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13화>
313. 너 뭐냐고, 너.
“그런가. 그대가 천룡검협 천무백인가. 그리고 검종의 종주고.”
천마는 놀란 표정도 짓지 않았다.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수하들 앞이라고 분위기 잡는 거야?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 힘들지 않아?”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다 보이거든, 화나고,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고. 아니야?”
천무백의 선안은 천마의 감정마저 엿볼 수 있는 가공할 능력이었다.
천마의 묘한 시선이 천무백의 전신을 훑었다. 천무백은 어쩐지 그 시선이 익숙했다.
“거, 더럽게 눈알 돌리네.”
상대의 전부를 관찰하는 듯한 눈빛. 요소요소를 파헤치고 분석하는 시선.
자신이 싸우기 전에 상대를 가늠하는 것과 똑같았다.
“원래 검종의 종주이면서 마도의 배신자인가? 아니면 천룡검협이면서 검종의 종주가 되어 마도에 잠입한 것이냐?”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싸움이 끝나고 숙청의 주요 명분이 될 텐데.”
아무렇지 않게 숙청을 언급하는 천마의 모습에 천무백이 혀를 찼다.
“숙청은 지랄, 네가 살아남을 수도 없는데 벌써 싸움 이후를 걱정하나?”
“…….”
“너에게 내일은 없으니까, 괜히 미리 걱정하지마.”
“오만하군. 뭘 준비해 놨나?”
“눈치는 빠르네.”
천무백은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마인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귀자모왕과 단명왕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마도 진채에 천무백이 들어온 지 거의 스무날이 지났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준비할 수 있는 긴 시간이었다. 이렇게 당당하게 앞에 나서는 모습을 보니 무언가 단단히 준비했을 터.
“너무 긴장하지 마. 열심히 하면 오래 버틸 수 있을 거야.”
“……기문진법인가.”
세상이 순간 어두워졌다. 진채를 덮은 듯한 천무백의 그림자가 실체화 되었다. 그림자 아래 주위의 지형과 천막, 울타리 모든 것들이 뒤섞였다.
섞이고 바뀌고, 뒤집혔다.
눈앞이 빙빙 돌고, 방향이 휙휙 바뀐다. 동쪽이 서쪽이 되고, 남쪽이 북쪽이 된다.
곁에 있던 사람이 사라지고, 본인의 위치 역시 망각한다.
천마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천무백을 향하고 있었으나, 주위의 마인들은 아니었다.
천마의 명령도 없이 갑자기 어디론가 훌쩍 움직였다.
“악독한 걸 만들었구나. 하나 같이 전혀 다른 환상을 보여 주며 끊임없이 헤매게 만드는 것이군.”
그것도 대규모 범위였다. 당장 진채에 들어선 마인 전부가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까.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몽혼마라광진이라고. 두 개의 진법이 중첩된 거야. 하나는 지금 환상을 머릿속에 심어 주는 거고, 하나는 모든 감각을 잃어버리게 하는 거지.”
“두 가지 기문진법을 중첩하다니. 너의 솜씨인가?”
“왜, 아닌 거 같아?”
“들었지. 검종 종주가 괴이천뇌를 포로로 잡았다고. 이럴 속셈이었군.”
“이제야 그걸 떠올리다니, 아무리 강자존 세상이라지만 좀 적당히 머리도 똑똑한 놈이 천마 자리에 앉아야 하지 않겠어?”
천마는 천무백의 조롱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뿔뿔이 흩어지는 마인들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을 뿐이다.
“진법에는 생문과 사문이 있기 마련이지. 하지만 진이 중첩되어 생문인 줄 알고 들어가면, 막상 사문이 튀어나오는 요체이군. 더구나 생문과 사문이 끊임없이 변화하니 깰 수도 없군.”
천무백은 솔직히 감탄했다. 기문진법은 밖에서 보면 요체를 어느 정도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진법 안에서 핵심을 짚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다.
“파훼법은 없군. 내 수하들이 뚫을 순 없겠어. 하지만 이런 진법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대라면 알 텐데.”
“뭐, 널 보니 안 통하는 것 같긴 한데.”
환각과 환영을 드리우고, 감각을 뒤바꾸는 기문진법은 엄청난 위력을 보여 준다.
하나 굳건한 정신력과 공후한 내력을 갖춘 이라면 현혹되지 않는다.
당장 천마는 무심한 얼굴로 천무백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천마뿐만이 아니다.
단명왕과 귀자모왕, 애염명왕 등 살아 있는 호법마왕 전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천마가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진을 파훼하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무인답지 않은 참혹한 죽음을 당할 터이니.”
“…….”
귀자모왕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나, 이내 단념했다.
‘홀로 천룡검협과 싸우실 생각이군.’
본인이 가진 실력에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천마다.
그를 걱정한답시고 곁에 있겠다고 하면 오히려 천마를 모욕하는 일이리라.
차라리 재빨리 명에 따라 이 진법을 파훼해야 한다. 최대한 빨리.
뒤늦게 파훼한다면 마인들의 상태는 정상이 아닐 것이며, 그사이에 백도가 일제히 공격해 온다면?
‘끔찍하다.’
물론 천마만 온전하다면 아무 문제 없다. 천마는 마도 그 자체다. 그가 있어 마도는 존재한다. 다른 마인이 아무리 죽어도, 천마가 굳건하면 마도는 오롯이 서 있다.
하지만 어쩐지 귀자모왕은 불길함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과연 무사하실 수 있을까.’
불경하게도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천룡검협 천무백.
그가 드리운 그림자인지, 아니면 진법으로 만들어진 깜깜한 어둠인지 모를 무언가가.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불길함의 원천이었다.
“…….”
그렇게 둘만이 남았다. 천마와 천무백. 딱 둘만이.
천마가 느릿하게 말했다.
“첫 수는 양보하마.”
천마가 그리 말했다. 그러나 말보다 그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파리라도 쫓듯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천무백은 순간 고개를 왼쪽으로 꺾었다.
화악!
무언가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뒤에 있던 천막 몇 개가 형태도 남기지 않고 증발했다.
천무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첫 수는 양보한다더니?”
“너는 마인의 말을 믿나?”
뻔뻔스러운 대답에 천무백은 혀를 내둘렀다.
“이야. 이거 참신한 놈이네.”
“너도 제법이야. 감이 좋아.”
어떤 호신강기도 찢어버리는 천마의 강기였다.
단순히 찢고, 불태우고, 파열시키고, 핏물로 변하게 하는 힘을 넘어선.
무엇이든 증발시켜 버리는 힘이다.
이해할 수 없는 극도의 고온이자, 파괴력의 집약체였다. 만일 천무백이 고개를 꺾지 않았다면, 귀곡광애로 대표하는 호신강기로도 쉽게 막아 낼 수 없었으리라.
천마가 손을 연신 휘둘렀다.
탄지공이 마구잡이로 강기를 쏟아 냈다.
천무백 역시 가만히 선 채로 장력을 쏟아 냈다. 일월기가 넘실거리며 탄지공을 전부 막아 냈다.
콰아아앙!
강기가 뒤섞인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두 사람 주변에 있던 모든 기물이 증발되고, 찢기고, 부서졌다. 암석이나 언덕, 자잘한 잡초같은 지형들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천마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강기로 공격하고, 상대 역시 강기로 막아 낸다.
상대의 내력과 그 운용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일종의 전초전.
천마는 검을 뽑아들었다.
동시에 그의 몸이 빛살처럼 쭉 늘어났다. 천무백 역시 철신고검을 뽑았다.
차가운 스산함이 주위를 덮쳤다.
천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상대의 공후한 내력과 운용 역시 자신에게 뒤처지지 않는다.
내력의 뛰어남과 운용 역시 절묘하다. 이런 자가 고수가 아닐 수가 없다. 어쩐지 흥분되는 긴장감에 천마의 몸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그렇다고 상대를 봐줄 생각은 없다. 즐거운 싸움이라고 일부러 풀어 줄 이유도 없다. 강한 상대일수록, 더 집요하게 철저하게 짓밟는 것이 천마의 성정이다. 강력한 일격이 위에서 아래로, 단번에 내리그었다.
과감한 일격이었다.
단순한 내려긋는 검격이 아니다. 한 획으로 그어지는 검격 속에 서넛의 변초의 묘리가 스며들었다. 회전을 해서 강렬한 회전력을 더했고, 검신이 진동하며 힘을 압축시켰으며, 강기를 날카롭게 벼르고 벼려 절삭력을 더했다.
까강!
한데 그걸 천무백은 아무렇지 않게 검으로 툭 쳐 냈다.
하나의 검격에 서너 개의 묘리가 담긴 일격을 가볍게 막아 내자 천마의 몸이 일순 흔들렸다.
하나 천마는 놀람 속에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적극 이용했다. 흔들리는 몸의 반탄력을 이용해 상체를 반쯤 돌리며 검을 베었다.
까가가가강!
하나 그마저도 천무백의 검에 여지없이 막혔다.
이번에는 단순히 막은 게 아니다. 동시에 천무백이 몸을 돌리며 발을 차올렸다.
꽈앙!
천마의 손이 천무백의 발을 잡아냈지만 마치 화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무백의 발차기 역시 내력이 담긴 각법이었고, 천마의 손 역시 장법이었으니.
사실상 막대한 강기의 충돌이었던 셈이다.
하나 이번엔 밀린 건 천마였다.
찰나의 순간 이뤄진 공방. 만일 누군가 봤다면, 아무 일도 없이 갑자기 충격파로 주위가 완전히 땅거죽이며 다 뒤집힌 것처럼 보이리라.
천마는 천무백의 강대한 내력에 놀랐다. 더구나 자신의 검로를 꿰뚫어 보는 듯한 움직임 역시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군. 귀자모왕 말대로야. 성장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건 미련한 짓이다. 당장 여기서 널 죽여야겠다.”
천마는 냉철했다. 그저 자신의 만족, 고독함을 이겨 내기 위해서 호적수가 필요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도 이럴진데 시간이 흐르면 천무백은 호적수가 아니다.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를, 마도를 집어삼킬지도 모를, 새로운 창천검신, 아니 그 이상이 되리라.
천마는 이를 악물고 내력을 끌어올렸다.
쿠르르르르르!
어마어마한 마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하나 천무백은 그 순간 오히려 더 깊이 달려들었다.
폭풍 속에 몸을 던지듯이.
놀랍게도 그 강대한 내력의 파도 속에서 빈틈을 발견해 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천마는 눈살을 찌푸릴 뿐 곧장 방어에 나섰다.
깔끔한 방어였다. 하나 천마의 심리는 꼬였다. 공세와 수세가 완벽히 바뀌었다.
한번 공세의 주도권을 쥔 천무백은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쾌검, 중검, 패검, 모든 검의 묘리가 시시각각으로 뒤바뀌었다. 천마는 착실히 하나씩 막아 냈다. 천무백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공격에 열중했다.
허점을 노리고 찌르고, 천마는 막는다. 다시 허점을 만들어 내도록 유도하고, 또 다시 벤다. 천마는 역시 막아 내며, 틈틈이 틈을 노린다.
천마의 방어는 철벽과도 같았고, 천무백의 공격은 핵심만 찔렀다.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치열한 공방이었다.
천마는 천무백의 얼굴을 살폈다. 싸움 중에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는 건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며, 필승의 조건이다.
물론 강한 상대일수록 더욱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감정을 숨기도 흔적조차 내보이지 않는 것에 능하다.
하나 천무백의 표정은 묘하게 찡그려지고 있었다.
“아직 어리구나.”
천마는 내심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실력과 공후한 내력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창천검신의 무공까지. 어쩌면 검존과 백도 무림이 만들어 놓은 기재일지도 모르지.’
검존이 창천검신의 무공을 전수해 주고, 백도무림이 힘을 합쳐 길러 낸 기재가 아닐까.
그런 추론이 불쑥 머릿속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천무백은 정말 감탄스러웠다. 하지만 아직 어린 건 분명했다. 감정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다. 얼굴에선 점점 표정 변화가 극심해졌다. 분명 당황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그 당황스러움은 천마의 생각과는 다소 달랐다.
천무백이 별안간 검을 크게 쳐 내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리고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천마의 몸이 일순 굳었다.
“야. 너 뭐냐. 반로환동 한 거냐?”
얼굴이 다르고, 체형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달랐지만.
천무백은 알았다.
천마가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눈동자에 경악이 번졌다. 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눈빛이 천무백에게 꽂혔다. 천무백 역시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눈동자에 냉정함을 담았다.
놈은.
“군천악. 이 새끼야. 너 뭐냐고.”
전대 천마인 군천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