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317화 (317/318)

<검신재생 317화>

317. 보인다, 네놈의 얼굴이

“당신, 그게 지금 뭐예요?”

“뭐가 말이오?”

능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맞은편을 바라봤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얼굴에 주름이 늘었지만, 그래도 미색이 여전한 설영이었다.

“오랜만에 우리 항아가 돌아오는데, 지금 꼴이 그게 뭐냐구요.”

“내 꼴이 뭐?”

“어휴, 어서 씻고 오세요. 분 좀 바르고.”

“이 나이에 무슨 분을 발라…….”

능허도 이제 어연 육순이 넘는다. 염왕을 죽인 독안사 능허란 명성도 이십 년 전이나 그렇고, 이젠 그 역시 무림에서 은퇴하여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노인네일 뿐이었다.

그런데 기녀들이나 바르는 분이라니……

물론 여기가 하남제일기루인 연화루라 분을 구하는 건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만.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분을 바르다니!

“어서요!”

설영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능허는 바로 꼬리를 말았다.

“크흠, 그, 피부 안 상하는 거로 줘.”

안 그래도 딸아이를 마흔 줄에 낳았으니, 남들이 보기엔 할아비처럼 보일 텐데.

조금이라도 피부 관리에 신경 써야지. 암.

능허는 세심한 손길로 분을 얼굴에 발랐다.

* * *

와장창창창!

연화루 맨 꼭대기에서 딸을 기다리던 능허는 또 소란에 눈살을 찌푸렸다.

딸이 오기로 한 날짜가 가까이 와서 당분간 문을 안 열려고 했다만, 요즘 매출이 영 아니라 억지로 열었건만…….

역시 또 소란이구나.

“뭐, 기루에 소란 없는 날이 어디 하루 이틀이겠냐만은.”

그래도 소란이 벌어지면 귀찮은 건 여전했다.

그래서 그렇게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곧 정리될 테니까.

한데 얼마나 지났을까. 소란은 진정되기는커녕 밑에서 계속 무언가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히려 소음이 더 심해졌다. 심지어 끔찍한 비명까지 들렸다.

이윽고 문이 발칵 열렸다.

“루주님, 루주님!”

“뭐냐. 일석아.”

“그, 그,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감당하지 못할 고수가 행패라도 치느냐? 내 이름 대고 꺼지라 해라.”

독안사 능허란 이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거워졌다. 염왕을 죽인 영웅이 아닌가. 그래서 어지간히 간이 큰 고수가 아니고서야 연화루에서 이름을 듣고도 행패를 부리지 못한다.

“그, 그게 아니라, 직접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발 말려 주십시오!”

“뭐? 뭔데?”

일석의 다급한 얼굴에 뭔가 심상찮음을 느낀 능허가 일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내려간 곳에서 본 건…….

온몸이 이리저리 비틀리고 깨지고, 부서진 사내들이 처참하게 누워 있었고.

그 중앙에는.

“확씨! 어디서 까불고 지랄이야! 내가 기녀인 줄 알고 엉덩이를 만져? 아니, 기녀여도 만져도 되는 줄 알아? 여기 연화루야! 이 쓰레기들아, 목숨은 살려 줄 테니까 다 꺼져!”

앳된 외모의 소녀가 연신 사내들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가녀린 외모였지만, 튀어나오는 말투는 험상궂기 짝이 없었다.

능허는 왠지 허탈해져서 맥이 탁 풀렸다.

그때, 소녀가 능허의 얼굴을 보고 반색했다. 소녀가 손을 높이 치켜들며 미친 듯이 흔들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능허의 딸, 항아였다. 얼굴은 자신과 단 조금도 닮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말투에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능허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우리 항아, 정말 이뻐졌구나!”

항아는 쪼르르 달려가 설영과 능허의 품에 안겼다.

허리춤에 달린 가느다란 검집이 달그락거렸다.

“히히. 아, 운이는 어디 갔어요?”

운이는 막내였다. 능허가 설영과 함께 여행을 갔다 낳은 두 번째 남자아이.

“표국에서 일하고 있다. 아마 오늘 저녁에 올 거다.”

“아하, 그 약한 녀석이 머리는 똑똑해서 다행이에요! 숫자 계산을 그리 잘한다면서요?”

“그래. 이 아비의 두뇌를 이어받은 거지.”

“흐음……”

“뭐냐, 그 눈빛은?”

“아니에요.”

능허는 어쩐지 딸아이가 꽤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다. 항아가 집을 나가서 이 년 만에 돌아왔으니.

이 년이라면 충분히 바뀔 시간이고, 더구나 같이 있는 사람이…….

“그 양반은 잘 지내더냐?”

“물론이죠. 숙부님과 숙모님은 알콩달콩 잘 지내세요. 두 분 다 마흔이 넘으셨는데, 아직도 젊어 보여요. 가끔 외지인이 보면 저를 좀 나이 차이 크게 나는 동생으로 볼 정도라니까요?”

“끙. 그 양반은 늙지도 않나…….”

“헤. 평범한 숙부님이 아니시잖아요. 천하제일인이신데.”

“그래, 그 잘난 천하제일 숙부에게 무공 좀 배웠더냐?”

“그럼요. 숙부님이 저보고 아빠보다 낫다고 했어요!”

“……그걸 그렇게 해맑은 표정으로 말하지 마. 가슴 아프잖니.”

“히히. 물론 저를 귀여워하셔서 해 주신 칭찬이겠죠. 아빠도 염왕을 죽인 영웅으로서 명성이 자자한데, 제가 어떻게 아빠 실력보다 낫겠어요?”

능허는 대답하지 않았다. 숙부, 바로 천무백이다. 검 쓰는데 제법 재능이 있다면서, 천무백이 자신에게 보내라고 했다. 딱 일 년만 한번 맡아 보겠다고. 하지만 막상 가르치니 재능이 더 좋은지, 일 년을 더 가르쳤다. 능허는 절로 불퉁한 마음이 생겼다.

한창 귀여울 딸아이의 2년을 뺏어가다니.

그 자식…….

‘자기 자식 없다고 우리 항아를 훔쳐가려는 속셈일거야.’

그런 불만을 투덜거릴 때마다 곁에 있던 설영이 혀를 찼지만 능허는 어쩐지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능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놀랐다.

귀여운 눈동자 안에서 타오르는 형형한 내력은 가공할 정도였다.

“그래도 네가 정말 재능이 있긴 있나 보다.”

능허는 천무백을 잘 알았다. 그저 기분 좋아지라고 그런 칭찬을 할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진짜 나보다 낫겠지.’

거참, 조금 씁쓸하구먼. 그래도 나도 꽤 칼 좀 쓰는데.

“그래서, 언제 돌아온다더냐? 네 숙부께선?”

“음. 글쎄요. 두 분이 이번엔 해동과 저기 바다 건너 왜국에도 여행을 다녀오실 생각이신가 봐요.”

“거참, 아주 놀자판이구나.”

“헤헤. 정마대전 때 많이 고생하셨으니, 즐겁게 여생을 보내는 거겠죠.”

“끄응. 그래도 얼굴 한번 보면 좋겠구만.”

능허는 천무백을 떠올렸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고, 같이 있다가 언제 칼맞을지 몰라 전전긍긍했지만.

안 본 지 너무 오래돼서 그럴까.

왠지, 그리웠다.

* * *

시간은 장강의 물결과 같다.

막을 수도, 거꾸로 되돌릴 수도 없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강물은 어떤 방해에도 꿋꿋이 흐른다.

그만큼 시간도 흘렀다.

늘그막, 항아가 낳은 손주의 재롱 보는 일로 소일거리 하던 능허는 늦은 밤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어 무거웠고, 눈꺼풀은 온갖 고름이 껴서 그런지 잘 떠지지 않았다.

잘 뜨이진 않아도, 보였다. 느껴졌다. 능허가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얼마나 기침을 토했을까. 그가 간신히 미소 지었다.

“너무 늦게 온 거 아니오?”

“늦게 오긴.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데.”

“다 죽어 가는 늙은이요, 내 설마, 하다 하다 나 죽기 전까지 얼굴 못 볼까 싶었소. 이제 그 짝도 오십 줄이 넘었건만, 아직도 서른 줄로 보이는구려.”

능허가 주름진 얼굴로 힘겹게 웃었다.

천무백이 쓰게 웃었다. 능허가 이제 몇 살이더라. 그래, 칠순. 칠순이 조금 넘었지.

무인치고는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 젊을 적 워낙 험하게 굴렀어야지.

아니면 애당초 주어진 천수가 그 정도일까.

능허는 삶의 막바지에 도달해 있었다.

“잘 지내셨소?”

“잘 지냈지.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아주 재밌게 노셨구만. 제수씨는?”

“오고 있다. 혹시나 싶어 내가 먼저 달려온 거고.”

“흐흐흐. 왜, 내가 걱정돼서 온 건가?”

“쯧. 다 늙은 노인네 뭐가 걱정된다고.”

“주군, 주군.”

“뭐, 말하거라.”

“좀 가까이 오시오, 내 할 말 있소.”

천무백은 그 말을 들어줬다. 산송장처럼 누워 있는 능허는 고개조차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천무백이 귀를 그의 얼굴에 가까이했다.

그때였다.

탁!

“…….”

능허가 천무백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웃었다.

“크흐흐, 말했잖소. 내 언젠가 주군 뒤통수 한번 후리겠다고. 으하하하. 내 평생의 소원이 이뤄졌소! 우하하!”

능허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미친 듯이 낄낄거렸다. 천무백 역시 빤히 쳐다보다 이내 같이 웃었다.

피할 수 있었고, 막을 수 있었다. 아니, 평범한 양인이 와도 피할 정도로 느린 손이었다. 하지만 천무백은 일부러 맞아줬다.

‘힘이 다 빠졌군.’

모든 기력이 다 빠진 손에, 천무백은 아련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갈 거냐.”

“가야지요. 암, 이제 가야지요. 내 평생 소원 다 이뤘잖소.”

“소원이 뭐였는데?”

“칼 차고 중원에 나서 높은 명성을 얻고, 아름다운 여인과 혼인하여,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자식을 보고, 한평생 모실만한 주군을 따라 큰 칼 휘둘러 호쾌하게 날뛰어보고, 그리고 그런 주군의 뒤통수 한 대 후리고. 이 얼마나 만족스러운 인생이오?”

“거, 재밌게 살았구나.”

“그래 재밌게 살았지. 정말로. 주군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난 뒷골목에서 칼 맞아 죽었을 거요. 흑도 인생이란 게 으레 그러니까.”

“…….”

“다음 생이 있겠지요? 만일 그렇다면, 이 독안사 능허, 그때도 주군으로 모시외다.”

“누가 받아 준다더냐?”

“흐흐흐흐, 안 받아 주면 어쩔 거요. 내 그냥 쫓아다녀야지 암.”

“언제는 내 곁에서 떠나고 싶다면서?”

“떠나는 것도 잠깐이지, 몇 년간 주군을 못 보니 내 마음이 적적하더이다. 남아로 태어나, 주군 같은 사람을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소.”

“……하여튼 입담은 기력 다할 때까지도 여전하구나.”

“으하하하하. 말했잖소, 내 기력은 다해도 입술하고 혓바닥 움직일 힘은 있다고.”

천무백은 말없이 능허를 쳐다봤다. 능허 역시 주름진 눈으로 천무백을 마주했다.

“모르겠다. 내 다음 생이 있을지.”

“없어도 걱정하지 마시오, 내 저승에서 모시리다.”

“……그래. 그러거라.”

“흐흐흐. 주군, 이제 내 할 말 다 했으니. 그만 내 아이들과 우리 설영이를 들여보내 주시구려.”

“알겠다.”

천무백은 밖으로 나갔다. 방안에는 설영과 항아, 운이가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방안에서 별안간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천무백은 씁쓸한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매번, 매 삶, 아무리 겪고 또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기분이야.”

또 누군가를 떠나보냈다.

늘 그랬듯이, 매 삶 반복되는, 그저 평범한 일일 뿐이다.

……낯설지 않은 일이다.

* * *

그렇다고 익숙한 건 아니다.

무수한 인생을 살아오며 감정이 마모될 법도 하건만.

천무백도 매년 이날만큼은,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때론, 내 욕심 같지만, 당신이 역천이라도 행해서 내 곁에 있어 주길 바랐소.”

작은 봉분 위에 술을 뿌리며 천무백은 중얼거렸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고, 반려로서 함께하던 제갈설아도 떠났다.

익숙한 일이다. 참으로 익숙한 일이고, 매 삶에서 반복해온,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야 할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했다.

한 인생의 마무리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의 삶을 마무리하는 이번 삶에서, 그 절반 넘는 세월을 함께 해준 제갈설아를 떠나보낸 건, 천하의 천무백이어도 감당하기 버거운 일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마지막이다.

술을 다 뿌린 천무백은 봉분 앞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뜬 순간.

세상이 어두워졌다.

천무백이 씁쓸하게 웃었다.

“한 팔십 년 만인가.”

창천검신으로서 죽고, 천무백으로서 팔십 년. 늘 반복해 오던 마지막 순간의 광경.

어두워지는 세상. 그리고 그 너머로 걸어오고 있는 한 남자.

앉아 있던 천무백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을 달려가며 기력이 서서히 부족해짐을 느끼던 그의 신체가 어느 순간보다도 활발하게 움직였다. 마치 전성기 시절, 젊은 시절의 육체로 되돌아간 듯이.

천무백이 철신고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검집에서 피어오른 서늘함이 주위를 잠식하던 어둠을 일순 물리쳤다.

다가오던 사내가 마치 놀란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수십, 수백 번 마주하는 사내.

이 지독한 윤회의 고리 속에서 온갖 고통을 안겨 주던 정체불명의 사내.

그 사내의 얼굴을 본 순간,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보였다.

표정을 알 수도 없고, 그래서 감정을 알 수도 없어 싸우면서 심리전조차 할 수 없던 아무것도 없는 맨 얼굴.

이목구비 따위는 보이지도 않던 형체가.

“보인다. 네놈의 얼굴이.”

철컥.

철신고검이 겨눠졌다. 그 끝에, 이제는 얼굴이 명확히 보이는 정체불명의 괴인.

그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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