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문 (1)
“잘못 아신 걸 겁니다. 곤륜파의 명맥이 끊기다뇨!”
백무량의 목소리가 떨렸다.
칠십이 년.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세월의 장벽과 마주했다.
백무량이 아무리 강인한 무인이어도 현노윤의 말은 쉬이 감당할 수 없었다.
‘젠장할, 대체 왜! 왜……!’
백무량은 다시금 세월을 곱씹었다.
칠십이 년, 칠십이 년, 칠십이 년…….
모순적이게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어째서 도관(道觀)이 이렇게 허물어지고 있는지, 왜 이곳에 현노윤 같은 노인이 드나들고 있는지.
‘나도, 사형도, 내가 지키려 했던 학도사들도 모두 죽었단 말인가?’
오색찬란했던 과거가 누렇게 물들었다. 구천검 백무량이 살아온 길이 칠십이 년이라는 토사(土砂)에 막혔다.
이해가 된다.
어째서 현노윤이 백무량이라는 이름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되고 말았다.
‘칠십이 년 전에 죽은 사람의 이름이니 이상했겠지. 아니, 이름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인가.’
백무량이 쓰게 웃었다. 백무량의 몸은 어느새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얘야, 얘야!”
현노윤이 다급히 자신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백무량은 그저 망연할 뿐이었다.
‘어째서 시간이 그렇게나 흘러 버린 거냐?’
야속하다.
백무량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려진 몸으로나마 살아남은 학도사들과 친우를 찾아가려던 희망이 산산이 부서졌다.
무려 칠십이 년이다.
그 세월이 지난 이상, 구천검 백무량의 귀환을 기다리는 사람도, 그를 반겨 줄 사람도 없다.
그뿐이랴…….
‘마지막 순간에 얻은 검해의 기연이 무용지물이라니…….’
크나큰 충격에 백무량의 심령이 흔들렸다.
“정신을 차리려무나, 얘야!”
현노윤의 외침이 백무량에게 점차 멀어져 갔다.
‘말도 안 되는…….’
의식을 잃은 백무량이 옆으로 쓰러지던 그때…….
스르륵.
붕대로 감긴 손등에 조금씩 무언가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
두 시진 뒤.
현노윤은 마을에서 데려온 의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떤가?”
의원이 산취(山取 : 고산병)에 해롱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현 노야(老爺)께서 급한 환자라고 하여 왔습니다만, 걱정이 너무 과하셨던 게 아닌지요?”
“그게 무슨 소린가? 멀쩡하게 있던 애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현노윤이 고성을 내지르자, 의원이 구토를 겨우 참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웬만한 어른보다 건강한 아이입니다. 태양혈만 뚜렷했다면 무인으로 착각했을 정도로요.”
“뭐?”
“이곳이 워낙 벽지인지라 고수를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이 아이의 근골은 평범한 게 아닙니다. 웬만한 무인보다 더욱 뛰어나단 말입니다.”
“그…… 이게 무슨 소리…….”
현노윤은 크게 당황하며 백무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정을 찾은 듯 뺨에 선홍색 빛이 선명했다.
‘평범한 아이는 아닐 거라 생각은 했지만…….’
현노윤이 멍하니 백무량을 쳐다보고 있자, 의원이 상반신을 은근히 들이댔다.
“이 애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의원의 질문에 현노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열세 살의 아이가 무덤에 생매장을 당했다?
뭔가 사연이 있어도 단단히 있다.
게다가 근골이 저렇게 발달했다면 평범한 아이일 리가 없었다.
의원이 괜한 소문을 냈다가는 아이를 생매장한 고수가 곤륜산으로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현노윤은 두 눈에 힘을 가득 줬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현노윤이 표정을 구기자 의원은 입맛을 다셨다.
“노야께 군식구를 들일 여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가 조수로 들일까 했지요.”
“아이를 짐꾼으로 써먹겠단 말인가?”
현노윤의 말에 의원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사실, 그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밥도 주고 잠도 재워 주겠다는 건데…….”
의원의 변명을 기억해 둔 현노윤은 다시 그와 함께 마을로 향했다.
‘참으로 기이한 아이야.’
처음에는 극악무도한 악인이 저지른 짓이라 여겼다.
오래전에 전사한 도사의 무덤을 파헤쳤을 뿐만 아니라 유해를 훔치고, 그 안에 아이를 생매장했다.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참사.
따라서 현노윤은 백무량이 안정되는 대로 관가에 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아이를 산 채로 묻어 버린 악인이라면, 관가까지 쫓아갈 수도 있지 않은가!’
섣부른 걱정이 될지언정 현노윤은 어린아이가 희생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백무량에게 선연(善緣)을 느꼈다.
‘아무리 사연이 기괴하다 해도 어찌 모른 체하겠는가!’
현노윤은 백무량의 안녕을 빌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지불인이라! 얼어 죽는 생명이 있다고 하늘이 돌보냐 되묻더니, 그 말 그대로구려. 죽은 이가 묻힌 곳에 산 아이를 묻어 놓은 자가 있어도 죽는 건 산 아이일 뿐이니.’
의원을 내려놓은 현노윤은 곧바로 곤륜산으로 되돌아갔다.
***
백무량이 기절한 뒤,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백무량은 아무런 감흥도 없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누워서 지냈다.
가끔 손등이 간지러울 때면 붕대 위를 벅벅 긁어 댔다.
‘살아나면 뭐 하냐.’
강인했던 몸은 어려지고, 스승과 사형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백무량은 칠십이 년 후로 떨어진 방랑객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원하지 않은 방랑이다.
“저기…….”
옆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백무량이 옆으로 돌아누우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신경 꺼라.”
“밥은 여기 두고 갈게요.”
“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래도 살아야죠, 형.”
아이가 두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그 시선에 가벼운 짜증조차 없었다. 백무량이 아무리 밀어내도 아이는 불만 한번 말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선량한 아이였다.
‘그래서 더 짜증 나…….’
백무량은 아예 뒤집어 누웠다. 누구든 간에 대화도 하기 싫다는 의미였다.
아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백무량의 등을 바라보았다.
“빨리 드시지 않으면 죽에 들어간 고기가 질겨질 거예요…….”
“시끄럽다!”
그렇게까지 밀어내고 나니,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미안해졌다.
생각해 보면 보름 동안 아이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심지어 현노윤이 아이를 소개해 준다고 할 때도 귀를 막아 버리지 않았던가.
백무량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는 어디 계시냐?”
바로 물으려니 뭔가 쑥스럽다.
백무량의 물음에 아이가 부드럽게 웃었다.
“산맥을 돌며 약초를 캐고 계실 거예요.”
“그러냐?”
“네.”
“네 이름이 뭐였지?”
아이는 여태껏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나이는 열 살이고 이름은 현종휘(現宗輝)예요. 약관 전에 고수가 될 거고요!”
백무량의 입가에 실소가 떠올랐다. 꼬맹이가 옛날의 자신처럼 맹랑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야, 그게 쉬운 줄 아느냐? 나도 그랬었어. 한 이십 년 전에는 나도 너랑 똑같은 꿈을…….”
백무량의 말끝을 흐려졌다.
노인이 무어라고 했던가?
곤륜이 멸망한 지 칠십이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약관 전에 고수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던 건 이십여 년 전이 아니라 구십여 년 전의 일이 된다.
‘처음에는 반로환동이라고 생각했었지.’
기절에서 깨어났던 날.
백무량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무공이 경지에 이르러 신체가 다시 어려진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노윤이 말하길 자신의 무덤도 존재하고 심지어 자신의 유해도 존재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어떤 놈들이 훔쳐 가서 문제지. ……아?’
백무량은 보름이 지나서야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니, 어쩌면 내 유해는 누가 훔쳐 간 게 아니라 그대로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좀 더 추측해 보면 뒈진 적 없이, 썩지도 않고 시체 그대로 남아 있다가 원시천존의 은혜로 부활한 다음 어려져서…….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원시천존이 부활을 시켜 줬다는 것보다는 ‘누가 내 시체를 훔쳐 가고 아이를 넣어 놨는데, 시체 근처에 있던 내 영혼이 그 아이의 몸에 빙의했다.’는 게 말이 더 될 테니까.
생각은 길었지만 백무량이 얻은 수확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형이 있었으면 뭐라도 알려 줬을 텐데.’
사형을 떠올리면 보름이 지난 지금도 속이 시꺼메진다.
백무량이 베개에 한숨을 푹 내쉬던 그때.
“……후우.”
백무량은 침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옆에서 말린 약초를 정리하고 있던 현종휘가 깜짝 놀랐다.
“형, 무슨 일이에요?”
보름 내내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곤 항상 누워 있던 백무량이 처음으로 일어난 것이다.
현종휘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백무량은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안방에서 곧장 마루로 향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근골이 쇠할 거야.’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고 지내다 보니, 조금씩 몸이 약해지고 있었다.
‘곤륜파의 도사가 되어서 몸을 스스로 버려선 안 되지.’
비록 곤륜파가 사라졌을지언정.
백무량은 고개를 휘휘 저어 잡념을 떨치고는 미친 사람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현종휘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는 금방 안 돌아오시겠지?”
“네. 어? 그건 왜요?”
현종휘는 백무량의 심기가 상하지 않게끔 목소리를 조곤조곤 냈다.
하지만 백무량은 현종휘의 질문을 무시했다.
“일단 비켜 봐, 꼬맹아. 이 아저씨가 지금 꼭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백무량이 비틀거리며 현종휘를 스쳐 지나가 마당으로 나섰다.
마당 중앙으로 향하며 백무량은 수많은 무공을 떠올렸다.
구천화우검, 분광검, 유운검, 소청권…….
하나하나 곤륜의 진실한 무학이었다.
백무량은 보폭을 어깨만큼 벌렸다.
‘최악의 경우에는 나 혼자 곤륜파를 되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막강한 무.
백무량은 숨을 가다듬었다. 어린 몸이 되었으니 지금부터 착실히 수련하면 되는 일이었다.
곤륜파는 그 방식을 좌선좌공이 아니라 동공으로 해 왔다.
높은 산에 적응하기 위함도 있고, 한 모금의 진기로 천하를 누빈다는 경공을 익히기 위함도 있다.
백무량은 옛 선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가장 먼저 정(静).’
“후우우…….”
고요히 서서 호흡을 다스린다.
구름은 언뜻 보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면 저만치 물러가 있게 마련이다.
곤륜의 무공도 그러하다.
한참을 서서 호흡을 고른 백무량이 천천히 한 발을 떼었다.
구름의 운행은 태산처럼 무거우나 동시에 깃털처럼 가볍다.
‘그리고 동(動).’
차분히 가라앉은 진기가 느리고 완만하게 일어난다.
급하게 진기를 일으켰다가는 반드시 탈이 난다.
절대 급하지 않게, 서두르는 일 없이, 구름처럼…….
기이한 일은 바로 그때 일어났다.
‘뭐야, 저 꼬맹이는?’
옆에 현종휘가 서서 자신의 행동을 따라 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저 동공을 흉내 내는 것만이 아니라 느린 자신이 답답하다는 듯 다음 투로를 먼저 진행하기까지 했다는 점이었다!
‘곤륜도?’
곤륜의 명맥은 칠십이 년 전에 끊겼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현종휘에게 동문의 향취가 났다.
칠십이 년이라는 토사에 가로막혔던 사문의 향취가 다시금 코끝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무량의 얼굴에 놀람과 경계가 겹쳤다.
‘하면, 첩풍은 어떠할까?’
백무량이 삼 보를 앞으로 걸어갔다. 다만 갈지자로 걷는데, 발치의 옷자락이 휘날리며 바람이 점차 쌓였다.
“이건 아직 좀 어려운데…….”
말은 어렵다 하면서도 현종휘는 그것도 흉내 냈다.
백무량의 삼보가 바람을 쌓는다면, 현종휘는 바람을 발아래로 늘어뜨렸다.
백무량보다 경지는 한참이나 부족하지만 투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곤륜파 무공의 요체를 모른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
‘설마 이것도?’
다시 삼보를 밟은 백무량이 오른발을 앞으로 내질렀다.
단순한 동작처럼 보여도 삼보로 쌓은 바람을 발출하는 투로가 담겨 있었다.
파앙!
투박한 바람 소리에 현종휘의 귀가 쫑긋거렸다.
“어?”
현종휘는 고개를 두어 번 갸웃거리고는 삼보를 밟았다.
피잉!
현종휘의 발끝에서 가냘픈 바람 소리가 들렸다.
백무량이 펼쳤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어, 어렵네…….”
현종휘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백무량은 알고 있었다.
‘정, 그러니까 호흡에 들인 정성이 부족해서 그렇지 투로는 완벽하게 재현했어.’
그제야 백무량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꼬마, 곤륜파의 정종 무학을 익힌 거야!’
백무량의 내심에 복잡한 감정이 공존했다.
멸문했다던 곤륜파의 무공과 마주한 기쁨.
그런 무공을 정심하게 익히고 있는 현종휘에 대한 의심.
‘영감의 말대로라면 곤륜파의 명맥이 끊겼다고 했어.’
그렇다면 곤륜파의 무공을 어떻게 배웠겠는가?
백무량은 자연스럽게 최악의 상상을 품었다.
‘온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익혔겠지.’
보름 동안 자신을 챙겨 준 아이이긴 하지만, 곤륜파의 문제라면 절대 좌시할 수 없다.
“곤륜의 무공은 어떻게 배운 거냐?”
백무량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자, 현종휘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 그러는 형은요?”
“똑바로 대답하지 못해?”
백무량이 현종휘를 다그치던 그때.
“나도 그게 궁금하구나. 그 무공은 어디에서 배웠느냐?”
“……!”
깜짝 놀란 백무량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수련에 몰두하는 사이에 도착했던 건지, 현노윤이 마루에 앉아 차향을 음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