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312화 (312/318)

<검신재생 312화>

312. 규율을 존중해

퇴각은 질서정연하게 이뤄졌다.

애당초 이번 전투는 천마가 싸움에 나서기 전에 말했듯이, 한번 찔러보는 것이다.

천마가 백도의 전력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 생각으로 말이다.

이 정도가 단순 위력 정찰이라니, 백도로선 억울할 일이리라.

종남 장문인 사망, 화산 장문인과 검후는 심각한 내상으로 전장에서 이탈. 곽용은 아직 검을 잡을 수 있으나 요양이 필요했다.

강호의 전쟁이 절대고수들의 싸움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전력이 급감했다.

물론 마도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다.

호법마왕 중 최강자였던 염왕이 터무니없이 죽었고, 야차왕도 죽었다.

하나 누가 봐도, 심지어 백도의 인물들도 이번 싸움의 승리는 마도라고 여겼다.

천마가 멀쩡했으니까.

특히나 천마의 압도적인 무력을 두 눈으로 목격한 무인들은 하나같이 암울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검후를 빈사 상태에 빠뜨리고, 곽용을 반쯤 무력화시켰으며, 남궁조의 칼끝이 피육을 베지도 못했다.

그나마 유백기가 나타난 이후 퇴각하는 모습에서 백도는 사기가 올랐지만, 천마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유백기를 상대하지 못해 도망치는 게 아니었으니까.

“백도 무림의 수준이 형편없구나.”

“끌끌끌, 당연한 일입니다. 교주님 앞에서는 한낱 조무래기들이지요.”

염왕이 죽자 귀자모왕이 천마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염왕 다음 서열인 단명왕은 퇴각 지휘를 맡고 있어, 귀자모왕이 자연스럽게 천마를 호종했다.

“교주님의 경지는 인외에 닿아 과거 창천검신을 넘었습니다.”

“그러한가.”

“소인은 저번 정마대전에도 참전하여, 창천검신을 눈앞에서 목격한 적이 많지요. 그 사람과 전대 교주가 싸우는 광경을 수도 없이 봐서 잘 알지요. 단언컨대, 교주님께선 창천검신을 뛰어넘었습니다.”

귀자모왕은 정말로, 지금의 천마가 과거 군천악을 넘은 지 오래고, 이제는 창천검신의 무위마저 아래로 보고 있다고 틀림없이 믿었다.

“검성과 투신, 그리고 검후 상대로 교주님께선 힘의 절반도 쓰지 않으셨고, 검존 유백기의 공격도 여유롭게 넘기셨지요. 감히 고언을 드립니다. 교주님께선 천하제일을 넘어 고금제일에 도달하셨으니, 병력을 휘몰아쳐 중원을 정벌하시옵소서.”

“그래. 내가 창천검신보다 더 강해졌단 말이지.”

한데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천마의 목소리는 무언가 묘했다.

냉소적이라고 할까.

아니면 비웃음이라고 할까. 그런 느낌이었다.

귀자모왕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우스운 이야기 아니냐. 창천검신은 이제 이 세상에 없는데. 그보다 강해졌다는 게 무슨 의미가 되느냐. 그도 이런 느낌이었겠지. 천하에 적수가 없는 느낌말이야. 생각보다 창천검신도 외로웠겠군.”

“······.”

“새외에 있을 땐 검존이 그래도 내 기대에 맞춰 훌륭한 적수가 되어 줬지만, 이젠 그조차 오늘 보니 아쉬워. 창천검신이 살아 있다면 달랐겠지.”

거의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천마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쉬움과 고독함이 섞여 흘러나왔다. 귀자모왕은 이 새로운 천마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늘 짐작하기 어려웠다.

“검존이 그 정도인데, 천룡검협이란 젊은 놈도 별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유백기의 수준에 도달하겠나.”

“그렇습니다. 그 작자가 종주들을 베고 강한 건 분명하나, 아무리 크게 봐도 유백기에 근접한 수준일 겁니다. 사실 이 정도만 봐도 유례없는 천하의 기재이지요.”

“이번 전투에서 모습을 드러내리라 생각했는데, 아쉽군. 아니, 차라리 다행이다.”

“다행이라 하심은······?”

귀자모왕이 고개를 갸웃했다.

유백기야 역천을 행해서 아직 살아 있을 뿐, 몇 번 격렬한 싸움을 거치다 보면 필연적으로 죽는다. 그는 생각보다 마도에게 위협이 될 수가 없다.

진짜 위험은 바로 천룡검협이다.

이미 젊은 나이에 경천동지할 실력을 입증했다.

잠재력이 대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가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싹은 잘라야 한다.’

마도 수뇌부들이 공유하는 결론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그를 죽여야 한다.

검존 유백기는 죽이지는 못해도, 천룡검협은 죽여야 한다. 반드시.

당장 마도천하가 이뤄진다 해도, 지금의 천룡검협이 십 년, 이십 년이 지나 검을 겨눈다면?

지금도 종주들 몇을 무참히 벨 정도로 무시무시한데, 그때는 과연 감당할 수 있는가.

‘새로운 창천검신이 될 자.’

유백기는 재능을 지녔으나 창천검신이 되진 못했다.

하나 천룡검협은 그럴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모든 흐름이 완벽했다.

마도 역사상 그만한 위험인물이 또 있을까.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죽여야 하건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전쟁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독안사 능허는 천룡검협의 수족이지요.”

“내 마음 같아선 차라리 어디 숨어서 전쟁에 안 나오면 좋겠군.”

“······.”

귀자모왕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감히 천마의 속내를 짐작하는 건 터무니 없는 불경이지만, 그녀로서는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참지 못했다.

마치······ 천룡검협이 살아남기를 바라는 눈치가 아닌가?

“차라리 살아남아서 몇 년, 몇십 년 후에 좋은 호적수로 성장해 주면 그 또한 기쁜 일 아닌가.”

“······!”

귀자모왕은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필시 큰 우환이 될 싹을 자르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무사하길 바라다니.

그런 귀자모왕의 눈빛을 읽은 건지 천마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왜? 놈이 더 강해질까 봐 그런가?”

귀자모왕은 잠시 침묵하다 이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남은 삶이 몇 년 남지 않은 걸 알고 있는 그녀는, 마도에서 제대로 된 직언을 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사였다.

“불충되지만 소인, 감히 직언을 올리나이다. 천룡검협에 대한 소문의 반만이 진실이더라도, 놈은 창천검신에 버금갈, 어쩌면 하늘이 그를 대리해 내린 인재일지도 모릅니다. 그자가 더 강해진다면, 마도에 큰 우환이 될 게 틀림없습니다.”

천마는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야에 마인 진영 전체가 맺혔다. 뒤를 쫓아오던 백도 무인들은 적당한 시점에서 멈췄다. 워낙 질서정연한 퇴각인지라 더 쫓는다고 해도 피해를 입히기 어렵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벌써 마도 진채 가까이 온 천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틀린 말은 아니야. 나는 노인의 말을 늘 경청하지.”

“······!”

자신의 조언이 통한 걸까. 귀자모왕은 이 기회에 자신과 단명왕이 직접 나서 천룡검협을 찾아 주살할 계획까지 준비했다.

“하면 저와 단명왕이 천룡검협을 추적하······.”

“근데 말이야. 왜 놈은 더 강해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더 강해질 거라고 여기지 않는가?”

“······!”

순간 귀자모왕은 우뚝 멈춰 섰다. 모골이 송연했다. 천마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으나, 마치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온몸이 벗겨진 듯한 기분에 귀자모왕은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오한이 들었다.

“설마 놈이 더 강해져서 나보다 더 강해지리라고 보나?”

“아, 아닙니다.”

“천룡검협의 잠재력이 날 뛰어넘는다고 보나?”

“아닙니다, 실언을 용서해 주십시오!”

귀자모왕이 넙죽 부복해 머리를 쿵쿵 박았다. 구십 넘은 노인이 이마가 깨지도록 부딪혔지만, 천마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창천검신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 한, 날 뛰어넘을 가능성이 있는 놈조차 나타날 수 없다.”

참으로 광오한 말.

스스로 천하제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자부심이 뚝뚝 묻어나왔다.

물론 그런 자부심은 당연히 자신보다 강한 자를 목격하지 않았다는 경험에서부터 나온다.

이미 오래전부터 유백기조차 껄끄러운 상대로만 여겼지, 한 번도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만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절대자의 자리.

천마는 그런 존재였다. 때문에, 천마가 진채 중앙에 서 있는 인영이 어렴풋이 보일 때 느낀 긴장감은 전혀 느껴보지 못한 종류였다.

“…….”

모든 마인이 전쟁에 나가 텅 빈 진채를 홀로 지키고 있는 사내.

가면을 쓴 사내의 그림자가 어쩐지 진채 전체를 덮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천마는, 가슴이 울렁였다.

그리고 그 앞에 도달하여 사내의 가면 쓴 얼굴이 어렴풋이 보일 때 그는 손바닥이 축축해짐을 느꼈다.

‘내가, 긴장하고 있다고?’

천하제일고수, 유백기에게조차 느껴보진 못한 긴장을 지금 느꼈다고?

천마의 시선이 사내에게 향하는 순간.

사내는 허리를 숙이지도, 포권을 취하지도 않고 말했다.

“인사드리오, 검종의 종주외다.”

천무백이었다.

* * *

‘젊군.’

천마를 본 천무백의 첫인상이었다.

대략 서른 초반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 외모였다.

현재 천무백의 나이보다 열 살이나 더 많을까.

의외였다.

‘저놈이 군천악을 때려잡았다는 거지.’

천무백의 눈은 거침없이 천마의 전신을 훑고 또 훑었다.

외모부터 체격, 눈빛, 사소한 움직임까지 모두 똑똑히 눈에 담았다.

천무백은 내심 탄식했다.

“제법 격한 싸움을 겪고 오신 것 같은데, 교주께서는 피곤해 보이지 않으시구려?”

천마는 침묵했다. 천무백의 방자한 태도에 천마를 필두로 진채에 복귀한 마인들의 얼굴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세상에. 가장 존귀한 존재에게 저런 어투라니.

천무백은 그런 시선을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오로지 천마에게만 향했다.

나머지는 조무래기일 뿐이다.

‘분명 지금 전장엔 곽용이도 와 있고, 검후도 왔다고 들었다. 남궁조가 천마를 보고 가만있지도 않겠지. 하물며…… 백기 녀석과 대막의 강아지들도 왔을 텐데. 저리도 멀쩡하단 말이지?’

천무백은 딱 보기만 해도 상대가 가진 공후한 내력과 실력을 어느 정도 판가름할 수 있다.

고수의 눈이라서? 아니다.

오로지 경험으로 갈고 닦은 눈이다.

수십, 수백의 전생을 거듭하며 상대를 가늠하는 눈은 천하에 누가 와도 감히 범접할 수 없다.

한데 지금의 천무백도 천마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쉽사리 가늠되지 않았다.

‘백기 녀석이 참 열심히 노력했지만, 더 큰 벽을 만났었던 거였군.’

천마를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라고 내기까지 했건만.

유백기가 이렇게 천마를 여기로 보내 준 이유는 뻔하다.

백기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때, 침묵하던 천마가 반응했다.

“검종의 종주라고……?”

“보아하니 교주님께선 아직 젊으신데,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구려. 말했잖소, 검종 종주라고.”

“들었지. 서열 운운하면서 내 수하들을 겁박했었다지?”

“겁박은 무슨, 합당한 논리인데. 왜 서열이 최고인 게 마도 아닌가?”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능청을 떨었다. 터무니없는 태도에 다른 호법마왕들이 언성을 높이며 나설 만도 하지만, 모두 가만히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진채 전부를 덮은 그림자. 그건 천무백의 오롯한 기세였다.

자신들이 나설 자리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천마가 가볍게 웃었다.

지금까지 무미건조했던 그로서는 강렬한 반응이었다.

“한데 서열을 그리 중시하는 그대는, 본좌 앞에서 왜 그따위의 태도를 보이는 거지?”

기세도 일으키지 않았다. 험악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어조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인들은 전부 느꼈다. 천마가 분노했다는 사실을.

분노라는 감정이 마치 실체화되어서 심장을 꽉 옭아매는 느낌이었다.

천무백이 웃었다.

“나는 마도의 규율을 중시한다.”

이제는 아예 반말이었다. 천마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단체나, 어느 사회나, 그곳의 규율이 있으면, 무시하지 않고 존중한다. 그게 나야.”

“우습군. 정말 우습군. 본인의 행동이 모순적이라 느껴지지 않나?”

“전혀!”

천무백은 어깨를 폈다. 그리고 가면을 벗었다.

마인 중에 천무백을 본 사람이 있던 걸까. 어디선가 간간이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무백이 느릿하게 말했다.

“마도의 규율에 따르면 낮은 곳에서 높은 자리를 도전하는 건 하나도 부끄러운 행위가 아니지.”

“…….”

“낮은 서열이 높은 서열에게 도전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극상의 세상. 강자가 더 높은 자리에 서는 것 말이야.”

천마의 얼굴이 묘해졌다. 진채를 뒤덮은 천무백의 그림자가 당장이라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래서 난 규율을 존중해. 서열 7위인 검종 종주로서 마도 대가리에게 도전하는 거야 못 할 짓도 아니잖아?”

“……!”

“이제 뭔 말하는지 알겠지? 검종 종주이자, 천룡검협 천무백이 말하마. 한판 뜨자. 새끼야.”

천무백은 웃었다. 철신고검이 진동하며 반응했다.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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