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화 (1/275)

검해(劍海)를 보다

나의 어린 시절.

“예로부터 우리는 무림의 방벽이었다.”

사형은 곤륜파의 장구한 역사를 논하며 항상 의로웠음을 귀가 닳을 정도로 강조했다.

성화교와 칠성교, 그리고 천마신교.

역대 마교가 발호할 때마다 곤륜산의 도가는 멸문당했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해 왔다.

난세에는 늘 영웅이 탄생하기 마련이니.

사형이 속삭이는 곤륜의 영웅담에 언제나 가슴이 뛰었고, 언젠가 저런 협객이 되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그랬던 때가 있었다.

“누가 알아나 준답니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형에게 대들기 시작했다.

호광성에서 온 외부인의 혼잣말 때문이었다.

-다 무너져 가는 문파가 자존심은…… 쯧쯧!

살신성인의 문파로 칭송하는 자도 있었지만, 점차 유실되어 가는 무공과 도경에 조소하는 자 또한 적지 않았다.

실제로 구파일방에서 나가떨어질 뻔하지 않았는가.

부아가 치민 나는 사형에게 버릇없이 외쳤다.

“모두가 의로움을 알아주진 않잖아요!”

그 말에 사형은 나의 어깨를 보듬었다.

당시 사형의 나이가 열네 살, 의로움을 논하기에는 너무도 어렸다. 하나 사형의 푸근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답을 찾게 되면 너에게 제일 먼저 말해 주마.”

어리석게도.

그때의 나는 사형이 둘러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 저는…… 알아주지도 않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진 않을 거예요.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 거고요.”

내가 곤륜파의 대의를 부정했음에도, 사형은 부처와 같은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그러려무나.”

나는 사형의 웃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백무량(㓦無量)은 도학을 멀리하고 무림인과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다. 곤륜파에 대한 반항과 같았다.

그러다 서른네 살이 되던 해에 큰 사건과 마주하게 되니.

후대의 무림이 일컫기를.

사교의 난(邪敎之亂), 즉, 백련교의 난이었다.

***

청해 곤륜산.

청해 곤륜은 예로부터 영산으로 유명해 수도하는 자들이 수없이 몰려오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도덕천존께서! 도덕천존을 모셔야……!”

“나무일 뿐이다. 나무로 만든 상일 뿐이야! 빨리 와!”

불타오르는 도덕천존의 상을 바라보며 한 도사가 울부짖었다. 그 도사를 채근하는 자도 마찬가지로 울부짖으며 고함을 질렀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웃던 동문이 시신이 되었다. 하지만 슬퍼할 여력이 없었다.

백련교가 마침내 곤륜에 당도한 것이다.

“젠장! 사형, 뭐 하십니까! 도경이 그리도 중합니까?”

백무량은 답답한 목소리로 사형, 주백천(株白闡)을 채근했다. 정확하게는 사형을 포함한 네 명의 학도사(學道士)였다.

사방에 탄내가 진동하는데도 그들은 오직 낡은 서책과 백선신검 같은 유물을 옮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비급과 도경은 곤륜파의 혼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야 한다!”

“예!”

“장문인께서 벌어 준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

백무량은 네 학도사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정녕 이대로 타 죽고 싶은 겁니까!”

“나한테 불이 붙었느냐?”

주백천이 담백한 어조로 묻자, 백무량이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예?”

“나한테 붙었느냔 말이다.”

백무량은 주백천의 눈에서 결연함을 보았다.

“꼭 챙겨야겠단 말입니까?”

“…….”

주백천은 그 이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백무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기감을 돋워 주위를 경계했다.

저벅, 저벅.

때마침 문 앞에서 두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타 죽기 전에 저놈들의 칼에 맞아 죽게 생겼으니, 저놈들부터 처리해야 했다.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금방 가마.”

사형의 대답을 뒤로한 채, 백무량은 반쯤 불타 버린 정문을 걷어찼다.

쩌적!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양옆에서 휘둘러진 칼날이 백무량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흠.”

헛숨을 뱉은 백무량이 앞으로 반보 내디뎠다. 운중용형보(雲中龍形步)의 현묘한 움직임이 두 무인을 희롱했다.

“허억!”

허공을 가른 적의 칼이 문을 관통했다. 어찌나 강하게 휘둘렀는지 손잡이까지 처박혔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탓에 당황한 두 무인을 바라보며 백무량이 조소를 머금었다.

“검객이라는 놈이 검법의 조예가 그렇게 부족해서야.”

스걱!

백무량이 펼친 분광검이 두 무인의 목젖을 훑고 지나갔다.

그걸 멀리서 본 또 다른 무인이 외쳤다.

“구천검(九天劍) 백무량이다!”

공터에 자리한 백련교도의 시선이 모두 백무량에게 향했다.

“이런 젠장.”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강호에서 쌓은 명성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사파한테 상납을 받거나 궁둥짝을 걷어차는 둥…… 무림에서 거리낌 없이 행동할 때마다 양민들은 환호했지만, 증오하는 놈들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마교는 후자에 속했으니.

문 앞에서 시간만 끌려던 계획이 완전히 무산되었다.

“죽어라!”

“저놈만 죽이면 된다!”

수많은 무인이 백무량에게 달려들었다. 백무량은 덤벼 오는 무인들을 하나둘씩 베어 냈다.

허례뿐인 기수식은 취하지도 않는다.

상대의 공격을 쳐 내는 동작 또한 필요 없다.

지금 필요한 검은 분광검 같은 기초가 아니라 확실한 일검(一劍)!

백무량의 단전에서 흘러나온 내공이 칼날을 덧씌워 검기를 이룬다.

구천화우검(九天花雨劍)의 삼 초, 호천풍연(昊天風煙).

푸확!

아지랑이처럼 흐릿한 무형의 검기가 서너 명의 가슴팍을 찢어발겼다.

“크헉!”

“이, 이게 무슨!”

무인들은 외마디 비명을 남긴 채 절명했다.

기감이 웬만큼 뛰어나지 않고서야 발출은커녕 펼쳐진 순간조차 알지 못하는 검경(劍經).

그것이 바로 호천풍연이다.

내공을 갈무리한 백무량은 소량의 내공으로 전음을 쏘아 냈다.

[아직도 멀었습니까?]

“이제 끝났다.”

사형 주백천이 땀에 흠뻑 젖은 몰골을 드러냈다. 백련교의 무인을 눈앞에 두고서도 의연한 표정이었다.

하나 백무량은 눈치챘다.

사형의 손가락이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백무량은 검을 꽉 붙들며 뻔뻔하게 웃었다.

“저런 잡것들. 이 구천검한텐 아무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강호 십 대 고수가 제 사부 아닙니까? 제 털끝도 못 건드리죠.”

백련교 따위야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백무량은 강호에서 얻은 무명(武名)을 연거푸 강조했다.

뒤이어 주백천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샛길까지만 데려다다오.”

“더럽게 머네.”

평소였다면 불손한 말투를 지적했겠지만, 주백천은 다른 학도사들의 표정이 밝아졌음을 인지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저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녀석, 부탁하마.”

주백천의 말에 백무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잘난 사제만 믿으십시오.”

“누구 앞에서 장난질이냐!”

가슴의 상처를 붙든 살원이 다섯 도인을 가리키며 외쳤다.

“당장 추살(追殺)하라!”

“눈먼 칼에 베이고 싶지 않으면 딱 붙으십시오!”

백무량의 말에 네 학도사가 옆으로 바짝 붙었다.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자신은 없었다.

장문인과 함께라면 모를까.

혼자서 네 명의 학도사를 대동한 채 멀쩡히 돌파할 수 없다.

백무량은 전방에 있는 백련교도들을 보며 각오를 다졌다.

‘여기서 죽는 수밖에.’

의지를 다진 백무량에게서 웅대한 기파가 흘러나왔다.

“제가 막을 테니 전력으로 뛰십시오!”

백무량의 말에 학도사들은 대답 대신 발을 바삐 놀렸다. 숨이 가빠 와도 어떻게든 폐부를 꾹 눌렀다.

백무량은 그들을 호위하며 구천화우검을 마구잡이로 펼쳤다. 공력의 소모가 심했지만 백련교도의 숫자를 줄여야만 했다.

상처가 어느새 상반신을 가득 채울 때쯤.

백무량과 주백천의 시선이 멀리 떨어진 지점에 가 닿았다.

“……아.”

강호 십 대 고수이자 곤륜파의 장문인.

백무량과 주백천의 스승.

주자령(株紫靈)이 한 사내의 발아래에 쓰러져 있었다. 얼굴에 핏기가 없는 걸 봐서는 이미 심맥이 끊어진 듯했다.

“사부님…….”

절망과 슬픔이 찾아왔지만, 백무량에게는 슬퍼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스승님을 죽인 사내의 행색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백련교에서 십 대 고수를 상처 없이 꺾을 수 있는 자.

‘백련교주……!’

그의 정체를 떠올린 순간 백무량은 퇴로를 재확인했다.

‘사형의 충격은 나보다 클 거야. 도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닐지도 몰라.’

백무량이 옆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자, 주백천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하나 그의 목소리는 젖은 얼굴과는 다르게 무서우리만큼 단호했다.

“갈 길이 바쁘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곤륜의 혼만은 보존해야 해. 스승님도 그걸 원하실 거다.”

주백천의 말에 백무량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과연 나중이 있을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스승의 시체를 외면한 채, 그저 우직하게 샛길로 향하는 길을 뚫어 낼 뿐이다.

“도망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

“쏴라!”

베고, 찌르고, 베이고…….

간혹 날아온 불화살에 살갗이 지져지기도 했다.

‘더럽게 아프네. 하여간 쪼잔한 새끼들, 불화살이라니…….’

백무량은 왼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심각한 내상 때문인지 선홍색 핏물이 묻어 나왔다.

그러다 마침내…….

곤륜산 하부로 향하는 샛길에 당도했다.

“먼저 가십시오, 뒤따를 테니까.”

백무량의 말에 주백천은 가만히 사제를 바라보았다가,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볼기짝을 때리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많이 컸구나. 사형한테 길도 양보할 줄 알고.”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무슨…….”

“입이 가벼운 건 여전하구나.”

사형제는 잠시 흐느끼듯 웃고는 고개를 들었다.

두 얼굴에 망설임은 어느새 사라졌다.

헤어질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기 때문에.

백무량은 어린 시절에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철없던 시절의 말, 하지만 틀림없이 그렇게 행동할 거라고 믿었던 말.

-저, 저는…… 알아주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진 않을 거예요.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 거고요.

백무량은 주백천에게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내가 영웅담의 주인공이 될게.”

“……뭐?”

주백천은 깜짝 놀란 눈으로 백무량을 바라보다가 애써 고개를 돌렸다. 십수 권을 들쳐 멘 어깨보다 지금의 걸음이 더욱 무거웠다.

하나 이대로 머뭇거려선 안 된다.

주백천은 운룡(雲龍)이 새겨진 패를 백무량에게 건넸다.

“이게 너를 지켜 줄 것이다.”

“누가 누굴 걱정한다고…… 어서 가십시오.”

“뒤따라오너라, 꼭!”

주백천과 세 학도사가 오솔길로 사라지자, 여유로웠던 백무량의 얼굴에 피로가 내려앉았다.

해치웠던 숫자보다 더 많은 백련교도가 나타난 탓이다.

백무량은 그들 중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구천검이라고 했던가?”

강호 십 대 고수이자 그의 스승님을 쓰러트린 사내.

화려한 관을 둘러쓴 남자, 백련교주는 백무량에게 조금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기뻐해도 좋다. 네가 가장 멀리 도망친 곤륜도다.”

백무량이 기수식을 취하기도 전에, 백련교주의 신형이 앞으로 향했다.

쿠궁!

백무량의 시야가 한순간 시꺼메졌다.

전신을 두들기는 격통이 거듭된 피로와 상처를 뒤흔들었다.

‘강하다…… 이것이 바로 백련교주인가?’

거친 숨을 토해 낸 백무량은 자신의 뒤를 지나간 네 학도사를 떠올렸다.

자신은 아마 그들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아쉬워할 때가 아니야.’

백무량은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 냈다.

백무량의 우수(右手)가 숨 쉬듯 자연스럽게 구천화우검을 펼쳐 냈다.

캉!

백련교주의 주먹과 검이 부딪치며 시뻘건 불꽃이 위로 번졌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백무량의 눈에 실핏줄이 터져 시야가 빨갛게 점멸했다.

전신이 바스러지는 충격이 온몸을 적셨다.

백무량의 몸과 마음은 분명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직, 아직이야. 버틸 수 있어.’

사형을 포함한 네 학도사가 곤륜산에서 벗어날 때까지 버틴다!

백무량은 끊임없이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손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리기만 할 뿐, 공력을 실을 수가 없었다.

백련교주의 눈가가 둥글게 휘었다.

그는 자신이 벼랑 끝에 몰렸음을 알고 있었다.

부웅!

백련교주가 휘두른 주먹이 공기를 찢고, 산에 이는 바람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야말로 괴력난신.

백련교주가 가진 힘은 이치(理致)에 맞지 않았다.

백무량은 아득해진 의지를 다시 붙잡고, 단전에 모아 둔 모든 내공을 손에 쏟아부어 백련교주의 복부를 밀쳤다.

파앙!

타격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없었다고 봐야 무방하다. 백무량의 손은 그저 백련교주를 잠깐이나마 멈춰 세운 것에 불과했으니까.

백무량은 그렇게 얻은 잠깐의 여유로 굽어진 허리를 세웠다. 떨리는 손목을 진정시켜 검을 꼿꼿이 들어 올렸다.

한 번의 검로가 고작.

그 검로조차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뒤따라가겠다는 약속은커녕…….’

살 수나 있을까?

백무량이 패배란 단어를 떠올리던 그때.

평생의 수련으로 구축해 온 심상(心象)과 현실이 겹쳐졌다.

쏴아아…….

바다였다.

곤륜의 무학으로 이루어진 검의 바다[劍海]가 백무량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에는 역대 마교에 의해 유실된 무공이 있었다.

백무량의 눈가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저 바다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백련교주에게 대항할 수 있을 텐데!’

백무량은 본능적으로 대오각성의 기연임을 깨달았다. 곤륜파가 지금까지 잃었던 모든 무학이 저기에 있었다.

‘익힐 시간만 있었다면…… 곤륜의 무도가 나로 인해 완성될 수 있었을 텐데!’

곤륜의 실전된 무학으로 이루어진 검해 앞에서 백무량은 하염없이 야속했다.

하나 지금은 기연을 수습할 때가 아니었다.

백무량의 의지는 오로지 눈앞의 백련교주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떠올렸다.

지키지 못할 약속, 뒤따라가겠다는 약속을.

‘일검에 모든 걸 담는다.’

검해에 이는 파도 한 줌.

이름조차 잊힌 채 유실된 무학을 검에 담아, 가빠진 숨으로나마 있는 힘껏 밀어젖혀서!

‘나의…… 마지막 검!’

백무량은 핏발 선 눈으로 백련교주를 노려보았다.

평생의 검의가 담긴 검이 간합을 꿰뚫고 백련교주의 명문을 향해 맹진했다.

곤륜검해, 무명식(無名式).

콰콰콰!

검기로 이루어진 파도가 주변 다섯 장을 뒤덮는 찰나, 백무량은 백련교주에게서 처음으로 당황을 엿보았다.

조금도 통하지 않았던 구천화우검과는 분명 달랐다.

쏴아아…….

검해의 파도가 조금씩 가라앉으며 백련교주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뺨에 검상이 사선으로 길게 나 있었다.

“대단하군.”

단 한순간.

백무량이 펼친 검술은 앞서 싸웠던 장문인 주자령을 능가했다.

그것을 알기에 백련교주는 백무량을 동정했다.

믿을 수 없는 재능, 그가 본 적이 없는 무재였다. 만약 이자가 살아남아서 무공을 더욱 키운다면 미래는…….

“다만, 여기서 끝이다.”

불길을 향해 날아가는 나비의 모습은 얼마나 덧없고 아름다운가.

백무량의 일 초는 그런 나비와 닮아 있었다.

다가가고 나면 재가 되어 사라지듯, 백무량 또한 한계를 넘은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쿨럭!

피를 토한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곤륜의 검은 바다와 같으니…….”

“…….”

한계에 다다른 백무량은 곧 자멸한다.

그러니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도 되는 것을, 백련교주는 백무량의 말을 경청했다.

“아무리 퍼낸다고 한들 마르지 않는다. 너희는 끝내 곤륜의 검해(劍海)에 패하고 말 것이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백무량의 모습에, 백련교주가 두 손을 모아 올렸다.

“미완(未完)이지만, 네 초식에서 극의(極意)를 보았다.”

“으극, 커헉!”

“나에게 상처를 남긴 건 천무검성 유성백 이후로 처음이다. 네 재능에 경의를 표하지.”

“네 이놈……!”

“개화(開花)하지 못하겠지만.”

저벅, 저벅.

그 말을 끝으로 백련교주가 오솔길을 따라 사라졌지만 백무량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격렬한 기침 소리와 함께 피가 터져 나왔다.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그보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지금쯤이면 네 학도사도 곤륜산에서 벗어났으리라.

백무량은 그제야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았다.

‘글렀구먼. 젠장.’

내공은 말랐고, 몸을 움직일 힘은 쥐뿔도 남지 않았다.

백무량은 털썩 주저앉아 어린 시절에 주백천에게 던졌던 농담을 떠올렸다.

무림의 방벽. 그 의로움을 누가 알아주냐고.

‘영웅이 되지 않겠다고 했었지.’

어렸을 적에 백무량은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길 거부했다. 모두가 의로움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곤륜파의 역사를 가여운 희생쯤으로 여겼다.

‘내가 멍청했던 거야.’

하나 지금은 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 역시 곤륜파의 도사였음을…….’

철퍼덕.

백무량이 뒤로 무너졌다. 점혈로 막아 두었던 혈맥이 터지며 몸 아래에 피 웅덩이가 고였다.

바로 그때.

주백천이 건넸던 운룡패가 스스로 불타기 시작했다.

마주하다

‘끝났나.’

백무량은 제 죽음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수백 년 동안 유실된 곤륜 무공의 단서를 겨우 얻게 되었는데, 익혀 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그렇게 죽음의 순간을 더듬고 있자니 자신의 유언이 떠올랐다.

‘영웅담의 주인공, 그리고 곤륜의 도사라…….’

어느 쪽도 이루지 못했나.

백무량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수련을 더욱 열심히 했다면 백련교주에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검해를 수습할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됐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더는 미련 가지지 말자.’

백무량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커흐윽…… 헉!”

백무량은 본능적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수, 숨이!’

호흡이 되지 않으니 눈이 저절로 떠졌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온통 암흑뿐인 공간 속에서 백무량의 눈에 핏발이 섰다.

‘죽음이 이런 거였나?’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백무량은 사방을 더듬거렸다.

손가락에 건조한 부스러기가 느껴졌다.

‘이 감촉은……?’

의문을 품은 백무량이 온 힘을 다해 앞을 후려쳤다. 그러자 흙먼지 따위가 피부를 두드렸다.

‘단단해. 단단하지만…… 부술 수 있어.’

그런 판단이 든 순간, 백무량은 온몸의 힘을 쥐어짜서 토벽을 후려쳤다.

쿵!

손등에서 진득한 감촉이 일었다. 피부가 벗겨지고 핏물이 흐르는 듯했다.

고통이 몸을 좀먹고 점점 호흡이 가빠졌지만, 백무량은 멈추지 않았다.

죽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백무량의 몸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대로 멈추면 안 돼!’

백무량은 쉴 새 없이 벽을 두들겼다.

한 번, 두 번…… 숨을 아껴 가면서 삼십 번.

그것도 사십 번이 넘어가자 백무량의 정신이 흐려졌다.

‘내가 죽은 게 아니라면. 아직 살아 있다면…… 얼른 나가서 사형을 도와주어야 하는데…….’

이상할 정도로 활력이 없었고, 뜨거운 모래로 단련했던 주먹이 물렁물렁했다.

어디 그뿐이랴.

‘내 공력이 모두 사라지다니!’

멀쩡히 있던 공력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게 말이 되나?

백무량은 한순간 치솟은 분노를 담아 오른손을 휘둘렀다.

쾅!

그 일 권 덕일까?

칠흑 같던 어둠 속에서 한줄기 서광이 비쳤다.

“제발!”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조금만 뚫으면 될 것 같은데 더는 공력도 기력도 남아 있질 않았다.

백무량이 손을 허우적거려 보았지만 한 줌의 흙도 파낼 수가 없었다.

시야가 가려진 건지, 아니면 정신을 잃어 가는 건지 한줄기 빛마저도 사라지고 있었다.

‘제길, 제기랄……!’

마지막 숨을 쥐어짠 행동이었거늘.

손을 허우적거리던 백무량의 전신이 축 늘어졌다.

“이보시오! 거기 누가 있는 게요?”

어둠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꿈이라고 여기면서.

***

“허억!”

상반신을 일으킨 백무량은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어둠 속에서 토벽을 후려치던 감촉이 아직 선명했다.

‘빠져나온 건가? 아니지, 아니야. 못 부쉈었잖아.’

백무량은 마지막에 들렸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사람이 구해 준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백무량이 허름한 가옥을 둘러보다가, 무심결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백무량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광경.

구름으로 뒤덮인 절벽에 수많은 족적(足跡)이 새겨져 있었다.

백무량은 그 발자국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운룡대팔식?’

백무량은 고통마저도 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눈이 삔 게 아니라면 곤륜파의 역대 도사들이 남긴 수련의 흔적이었다.

이곳은 틀림없이 곤륜산이다.

‘맙소사!’

자신이 백련교주에게 죽은 게 아니었단 말인가?

백무량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명문혈이 완전히 관통당했었거늘.”

혼잣말을 중얼거린 백무량이 곤륜산의 풍광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정신을 차린 게냐?”

낯선 목소리에 백무량의 고개가 돌아갔다.

문밖을 바라보니 어느 누더기 차림의 노인이 짚단으로 엮은 바구니를 정리하는 것이 보였다.

처음 보는 인물이었지만, 말투를 보니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일 터.

백무량은 황급히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어르신께서 저를 구해 주신 모양이로군요. 저는 백무량이라고 합니다.”

“백무량?”

기쁜 듯 혹은 슬픈 듯.

노인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무 자에 량 자라…… 귀한 이름이구나.”

“네?”

백무량으로선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무량이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귀한 이름이었나?

백무량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노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야, 그래서 몸은 괜찮더냐?”

척 봐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니 뭐라 말은 못 하겠지만, 이 나이 먹고 아이 소리 들으니 어색한 것도 사실이었다.

백무량이 난망한 표정을 짓자 노인은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하하, 아이라는 말이 싫더냐?”

“아주 어릴 때나 듣던 말을 지금 들으니 좀…….”

“어릴 때? 그것 참 이상한 말이구나.”

노인은 바구니에서 약초와 열매를 꺼내며 하던 말을 이었다.

“열두세 살 남짓한 아이가 어릴 때를 말한다면 도대체 몇 살을 말하는 것일꼬?”

“예?”

백무량은 그제야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이런 미친!’

백무량의 눈동자에 경악이 어렸다.

자그마한 체구에, 앙증맞은 손.

손등에는 피로 물든 붕대가 매여 있어, 토벽을 후려치던 게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숨이 턱 막혔다.

“허, 허허, 허…….”

백무량이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고 헛웃음만 흘리고 있자, 노인은 딱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충격이 덜 가신 모양이구나. 하기야, 산 채로 매장을 당했으니…….”

생매장이라니? 예상이 진짜였단 말인가?

백무량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가요?”

“쯧쯧, 그래, 누군가가 묏자리에 널 묻어 놨더구나. 원래 유골은 훔쳐 갔는지 사라져 버렸지. 어떤 흉악한 놈이 그랬는지 몰라도 천벌을 받을 것이야.”

혀를 차던 노인은 백무량의 표정을 보곤 아차 싶었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탕약을 끓일 때까지 편하게 쉬고 있거라. 험한 일을 겪었으니, 정기가 많이 쇠했을 것이다.”

“자, 잠깐!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백무량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어디에 묻혀 있었습니까?”

“네가 안정을 찾게 되면 그때 말해 주마.”

“하지만…….”

“어허!”

노인은 백무량을 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미음(米飮)을 끓이는 데 열중했다.

‘당장 듣기는 어렵겠구나.’

백무량은 멍한 표정으로 가옥 안을 둘러보았다.

‘아까부터 허름하다고 느끼기야 했지만…….’

백무량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끼가 껴 틈이 벌어진 나무 천장에 기둥을 지탱하는 경첩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목공에 일천한 백무량도 알아차릴 만큼 보수가 전혀 되지 않은 집이다.

‘천장에 있는 글귀를 보면 분명 곤륜파의 건물 같긴 한데…….’

곤륜운평천하(崑崙雲平天下)!

곤륜의 구름이 천하를 다스리니.

곤륜의 도사라면 항시 가슴속에 간직하는 글귀였다.

그걸 본 백무량의 마음에 작은 희망이 싹텄다.

‘이곳이 정말 곤륜산이라면 백련교주와의 싸움에서 얻은 검해의 실마리를 사문에 남길 수 있을 테니까.’

백무량이 곤륜파로 돌아가야겠단 각오를 품을 때였다.

“자, 식기 전에 먹거라.”

노인이 탕약과 미음을 건넸다.

전자는 쓰고, 후자는 밍밍했다.

“크으.”

백무량이 인상을 찡그리자, 노인이 부드럽게 타이르기 시작했다.

“허허, 맛이 없어도 참아라. 빈속에 굳은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탈이 난다. 한동안은 미음만 먹어야 할 것이야.”

그것은 백무량도 아는 바였다. 밍밍하여 인상을 쓰긴 했지만, 군소리 없이 넙죽넙죽 퍼먹은 것도 그래서였다.

죽을 다 비운 백무량이 질문했다.

“저어, 존함이…….”

노인은 백무량에게 미음을 퍼 주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현노윤(現路胤)이라고 한단다.”

‘현노윤이라?’

노인의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 백무량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한 곤륜파의 도사 중 현노윤이라는 사람은 없다.

‘곤륜뿐만이 아니야. 청해에 있는 무인 중에서도 없지.’

그가 아무리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어도, 지금 상황에선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청해의 무인도, 곤륜의 무인도 아니라면 누구겠는가?

‘설마 백련교?’

백무량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노윤은 그가 죽을 다 비운 것이 마음에 든다는 듯 흐뭇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다 먹었으면 이리 다오. 그릇 내가마.”

“감사합니다, 어르신.”

백무량의 경계심은 여전했지만, 현노윤의 태도에는 배려가 배어 있었다.

그의 정체는 확실치 않으나 눈에 온정이 담겨 있고, 행동 또한 온화한 것은 사실이었다.

쉽게 보기 힘든 선인(善人)이리라.

백무량은 현노윤에게 편안한 음색으로 물었다.

“여기 곤륜산 맞죠?”

“그럼.”

“그렇다면 곤륜파와 백련교는 어떻게 됐습니까?”

“음? 곤륜파는 그렇다 쳐도 백련교라니?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아직도 백련교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던가?”

현노윤의 말에 크게 당황한 백무량은 자신이 아는 바를 늘어놓았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백련교가 곤륜을 친 사실을 아무도 모른단 말입니까? 도학을 닦는 이들은 사문의 귀물을 들고 도주하기 바빴고, 무공을 익힌 이들은 마교를 막느라 제 한 몸을 바쳤는데…….”

백무량이 질문을 쏟아 내자 현노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까지 항상 평온한 모습이었던 그의 변화에, 물어봤던 백무량이 불안해질 정도였다.

“기이한 아이로다. 어찌 칠십이 년 전의 이야기를 아는 게냐?”

칠십이 년!

백무량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노인은 백련교의 습격이 칠십이 년이나 전에 있던 오래된 일이라고 칭했다.

백무량의 눈동자가 불안함으로 커졌다.

“칠십이 년 전이라니?”

그 모습을 본 현노윤은 복잡한 감정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칠십이 년 전이래도 아픈 역사를 꺼내는 건 너무도 버거운 일이었다.

“칠십이 년 전, 천산산맥을 넘은 백련교가 곤륜파를 공격했지. 곤륜의 도사들이 분전했지만…… 모두가 살아남지는 못했단다.”

“예?”

현노윤의 말에 백무량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이 어려진 걸 확인했을 때보다 더욱 큰 충격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런 백무량에게 현노윤의 말은 어떤 것보다도 잔혹했다.

“곤륜파의 명맥이 그때 끊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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