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3화 (3/275)

입문 (2)

백무량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곤륜파 명맥은 끊겼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끊겼지.”

현노윤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 아이, 곤륜 무공을 익히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현노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노윤의 여유로운 모습에 백무량은 분노를 토해 냈다.

“사람 놓고 장난하십니까? 이 아이, 곤륜 무공을…….”

“너도 익히고 있지 않으냐?”

현노윤이 조용히 백무량을 바라보았다.

“그 무공은 어디에서 배운 것이냐?”

백무량은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현노윤의 주름진 눈가가 옛 스승을 떠올리게 한 탓이었다.

아니, 그의 눈에 깃든 건 단순히 세월뿐만이 아니었다. 회한, 괴로움, 삶에 찌든 이만이 가질 수 있는 덤덤한 견딤.

현노윤이 말을 이어 나갔다.

“하긴, 멸문한 문파의 무공이 새어 나가는 것쯤이야 별것 아닌 일이겠지. 주인 없는 보물, 주워 가는 게 임자지.”

“아니, 누굴 도둑놈 취급을…… 그래요, 저도 곤륜 무공 익혔습니다!”

백무량이 누구도 믿지 못할 정체를 밝히는 대신, 현노윤의 말에 수긍했다.

“그래서 압니다! 말씀하신 대로 무공은 유출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명문의 체계는 함부로 훔쳐 갈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수백 년 세월을 어떻게 훔칩니까?”

현노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또한 그렇지.”

“현 노야께서는 어찌 명문의 가르침을 알고 계십니까?”

현노윤이 조용히 백무량을 바라보았다.

백무량은 현노윤이 갑자기 늙어 가기 시작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허름한 시골의 인심 좋은 촌로가 세상의 풍화를 단번에 겪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거친 바람과 차가운 이슬을 한꺼번에 견뎌 낸 바위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인심 좋은 촌로의 얼굴은 가면이리라. 그 가면 뒤에 숨겨진 진짜 표정은 바로 저 풍화된 바위 같은 얼굴이리라.

현노윤이 무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그것을 알 만한 위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백무량은 그제야 현노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것은 바로 그래서였다.

장내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백무량이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알 만한 위치에 계셨다면…… 견디기 쉽지 않으셨겠군요.”

현노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목소리 또한 떨려 왔다.

“그랬…… 그랬지.”

“많이…… 많이 괴로우셨겠군요.”

칠십이 년이라는 세월은 얼마나 길까. 멸문한 문파의 후손이 견디기에는 얼마나 긴 세월이었을까.

백무량은 눈물을 참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곤륜 제자 백 모가…….”

백무량이 뜻 모를 그리움과 뜻 모를 고통을 담아 무릎을 꿇었다.

칠십이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가 돌아갈 곳은, 아직 남아 있다.

노인이 바로 그가 돌아갈 곳…….

바로 집이었다.

“곤륜 제자 백 모가 곤륜의 장문인을 배알합니다.”

현노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다.

오랜 시간 세상을 떠돌던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함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하물며 칠십이 년 세월을 망자로 떠돈 이는 어떠할까.

칠십이 년 세월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백무량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집의 대문을 열고 그 편안하고 안온한 공기 속에서 늦은 잠을 자고 싶었다. 힘들었노라고 투정하고 싶었다.

집에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집이 백무량을 별로 반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곤륜 제자?”

현노윤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서 어찌 곤륜 제자를 자처하느냐?”

백무량이 멍하니 눈을 몇 번 끔뻑였다.

하긴, 정체도 모를 어린애가 곤륜 무공을 좔좔 풀어내고 제자라고 자칭하면 뭔가 이상할 만도 했다.

“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백무량이 잠깐 멈칫했다.

‘잠깐. 항렬로 따지면 나한텐 까마득한 후배잖아?’

괜히 저자세로 나갈 필요가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백무량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린 꼬마가 자기를 칠십여 년 전에 죽은 선배라 그러면 잘도 믿어 주겠다, 잘도.’

보름 동안 가만히 누워 있던 꼬마가 당신의 선배라고 말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입문은커녕 정신이 돌아 버린 아이라고 생각할 게 뻔하다.

백무량은 입술을 조심스럽게 떼었다.

“사정은 설명할 수 없지만 저는 곤륜 제자가 맞습니다.”

“인정할 수 없다.”

현노윤의 표정이 더욱더 엄격하게 변해 갔다.

“네가 대곤륜의 조사(祖師)들을 능멸하는 게 아니라면, 어찌 곤륜 제자로서 장문인에게 사정을 감춘단 말이냐?”

그렇다.

자신이 아무리 항렬이 높아도 장문인이란 문파의 어른.

장문인이 까라면 까야 한다.

백무량이 주춤하자 현노윤이 추상같은 기세로 고함을 질렀다. 비록 쇠락하였지만, 대곤륜의 장문인다운 태도였다.

“장문인으로서 명하니, 네가 정녕 제자임을 자처한다면 정체를 밝혀라! 네가 참으로 곤륜 제자라면 감히 장문령을 무시하지 못하리라!”

백무량은 현노윤에게서 자신의 스승이었던 주자령을 떠올렸다.

수백의 백련교를 마주하고도 당당했던 모습이 현노윤이 발한 기세와 같았다.

“……하하.”

생각해 보니 백무량 자신이 우스웠다.

집으로 들어가는데 자기 정체를 믿어 주지 않을 거란 두려움 때문에 복면을 쓰겠다니.

너무 어리석다. 무엇보다 자신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백무량은 묘한 웃음을 머금으며 현노윤을 바라보았다.

초라해졌음에도 끝까지 명문의 자존심을 지키는 현노윤의 모습이 너무나도 갸륵했다.

“내가 이십육 대 제자 백무량이라면 믿겠느냐?”

“뭣이?”

현노윤의 눈에 핏발이 차올랐다.

백무량이 누구인가!

백무량은 칠십이 년 전의 혈사에서 끝까지 곤륜을 지키다 영면에 드신 사조로서 칭송받아야 마땅한 대영웅이 아닌가!

이 정도면 명예가 훼손당했다고 봐도 된다.

심지어 열세 살 남짓한 아이가 자신에게 반말이라니.

“네놈이 감히 본 파의 고인을 사칭하느냐!”

“사칭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

백무량은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모습이 되레 현노윤의 복장을 터트렸다.

“네가 어찌 백 사조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사조라.

백무량은 현노윤이 이십팔 대 제자임을 알아차렸다.

“어…… 반로환동을 해서?”

“반로환동?”

아이의 장난이라기에 농담이 너무 심하다.

현노윤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백무량은 현노윤이 넘어갈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백무량이 ‘분명 칠십이 년 전에 죽었는데, 어쩌다 보니 살아났다!’라며 열심히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어째서인지, 당장이라도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 같던 현노윤의 표정이 점점 안쓰럽고도 온화하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미친 게로구나.”

“사실만 말하고 있건만…….”

그 뒤로 긴 대화가 있었다.

긴 대화의 끝에서 ‘백무량은 약간 정신이 온전치 못한데, 곤륜 무공을 익힌 것만은 진짜인 것 같다. 아마 곤륜 속가로서 무공을 배웠다가 생매장을 당한 충격에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현노윤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좋다. 기억에 문제가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 그런 거로 하자.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니까.”

백무량은 그냥 자신이 미친 거로 하기로 했다.

하긴, 자신이 봐도 칠십이 년 전에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일 터였다.

백무량은 머지않아 진실이 밝혀질 거라 믿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반면, 현노윤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평범한 노인 현 모로서는 능히 기억을 잃은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느니라. 하지만 곤륜파 장문인으로서는 달라.”

“그건…….”

현노윤이 백무량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곤륜의 장문인으로서는 문파에 해가 될 수 있는 아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너를 백 사조의 묘소에 생매장한 이가 네 뒤를 추적하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하겠느냐?”

‘단호하군.’

백무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매장한 놈? 누군지 모른다. 아니,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있으면 목을 두 바퀴쯤 돌려 주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이 사정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장문인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쇠락한 문파를 끝까지 지켜 내려면 저 정도 신중함은 있어야지.’

백무량은 현노윤이 이전에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무 자에 량 자라…… 귀한 이름이구나.

그는 백무량이라는 이름을 존중했다.

단순히 오래전에 죽은 곤륜의 선배라서가 아니다. 백무량이 백련교의 난에서 활약한 영웅이었고, 곤륜을 살리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영웅, 백무량이 주먹을 꽉 쥐었다.

칠십이 년의 세월과 어려진 몸.

두 가지 간극이 구천검 백무량과 자신을 갈라놓았다.

하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믿어 주진 않아도 나, 백무량이야.’

백무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곤륜의 제자로서 말하지.”

백무량이 곤륜의 이름을 거론하자, 현노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하라.”

“나로 인해 곤륜파에 해가 갈 일은 없을 거야.”

“그걸 어찌 확신할 수 있느냐?”

백무량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있는 한 누구도 곤륜을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뭐라?”

현노윤은 자기도 모르게 표정을 구겼다.

우스운 말이었다.

한낱 아이에 불과한 백무량이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어린아이의 치기가 부른 오만한 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백무량이 하려던 말을 이었다.

“내 이름, 백무량이라는 이름을 걸고.”

“네가 진짜 구천검 사조라도 되는 줄 아느냐?”

분노에 찬 현노윤은 재차 백무량을 꾸짖으려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어린놈의 눈이……!’

아이답지 않게 형형한 눈이 현노윤과 마주한 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결정을 꺾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백무량의 눈에서 의지를 확인한 현노윤은 더는 분노를 토해 내지 못했다.

“내가 백무량이라는 증거를 보여주면 되겠느냐?”

아이답지 않은 기세, 절대 실릴 리 없는 무게감이 실린 말.

백무량의 기세에 일순간이나마 눌린 현노윤이 물었다.

“증거?”

“구천의 검을 아느냐?”

“뭣이?”

백무량은 말을 마치자마자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처음에는 살랑거리는 듯하던 손길이 점점 강하고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허공을 그어 갔다.

현노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구, 구천화우검! 구천검 사조 이후로 실전된 무공!’

아이의 검로는 그가 아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초밖에 알지 못하는 구천화우검의 후반부를 그리고 있었다.

‘후반부의 완성을 저 아이에게 보게 될 줄이야!’

아이의 칼날이 유천앙시(幽天仰視)의 초식에 이르자 칼끝에서 검기로 이루어진 검운(劍雲)이 일렁였다.

주자령 태사조가 쓴 기록에 비하면 극히 미미하지만, 구천화우검의 후반부를 알지 못하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현노윤의 시선이 백무량에게서 하늘로 향했다.

“천지불인이라 했던가.”

현노윤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땅속에서 얼어 죽던 생명을 거두며 하늘이 야속하다 여겼다. 그저 불쌍한 아이. 현노윤은 늘 백무량을 그런 눈으로 보았다.

하나 지금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삼청께서 곤륜을 잊지 않으셨도다.”

자신이 자비를 베푼 게 아니라, 하늘께서 곤륜을 위해 선연을 베푸신 것이다.

현노윤은 공경의 의미를 담아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장문인 현 모가 백무량 사조를 뵙니다.”

백무량은 현노윤의 얼굴에서 수십 년의 고난을 읽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곤륜파를 유지하며 겪었을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무공을 모르는 몸이니 몇 배는 더 참혹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곤륜의 명맥을 포기하지 않은 그가 대단했다.

비록 자신의 후배일지라도 존경받아 마땅한 도사였다.

백무량은 현노윤에게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이 사조만 믿어라.”

백무량의 말에 현노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본 현종휘가 입을 쩍 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