듯했다.
그 모습을 본 무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술맛 떨어지는군.”
무인의 혼잣말이 들리기라도 한 걸까?
불청객이 대답했다.
“거기, 잡놈.”
“뭐라고?”
불청객이 무인에게 손가락질했다.
“네가 백선신검의 소문을 흘렸느냐?”
‘백선신검?’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우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주 예전에 듣기로, 곤륜파의 특별한 유물이라던가?
이름 모를 학도사가 챙겨서 달아났다고 들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 들었더라? 아니, 듣긴 했던가?’
우중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 무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소문은 무슨! 나에게 무슨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게냐!”
“내 듣기로…… 최근 청해에 나타난 외지인이 네놈밖에 없다는데?”
남자가 손가락으로 대도의 손잡이를 툭툭 두드렸다.
금방이라도 검을 출수할 모습의 무인과는 달리, 아주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근데 너 같은 애새끼가 그런 짓이 가능이나 할까?”
“이놈!”
무인이 순간 발끈하여 외쳤지만, 남자의 신색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어르신의 말은 끝까지 듣거라. 그러니까…… 너 말고 다른 놈은 없었느냐?”
“다른 놈이라니?”
“너 다쳤었다며. 그럼 싸웠던 놈이 있었을 것 아니냐.”
남자의 말에 무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낙마했었을 뿐이다!”
“지랄 염병은. 어이! 거기 우중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우중이 황급히 대답했다.
“예?”
“저 새끼, 낙마한 상처 맞아?”
남자가 거리낌 없이 하대하자 우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근데 저 아십니까?”
“말대꾸 한 번에 손가락 하나씩 잘라 주랴?”
“그만.”
무인이 남자의 말을 중간에 잘라 냈다.
“보자보자 하니 안 되겠군. 예의라는 게 뭔지 내가 직접 알려 주지.”
“이래서 외지인이란!”
남자가 대도를 들자, 주방 안쪽에서 호들갑을 떠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적 대협, 사정을 봐주십시오!”
‘적 대협? 설마?’
우중은 그제야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운산보의 운귀.
그들 중에서 가장 잔인한 것으로 유명한 대도의 사나이.
“잔학마도!”
우중이 새된 목소리로 외치자, 적산이 코웃음을 쳤다.
“늦었어!”
콰직!
무인의 어깨가 쪼개지며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허윽, 헉.”
그걸 본 우중이 객잔을 뛰쳐나갔다. 하지만 등 뒤를 바짝 쫓아오는 웃음소리가 있었다.
“하하, 하하하!”
어디 한번 도망가 보라는 듯.
적산의 웃음에는 진득한 살기가 맺혀 있었다.
***
이른 아침, 곤륜산의 중턱에 큰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현 노야! 현 노야!”
백무량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였지만, 초조와 불안이 담겨 있었다.
‘곤륜산에서 사는 현씨 노인은 한 명밖에 없다.’
다짜고짜 곤륜파의 장문인을 찾는 연유가 가볍지는 않을 터.
백무량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연습하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갔다.
“어디 계십니까, 현 노야!”
머리가 헝클어지고 얼굴이 붉게 물든 중년인이라.
헐렁해진 옷깃을 보아 만만찮은 시비에 얽힌 듯했다.
백무량이 코를 벌름거리자 중년인에게 강렬한 냄새가 났다.
‘술인가.’
아침부터 술이라. 팔자가 참 좋은 양반이다.
백무량은 중년인, 우중에게 다가갔다.
“현 노야는 왜 찾으십니까?”
백무량의 얼굴을 본 우중이 작은 탄성을 흘렸다.
“아, 너는!”
“저를 아시는지요?”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거나, 곤륜파에 해를 끼치러 온 자라면 단숨에 제압할 요량이었다.
그 속내를 모르는 우중은 넌지시 주먹을 쥐며 백무량을 위협했다. 다급함과 짜증으로 범벅이 된 행동이었다.
“너와 이야기할 게 아니다! 지금 현 노야가 어디 계신지 아느냐?”
백무량은 우중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땀으로 젖은 머리칼, 헐떡이는 숨, 멍이 든 팔뚝.
그의 다급한 언동까지 보고 나니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백무량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옛날에 여러 양민이 곤륜에 도움을 청하곤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게냐?”
“잠자코 들으십시오.”
백무량의 목소리에는 아이답지 않은 단호함이 있었다.
우중은 순간 당황했지만, 얼어붙을 정도는 아니었다.
뒤이어진 말이 없었다면…….
“우리가 얼마나 호구로 보였으면…….”
“뭐라고?”
“돈도 빌려 달라, 몸도 지켜 달라, 애도 키워 달라 난리도 아니었지요. 그래도 곤륜은 도문 아닙니까, 많이 도와줬습니다. 없는 형편까지 탈탈 털어 가며…….”
백무량은 얼굴에서 순진한 척하던 표정을 지웠다.
“그러다 나중엔 무림에서 엮인 일까지 해결해 달라는 사람까지 있었는데…….”
“어린 게 뭘 안다고! 당장…….”
“감히 어디서 호통질이냐!”
백무량이 태청신공을 끌어 올리자 우중의 몸이 자연스레 움츠러들었다.
집채만 한 범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다.
우중은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강호에 사는 이상 모를 수가 없는 감각이었다.
‘보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칼날의 핏물을 수없이 닦아 본 검객만이 지니는 살기라니.
우중은 떨리는 눈으로 백무량을 바라보았다.
백무량의 모습은 분명 어린아이답지 않았다.
“곤륜파에 해를 끼칠 생각이라면 당장 하산해라.”
“그건…… 현 노야께 말씀드릴 게 있어서…….”
백무량은 냉소를 머금었다.
“말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으면 엉덩이에 입을 달고 왔을까.”
“그게 무슨?”
우중이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전에 나무의 그림자가 늘어지고, 이슬에 짓무른 대지 위로 발자국이 찍혔다.
맘껏 지저귀던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멎었다.
“감이 좋은 꼬마구나.”
온화한 목소리가 곤륜 산맥 중턱에 울렸다.
백무량은 무표정한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일렁이는 현광(眩光)과 깡마른 체형에 어울리지 않는 불룩한 배.
‘음양의 균형을 일부러 깨트려 음허화동을 취했나?’
양기를 돋워 음기를 취하기 위한 더러운 형태다.
백무량은 그러한 형태의 무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흡정마공이라…… 추한 무공을 익혔군.”
“입이 험한 아이에겐 따끔한 벌이 필요한 법이지.”
남자의 눈가가 둥글게 휘는 걸 보며,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은?”
“강…….”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무량이 땅을 박찼다.
전혀 상정하지 못한 움직임에 남자의 반응이 늦어졌다.
설마 열세 살에 불과한 꼬마가 선공을 취할 줄이야.
남자는 빙긋 웃으며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그래 봐야 아이지.’
선공을 양보해도 위협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남자의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백무량은 중간에 변화를 추가했다.
촤악!
백무량이 발목을 뒤틀자 젖은 흙덩이가 남자의 미간을 덮쳤다. 일찍이 현종휘에게 보였던 삼보 중 첩풍의 묘리였다.
“칫.”
남자는 귀찮다는 듯 오른손을 휘둘렀다.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흙덩이가 뭉개지고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백무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보라!
알량한 재능을 믿고 달려드는 저 모습을!
남자, 강일산은 저런 아이를 부술 때마다 쾌감을 느꼈다.
흡정마공에 정기를 빼앗긴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세상을 전부 다 가진 것만 같았다.
“히히, 하!”
이빨 사이로 샌 웃음소리가 퍽 기괴하다.
그걸 본 백무량이 아무렇지 않게 강일산을 지나쳤다.
“……뭐?”
공격을 대비하던 강일산의 얼굴에 허탈함이 자리했다.
선공을 취한 놈이 도망을 칠 줄 누가 알겠는가.
고개를 가볍게 흔든 강일산은 우중을 노려보았다.
“일단 너부터 처리하고 따라…….”
쿵!
강일산의 등 뒤에서 큰 진동이 울렸다.
뒤를 돌아본 강일산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 탓이었다.
회천각(回天脚).
백무량의 정강이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강일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떻게…….’
자신을 지나쳤던 백무량이 무슨 재주를 부려서 육 척을 뛰어오른단 말인가?
그 해답은 이 장 거리에 있는 당산나무에 있었다.
“……이런!”
당산나무 한가운데에 찍힌 발자국.
조금 전에 들었던 큰 진동의 정체가 저것이었다니!
“놈!”
어린 외견에 비해 보통 힘이 아니다.
잔뜩 긴장한 강일산은 오른손에 내력을 있는 힘껏 끌어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