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318화 (318/318)

<검신재생 318화>

318. 검신(劍神)은 재생(再生)한다.

“내가 보이는가.”

사내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저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는 건 처음이었다. 여태까진 쇠를 긁는 듯한, 마치 무저갱 속에서 들릴 법한 목소리였건만.

지금은 마치 똑같은 사람이 말하듯이 정확했다.

천무백은 가만히 사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 코, 입. 평범하다. 머릿속에 남을 것 같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이목구비.

“날 볼 수 있다는 건, 그대의 감각이 나를 완전히 느낄 수 있다는 뜻이지.”

전과는 판이하였다. 아무 설명 없이 그저 검을 들이대고, 저승으로 가려던 자신을 막았던 여태의 모습과는 달랐다.

어째서일까.

무심해 보이는 얼굴에 떠오르는 건, 희미한 놀람 또는 기쁨이었다.

‘기쁨이라…….’

대체 무슨 목적일까. 어떤 이유로 자신의 영면을 방해하는 걸까.

지금, 그 이유를 확인할 순간이 왔다.

우우웅!

철신고검이 울었다.

사내도 더는 말없이 검을 겨눴다.

천무백의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듯 팽팽해졌다. 검을 꽉 쥔 두 손은 굳건하게 흔들림조차 없었다.

검에서부터 손목, 팔꿈치, 어깨로 이어지는 일직선.

물아일체(物我一體)를 넘어 검과 하나가 된 신검합일의 순간.

천무백은 어째서인지 긴장되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상대를, 또 다른 강자를 눈앞에 마주 선 듯한 느낌이다.

이미 오래전, 군천악을 베면서 선언했던 검극.

지금 올라선 위치가, 칼끝, 가장 마지막일까.

확인해 보면 그만이다. 지금 천무백은 검 끝에 확신을 담았다.

이번엔 상대가 먼저 움직였다. 지금까지 늘 공세를 기다렸던 상대가, 마치 첫수를 양보해 준다는 듯한 느낌으로 기다리던 놈이.

오히려 전력을 다한 얼굴로, 먼저 검을 찔러온다.

정직하고도 깨끗한 움직임.

곧게 앞으로 뻗어가는 완벽하고 깔끔한 검로.

빌어먹을 정도로 굳건해, 도저히 막을 수 없었던 그간의 검로가 또 한 번 눈앞에 재현된다.

하나 그 순간, 천무백은 어쩐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검로는 그대로다. 무시무시한 위력이 모든 감각으로 느껴졌지만, 그대로다.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그래, 자신이 성장한 것이다. 내가 강해진 거다.

검이 마치 부풀어 오르듯 눈앞에서 확장됐다. 단숨에 공간을 압축한 압도적인 속도. 벼락보다도 더 빠른 그 속도로 검격이 작렬했다.

이전에는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늘 실패했다.

“……!”

무심한 사내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천무백 역시 똑같은 자세, 같은 움직임으로 검을 찔러갔다.

단순한 직선의 검로.

깔끔하고 완벽한,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정직한 검로.

후아아아앙!

검끝과 검끝이 부딪친다.

극도로 압축된 작은 점이, 모든 힘이 압축되어 어떤 것들보다 강력한 폭발력을 갖춘 두 점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소음도, 충격파도, 폭발도 없었다.

압축된 두 점이 부딪치며, 세상 모든 걸 빨아들였다. 격돌하는 순간 일시적으로 진공상태가 되면서 전부 빨아들였다. 소음, 충격, 파동, 공력. 마치 무저갱처럼.

그리고 그 순간, 버티지 못한 검이 깨졌다. 대나무를 쪼개듯이, 검 끝에서부터 수십 가닥으로 쪼개졌다.

“…….”

천무백은 철신고검을 그대로 사내의 목에 겨눴다.

부서져 나간 건, 그가 아니라 사내였다.

그러니까…….

“내가 이겼다. 이 새끼야.”

천무백이 즐겁게 웃었다.

수십, 수백의 패배 끝에 지금.

검극.

천무백은 그곳에 오롯이 서서 세상을 오시했다.

목에 검이 겨눠진 채, 사내는 놀란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보다, 이내 단념하듯 눈을 감았다.

순간 의아한 감정이 불쑥 솟았다. 차사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의 편린. 패배의 안타까움 따위가 아니라, 순수한 기쁨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뭐냐? 왜 나한테만 이딴 짓을 벌인 거지? 어째서 내 죽음만 기어이 막은 것이냐?”

“난 저승차사다.”

천무백의 얼굴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저승차사라고? 네가?”

본인을 저승차사라고 주장하는 차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백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야, 그럼 직무소홀 아니냐? 저승차사가 죽은 영혼 저승에 데려다주는 역할이지. 넌 날 막았잖아?”

“……많은 이유가 있다.”

천무백은 험상궂게 윽박질렀다.

“이유는 지랄! 그래, 저승차사 목도 잘리면 소멸하냐?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천무백은 마음 같아선 이놈을 씹어 먹고 싶었지만, 자세한 이유를 듣고자 최대한 인내했다.

“똑바로 얘기해. 아니면 진짜 가만 안 둬.”

“얘기하겠다.”

“아니지. 잠깐만. 너도 고통은 느끼냐?”

“고통?”

“네가 저승차사라면, 진짜 고통을 느끼냐고.”

“피육을 베는 것이 아니라, 영(靈)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공격이라면, 응당 느낀다.”

“영에 영향을 끼칠 공격이라. 그게 뭐지?”

“그대가 내 검을 부수고, 내 목에 겨눈 검을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오로지 극의(極意)에 닿은 존재만이 가능한 것. 그대가 검극에 오른 증명이다.”

“아하. 그렇단 말이지.”

어쨌든 고통을 느낀다는 거지?

천무백의 입가에 재밌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천천히 검을 거둬들였다. 순간 차사는 불안감을 느꼈다.

불길한 웃음이었다.

천무백이 소매를 걷더니 손가락 관절을 풀었다.

우두둑, 우둑.

“그럼 좀 맞자.”

“……뭐라?”

“딱 소멸하기 직전까지 패 줄게.”

“지, 지금 차사를 두들겨 패겠다는 것이냐?”

“뭐, 차사 몸엔 주먹 못 휘두른다는 저승법이라도 있냐?”

천무백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차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 * *

“그래. 이제 이야기나 들어보자.”

천무백이 손을 탁탁 털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차사가 피멍이 든 얼굴로 비척거리며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맷집은 그 정도 되어야 차사 짓 하는구나. 제법이더라.”

“……내가 괴물을 키웠군.”

“뭘 키워? 툭하면 내 영면을 막은 놈이.”

“나는 널 차사로 키운 것이다.”

천무백의 입이 쩍 벌어졌다.

차사라니. 이 무슨 해괴한 소리란 말인가. 천하의 천무백도 순간 머리가 굳은 듯 생각이 이어지지 못했다.

차사가 말을 이었다.

“가끔 그런 영(靈)이 있다. 탄생 자체가 특별하며 불가해한 존재가. 하나를 익혀도 열을 깨닫고, 십 년의 경험을 일 년만으로 극복하는 특별한 영혼이.”

“…….”

“그런 영을 타고난 존재다. 평범히 살았으면 신선이 되었을 것이고, 악하게 살았으면 마귀가 되었을, 특이한 영이다.”

천무백은 팔짱을 낀 채 턱을 까딱거렸다. 오만한 태도였지만 차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대가 오성물의 선기를 흡수한 게 우연처럼 보이나? 그저 단순한 기연으로 느껴지나?”

천무백은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선기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머무른다. 이승의 인간들에겐 허락되지 않는 힘이지. 오래 수련한 도인들만이 간신히 극히 일부를 경험할 뿐. 그대는 달랐다. 그것이 그대의 영혼이 특별하단 증명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날 저승으로 못 가게 막은 것이…….”

“차사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자 삶을 거듭한 것이다.”

“…….”

“끊임없이 강해져, 영적 세계에 물리적 간섭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지. 그대들이 말하는 입신지경이니, 절세지경이니, 인외지경이니,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은 극의(極意)에 닿게끔 끊임없이 널 계속해서 이승으로 돌려보냈다.”

“…….”

“그리고 지금, 너는 극의에 닿았다. 날 보고, 날 느끼고, 끝내 나에게 아무런 문제없이 간섭했다. 그대는 검극에 닿아 영적 세계에 간섭이 가능한 존재가 됐다. 즉, 나와 같은 존재가 됐다는 의미다.”

극의.

검극이란 개념은 정립된 게 없이 희미했다. 하나 지금 무엇인지 확실해졌다.

물리적 세계, 즉 이승을 넘어 영적 세계인 저승에까지 물리력을 끼칠 수 있는 경지.

그것이 바로 검극이다. 이승의 끝, 저승과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서서 전혀 다른 두 세상에 간섭할 수 있는 경지인 셈이다.

하지만 설명에도 이해가 안 되는 점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날 왜 차사로 만들려고 한 거지? 단순히 영혼이 특별해서? 저승에 차사가 너밖에 없나?”

“아니. 많다. 그러나 내가 필요로 한 건, 염라께서 필요로 한 건 평범한 차사가 아니다.”

“평범한 차사?”

“나머지 얘기는 저승으로 가는 길에 하지.”

차사가 천천히 일어나자 주위 지형이 바뀌었다. 천무백은 생소한 감각에 주위를 둘러봤다.

“신기하군.”

“저승 가는 길이다.”

“삼도천은 없나?”

“뱃사공이 노잣돈을 과하게 요구해서 요즘 다른 길로 우회한다.”

“거, 퍽이나 웃긴 저승길이로군.”

“…….”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주위 공간이 휙휙 바뀌었다.

차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승차사라고 다 나 같은 존재는 아니다.”

“그럼?”

“나는 차사 중에서도 가장 오롯이 서 있는 존재.”

“그러니까 네가 대가리라는 거네?”

“……경박한 말이지만 그렇다.”

차사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이승의 생명체들에겐 죽음이 있듯이, 저승의 존재들에게 소멸이 있다. 하지만 소멸하는 경우는 극히 없다. 사실상 영생의 존재들이지.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자(死者)를 인도하러 간 어린 차사들이 왕왕 소멸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멸한다고?”

“죽어서 저승에 가야할 작자들이 죽음을 거부하고 차사를 소멸시킨 것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차사를 소멸시킨다고? 천무백도 이제야 지금 눈앞의 차사에게 한 방 제대로 먹여 줬는데?

“영적 세계에 간섭은 불가하다면서? 그럼 소멸시킨 놈들이 다 극의에 닿은 자인가?”

“아니. 그건 아니다. 그대를 제외하곤 누구도 영적세계에 관여할 수 없다. 하지만 애당초 영혼이 육신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영적 세계로 튀어나가지 않으면 차사가 데리고 갈 방법이 없다.”

천무백은 무언가 머릿속에 잡힐 것 같았다.

육체에 억지로 영혼을 붙잡는 자들…….

“역천자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 역천을 행해 억지로 수명을 늘린 자들. 강대한 내력으로 육체를 유지한 채,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걸 막는 자들.”

“…….”

“정해진 수명이 지났기에 차사들이 찾아가지만, 역천자들은 영악하게도 오히려 이승에 차사들이 들어오게끔 유도한다. 노련한 차사들은 넘어가진 않지만, 몇몇 어린차사들은 속임수에 빠져 이승으로 가지.”

“그리고?”

“뻔하다. 이미 역천을 행할 정도로 강대한 내력의 소유자들은 너희들이 말하는 절대고수다. 물리적 세계에 들어간 어린 차사들을 베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지.”

“…….”

“물론 나 같은 존재가 나서면 그런 놈들도 전부 단칼에 저승으로 인도할 수 있다. 문제는 나는 혼자고, 역천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많아진다는 점이다.”

천무백은 그제야 일련의 사건들이 이해가 됐다.

역천을 행해 억지로 수명을 늘리는 역천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많아졌다.

무공이 상향평준화되고 강대한 내력을 쌓는 심법이 더 발달하면서 가속화됐다.

하지만 역천에도 한계가 있는데, 내력의 고갈이 무척이나 빠르고 육체를 지탱할 수 없게 되면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도 그런 한계마저 깨부수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시간 동안 역천을 유지하는 역천자들이 있지. 그들이 차사를 베는 악귀들이다.”

차사의 얼굴에 분노가 타올랐다. 천무백은 팔짱을 꼈다. 머릿속에 무언가 잡힐 듯했다.

“하지만 그대의 도움 덕택에 최근에는 많은 역천자를 저승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곤륜 노괴들이었군?”

“그래. 그대가 곤륜에 있던 역천자들의 목을 베고 시체를 불태우지 않았나. 덕택에 근래 저승 분위기가 좋아졌지.”

천무백은 턱을 긁적였다. 곤륜의 노괴들. 그 추악한 괴물들을 천무백은 꽤 추적해서 제거했다.

대막의 늑대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어 반쯤 부셔놨고, 천무백도 발견하는 즉시 족족 단칼에 베었다.

한데도 곤륜의 노괴들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몇몇은 살아남아 곤륜을 떠나 서장, 그리고 그 너머까지 갔다.

천하의 천무백이어도 세상 끝을 넘어서는 놈들을 추적할 생각이 들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날 저승차사로 만들어서 그런 놈들을 다 저승으로 인도하려는 의도였다?”

“곤륜의 역천자들이 생겨나기 전에는, 저승으로 인도 못할 역천자의 숫자는 극히 적었다. 내가 나서면 해치울 수 있었지.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대를 차사로 만들려 했던 이유는, 내 후임이 필요해서다.”

천무백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곧 염라의 자리에 오를 존재, 나를 대리하여 역천자를 저승으로 인도할 차사가 필요하다. 그랬기에 그대를 만들었다.”

“하…….”

“오직 그대만이 나를 대리해 역천자를 천륜으로 되돌릴 수 있다.”

“그래서, 고작 네놈이 해야 할 일을 맡기기 위해서 나한테 그딴 짓을 저질렀단 거지?”

천무백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눈두덩이를 비볐다.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윽고 천무백이 고개를 든 채 입을 열었다. 깊고 낮은 울림이었다.

“내가 왜?”

목소리에 담긴 강렬한 적개심에 차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안다. 그대에게 설명조차 하지 않고 그대를 윤회의 늪에 빠지게 했으니까. 하지만 설명할 수 없었다. 그대가 내 목소리를 들은 건 저번 죽음 때가 처음 아니었나. 영적 세계에 간섭이 조금이나마 가능했을 때가 그때부터였으니까.”

천무백의 무심한 시선이 차사에게 향했다.

차사는 덤덤하게 얘기했다.

“나는 그대에게 강제할 수 없다. 그대가 원한다면, 이대로 다시 환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여기서 그대의 영혼이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다. 물론 환생 때는 이전과는 달리 모든 기억이 사라질 것이다. 그대도 차라리 그걸 바라겠지?”

당연한 일이다. 직전 전생의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이번만큼은 아닐 것 같았다. 백기, 능허, 제갈설아, 표국의 가족들까지…….

그 모든 기억을 가진 채 새로운 삶을 산다는 건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선택지가 그것뿐인가? 영혼의 여정이 끝나는 건 뭐지?”

“말 그대로다. 스스로 소멸을 선택할 수 있다.”

천무백은 침묵했다. 그 순간, 주위의 공간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천무백이 냉소했다.

“거, 저승이 무슨 이리도 평화롭냐.”

“저승이라고 칙칙하면, 여기서 살고 여기서 일하는 영혼들의 사기가 어찌 되겠나.”

차사는 답지 않게 농담을 했다.

주위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마치 운남의 천혜의 자연을 보는 듯, 다채로운 색과 푸른 강물로 눈이 화사했다.

천무백의 입이 불퉁해졌다.

“썅. 이럴 거면 진작 와 봐야 했는데. 그걸 계속 막아? 솔직히 말해 봐. 차사로 만들 속셈이 아니라 그냥 저승 가는 꼴 보기가 싫었던 거지?”

“……생각할 시간을 원하는 대로 주겠다. 결정을 내리면 말해다오.”

천무백은 팔짱을 꼈다.

“야.”

“……?”

“네놈 욕심에 내가 그토록 전생을 거듭했는데 뭐 보상 같은 것도 없냐? 어떻게든 날 설득하려고 해야 하지 않아?”

“물론 그렇다. 죽은 자는 재판을 받고 인간이나 축생으로 환생하거나 아니면 영원히 지옥으로 빠지지. 적어도 그대는 지옥에 가지 않는다.”

“허. 그게 보상 전부야?”

천무백이 비아냥거렸다.

“아니다. 모든 사자(死者)는 위와 같은 순서를 거스를 순 없다. 그러나…….”

차사는 말끝을 흐리다 눈을 찡긋했다. 천무백이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흘겼다.

“때론 규칙을 한 번쯤 깨도 되지 않겠나.”

“뭔데?”

“봐라.”

차사는 대답 대신 손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승이란 걸 몰랐다면 생각도 못했을 평화로운 그림같은 풍경, 그 안의 작은 집 앞 개천에서 누군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안력을 돋궈 남자의 얼굴을 보던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천무백은 귀신에 홀린 듯, 저도 모르게 사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뭐 하냐. 이젠 강태공 흉내 내고 있냐?”

사내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웃었다.

“흐흐흐, 여기선 민물 회를 먹어도 병에 안 걸립니다. 딱 기다리십쇼, 내 싱싱한 놈으로 회하나 떠 드릴 터이니. 주군은 칼질하느라 힘드셨을 텐데, 가서 좀 쉬고 계십쇼.”

그 험상궂은 얼굴을 보고 천무백은 웃었다. 기쁜 웃음인지, 즐거운 웃음인지, 그저 웃음이 흘러나왔다.

“능허 이 새끼…… 넌 지옥 갈 줄 알았는데.”

“제가 왜 지옥 갑니까. 이래 봐도 강호를 구한 영웅 중 하나인데.”

능허가 실실 웃었다.

천무백은 그제야 차사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모든 죽은 자는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정해진 순리를 따라야 한다.

하나 나와 관계된 존재라면…….

“저 차사가 주군이 말한 달걀 맞죠? 저치가 말하더이다. 곧 주군이 오는데 여기서 기다릴 거냐, 아니면 그냥 재판받고 환생하든 지옥 가든 할 거냐.”

“그래서?”

“내 재판받아도 죄가 없으니 당당하지만, 주군 왔을 때 기다려 줄 사람 하나 없으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내 이승 떠나기 전 약속한 것도 있구요.”

“약속?”

“다음 생에서도 주군을 모시겠다고, 그도 안 되면 저승에서 모시겠다고.”

“……아주 충신열사 납셨구나.”

“흐흐흐. 저는 고기 하나 잡아서 회 뜨고 있을 테니까, 주군은 들어가서 인사나 하십쇼.”

“인사?”

“거, 빨리 가 보십쇼.”

천무백은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작은 집의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천무백은 작은 감탄을 터뜨렸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얼굴 위로 떠올랐다. 웬만한 일로는 감정 변화가 없는 천무백도, 지금은 모든 삶을 통틀어 가장 격렬한 감정을 드러냈다.

천무백이 잠깐의 침묵 후에 간신히 쥐어짜내듯이 말했다.

“여전히 아름답구려, 당신은.”

“인생의 반려를 맞이하는데 아름답게 꾸미고 기다려야지요. 오셨어요?”

제갈설아가 빙긋이 웃었다. 같이 서로 늙던 모습이 아니라, 둘이 가장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모습으로.

천무백은 붉게 충혈된 눈을 손으로 비볐다.

“하…….”

이거였나. 차사가 준비한 설득이.

용케도…….

“설득되네, 하.”

“저승도 이승과 똑같은 세상이다. 희로애락이 있고, 갈등이 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다. 이곳에서 그대는 살아갈 수 있다. 그대가 원하는 인연들과. 다만 그러려면 번듯한 직장도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차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대가 수십, 수백 번의 전생을 거듭하며 오른 경지, 검극을 이대로 잊고 사라지는 것도 아쉬운 일이지. 곤륜의 역천자들을 포함한, 세상 모든 역천자를 벌하는데 그 칼을 쓰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설득이었다.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내가 여기 있으면, 나와 관련된 인연들 역시 저승에 머무를 수 있나?”

“그 사람들이 원한다면. 저기 그대의 반려나, 그대의 수하나 전부 저승에 남아 그대의 곁에 있기를 희망했다.”

“그렇군. 유백기는?”

“담담하게 환생의 길로 올랐다.”

“그 녀석은 그럴 줄 알았지.”

천무백은 가볍게 웃었다. 그간의 짐을 저버린 듯 후련한 미소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갈설아, 그리고 능허와 눈을 연신 마주하던 천무백이 불쑥 말했다.

“어이 달걀. 그럼 네가 내 상관인가?”

“그대가 차사직을 맡는다면, 내가 염라가 되니 상관이지.”

“혹시 내 행적 아나?”

“행적?”

“내가 패천검마로 살 때도 그렇고, 이번 삶에서도 명목상 검종의 종주였잖아?”

“……뭘 말하려는 거지?”

“패천검마나, 천룡검협으로서 검종의 종주를 맡으나. 어찌됐든 말이야, 내 명목상 상관은 천마였거든.”

“그래서?”

“난 상관만 보면 막 죽이고 싶더라고. 꽤 독특한 취미지? 상관살해가 이제 습관이 됐어.”

“……실수했군. 그대는 내 수하가 아니고, 나도 그대의 상관이 아니다.”

천무백이 가볍게 웃었다.

“그렇군, 그럼 달걀 네가 나한테 명령 내릴 권리도 없고, 내가 말 따를 필요도 없는 거네?”

차사는 한참 침묵하다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맘대로 해라.”

“좋아. 그럼 당장 움직이지.”

“지금 당장?”

차사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빨리 끝내고 빨리 와서, 좀 편히 쉬어야지.”

천무백의 시선이 다소곳이 서 있는 제갈설아에게 닿았다.

천무백의 기억 속, 가장 아름답고 젊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옛날의 감정이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차사가 헛웃음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면 좋지. 그대의 제일 목표는 이놈이다.”

차사가 내놓은 인물의 초상화와 간략한 신상 정보를 쭉 읽었다.

만천(曼倩)이란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저승을 골치 아프게 만든 최악의 역천자다.”

“꽤 유명한 인사군.”

“역천자의 시초다. 놈이 역천의 방식을 처음으로 만들어냈고, 발전시켜왔지. 그래놓곤 말도 안 되는 천도복숭아를 먹고 영원히 살게 됐다고 거짓부렁이나 늘어놓아 스스로 신이된 것처럼 으스대는 사기꾼이다.”

“거, 첫 출근부터 거한 일 맡기는 거 아닌가? 신입한테?”

“그댄 경력 있는 신입이다. 이승에서 살 때 적들에게 저승차사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욕먹지 않았나.”

“그렇긴 했지.”

천무백은 그리 중얼거리며 제갈설아를 바라봤다.

“내 다녀오겠소.”

“몸조심하세요, 자가.”

천무백은 어쩐지 온몸이 환희로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능허를 둘러봤다.

“가자, 능허야.”

“지금요?”

“그래.”

“회 다 떠 놨는데? 술도 데워 놨는데?”

“식기 전에 돌아오자.”

“그, 그럼 작전은 뭡니까?”

“뭐긴 뭐야. 내 방식대로 가야지.”

능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는 은은한 흥분이 떠올라 있었다.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익숙한 천무백의 방식.

“가자, 대가리 잡으러.”

“지금 잡으러 가는 놈들이 그 곤륜 노괴들의 우두머립니까? 누굽니까?”

“너도 아는 놈이다.”

“제가 안다구요?”

능허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이내 천무백이 건네준 초상화와 밑에 써진 신상명세를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새끼…… 서왕모의 복숭아 먹고 오래 살았다고 사기 치는 놈 아닙니까? 그냥 전설 속 허풍쟁이 아니었습니까? 얘가 대가리라고요?”

“걔가 살아있단다.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곤륜 노괴의 우두머리겠지.”

천무백이 철신고검을 허리춤에 단단히 동여매며 말했다.

“가자. 삼천갑자 동방삭 잡으러.”

천무백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매번 거듭되는 전생을 벗어나 끊임없이 세상을 질타하니.

검신은, 재생(再生)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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