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11화>
311. 기다렸다
충격적인 등장은 단숨에 전장을 환기 시켰다. 염왕을 격살한 채 등장한 능허의 외침은 전장 곳곳으로 퍼졌다.
“독안사 능허!”
검후와 곽용이 반색했다.
남궁조는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이리도 기뻐할 일인가?’
독안사 능허.
별호와 이름을 남궁조 역시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했다.
등장 역시 화려했다. 화산과 종남의 장문인을 몰아붙인 절대고수인 염왕을 죽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극적이다.
하나 지금 이 전장의 판세를 뒤집을 만한 절대 고수는 아니지 않은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광경이다.
곽용과 검후는 물론이고, 여기저기서 희색이 돌았다.
물론 감탄이 나올 정도로 깨끗한 기습이긴 했다.
하나 화산과 종남의 장문인이 희생한 결과였지, 정면으로 붙었으면 박살이 났을 게 틀림없다.
‘대체 왜?’
왜 이리도 기뻐한단 말인가. 단순히 지원군이라서?
이어지는 곽용의 중얼거림에 남궁조는 궁금증이 풀렸다.
“독안사가 왔다면, 천룡검협도 오지 않았겠는가!”
능허는 천무백의 수족이다. 강호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능허가 왔으면, 천무백도 왔다. 그 이유가 곧 전장의 분위기를 뒤바꿨다.
천마의 표정이 묘해졌다.
지근거리에서 가장 얼굴을 많이 마주한 염왕의 죽음에도, 슬픔이나 안타까움을 드러내진 않았다.
여전히 나른한 기색으로 손을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무지막지한 강기가 발출됐다.
방향은 염왕이 쓰러진 곳, 능허였다.
“니런, 썅!”
능허가 화들짝 놀라 몸을 피했다. 하지만 종남 장문인은 이미 염왕을 붙잡는데 모든 기력을 쏟아 부은 상태라 피하지 못했다.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한줌 핏물로 변해 버렸다.
능허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노옴!”
종남 장문인의 죽음은 큰 파장이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검후가 격분하여 검을 휘둘러 왔다.
천마가 혀를 찼다.
“늙은이. 기력은 좋지만 그만 갈 곳에 가거라.”
천마의 몸에서 시꺼먼 마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동시에 그의 발자국이 한걸음 내디뎌지는 순간, 몸을 던진 검후의 신형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처박혔다.
발걸음에 내력을 실어 땅을 뒤집는 극악의 상승무공.
“천마군림보!”
남궁조가 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지켜보던 무사들은 물론이요, 남궁조와 곽용마저 몸이 저릿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내력이 바닥을 타고 흐르고, 대기를 타고 퍼지며, 주위를 마구 부수고 짓이겼다.
남궁조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이 정도일 줄이야…….”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내력. 늘 싸움을 무서워하지 않던 곽용의 얼굴 역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전력으로 싸운 게 아니었나!”
내력이 미친 듯이 들끓었다.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검후는 이미 심각한 내상을 입었고, 남궁조 역시 호흡이 거칠어졌다.
셋을 상대로 끔찍하게도 강하더니, 전력을 쏟아 부은 게 아니었단 말인가. 놀람보다도 모멸감이 치밀었다.
천마의 눈이 그들을 향했다.
“현 백도의 천하제일들이라더니, 생각보다 지루했다. 검존과 천룡검협이란 놈에게 기대를 걸어야겠어.”
천마의 냉혹한 평가에 지독한 모멸감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남궁조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천마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받은 능허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천룡검협은 어디 있지?”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마치 뱀처럼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에 능허는 기겁했다.
‘시발. 나 같은 것한테는 관심 안 가진다 했는데 분명히.’
천무백이 적당한 시점에 싸움에 개입하라고 명했을 때 걱정하자, 분명히 말했다. 남궁조나 곽용, 검후가 있는데 너 따위를 천마가 신경 쓸 거 같냐고.
능허가 듣기에도 퍽 그럴듯한 말이라서, 염왕만 죽이고 튈 생각이었건만.
왜 자신을 저리 주목한단 말인가?
하나 능허가 누군가.
천하의 천무백 상대로도, 숱한 비무를 빙자한 폭력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철혈간담의 사내 아니던가.
흑도 사나이 능허는 배에 힘을 꽉 주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소리쳤다.
“몰라, 병신 말미잘 새끼야!”
“……!”
순간 아연한 기운이 주위를 감돌았다. 천마는 여전히 나른한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남궁조는 그 표정이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능허는 어깨를 편 채 말했다.
“궁금하면 네가 찾아봐, 머저리 새끼야. 하여간 이 새끼들은 툭하면 어디 있냐고 물어요. 지가 찾아보지도 않고. 병신아, 다리가 없냐? 팔이 없냐? 두 다리 멀쩡해 놓고 하는 짓은 그 꼴이야? 그러니까 마도 대가리 노릇하나? 하긴, 원래 제정신이면 마도 대가리 노릇 못하지. 병신이니까 하지.”
그야말로 극악의 폭언에 남궁조는 입을 쩍 벌렸다.
아무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천마마저 예상치 못한 걸쭉한 욕설에 혼란스러웠다.
“내가 천룡검협 따까리냐? 그 양반이 어디서 싸움을 하든 연애질을 하든 낮잠을 때리든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물어보면, 아! 그 사람 저기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거 같냐? 네가 생각해도 아니지? 뻔한 걸 물어보는 걸 보니 너도 진짜 멍청하구나. 하긴 멍청하니까 칼질이나 해 대는 거지. 무식한 놈.”
능허는 대단했다.
지금까지 싸우면서도 표정변화 일절 없던 천마의 얼굴에 은은한 분노를 드러내게 했으니까.
천마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아, 근데 하나는 알려 줄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무작정 욕만 하니까 좀 미안하네. 천룡검협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고, 검존은 어디 있는지 알겠어.”
“……!”
검존이란 말에 천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반응을 살핀 능허가 씩 웃었다.
“지금 오고 있어.”
“……!”
그때였다.
전신의 모든 감각이 일제히 깨어나 비명을 내질렀다. 천마는 익숙한 위기감에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떴다. 저 멀리 까마득한 점이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검?’
익숙한 검이다. 지금까지 태연했던 천마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하나 그 일그러짐에는 묘한 희열이 감돌았다.
“왔구나! 검존이여!”
꽈아아아앙!
유백기의 검이 천마에게 작렬했다.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찰나였다. 유백기와 천마가 부딪치는 건 순간이었지만, 단숨에 수십 합이 오갔다. 땅이 뒤집히고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어마어마한 공력이 부딪치며 그 누구도 근처에 접근을 허용조차 하지 않았다.
그 틈을 타 능허는 급히 몸을 피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언덕 위였다.
“당신들이야? 당신들이 주군이 말한 그 늑대들?”
확연히 외모가 다른 일단의 무리가 능허를 바라봤다. 터번을 둘러쓴 채 오로지 눈만 드러낸 사내들. 무미건조한 안광은 흉악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앞둔 맹수들을 보는듯한 느낌에 능허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새삼 이들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중원오재.
모습을 드러내면 중원에 큰 재앙을 불러온다는, 재해 그 자체.
대막과 초원에 자신들만의 무림을 열고, 자기네끼리만 살아가는 늑대들.
“텡그리께서 불러서 왔다. 그분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어색하지만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확실한 중원 말에 능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양반 지금 힘든 건 밑에 애들 다 시키고, 좋아하는 여인네랑 놀고 있거든.”
“…….”
사내의 무미건조한 시선이 닿자, 능허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거참, 농이야, 농. 어쨌든 형씨 이름이 뭐요, 난 능허요.”
“중원에선 대대로 텡크리의 명을 받는 최고의 전사를 혈랑(血狼)이라 불렀다.”
“거, 이름 하나 살벌하군. 주군의 명은 간단하오.”
“말하라.”
“다 때려 부수시오, 저 검은색 옷 입은 놈들.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알겠다.”
능허는 슬쩍 혈랑의 낌새를 살폈다.
대막 유목민 복장을 한 무사들의 숫자는 오백 명.
분명 엄청난 숫자지만, 저 어마어마한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선 그리 많은 병력은 아니다.
한데도 단 조금의 두려움도 없다. 오히려 언뜻 흥분이 비쳤다.
“괜찮겠소? 그대 형제들인지 가족들인지 크게 다칠 터인데.”
“조금도 두렵지 않다. 우리의 시조께선 텡그리를 모셨고, 수십, 수백, 수천 년이 넘는 시간동안 텡그리는 우릴 보호했다. 그분의 명에 따르는 것, 전사의 가장 황홀한 영광이다. 내 대에 명을 수행할 수 있음에 텡그리께 감사하다고 전해 달라.”
“…….”
능허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어딘가에 있을 천무백을 떠올렸다.
‘마교 놈들 광신도라고 까댈 땐 언제고, 정작 신도들을 데리고 있는 건 본인이었잖아.’
하긴, 수십, 수백의 전생을 거듭해 오며 살아온 사람인데.
천무백 본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신만의 세력 하나쯤 있는 게 신기한 일은 아니지.
능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역할은 이제 종국에 다다르는 이 싸움을, 천무백이 유도하는 대로 최대한 이끌어 나가는 것.
그의 어깨에 짊어진 무게 역시 무겁긴 마찬가지다. 능허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무운을 비오.”
“텡그리의 가호가 함께하길.”
혈랑이 늑대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며 소리쳤다.
“검은 놈들 모조리, 전부, 싸그리, 죽여라!”
살벌한 외침과 동시에 늑대들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 * *
늑대들의 갑작스런 참전은 어마어마한 여파를 가져왔다.
백도들은 혈랑이 이끄는 이국적인 늑대들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그들의 칼날이 마도를 향하는 순간 이미 같은 편으로 받아들이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초승달 같이 휘어진 특유의 검을 휘두르며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는 늑대들은 엄청난 변수였다.
판세가 요동쳤다.
천마는 유백기와 검을 섞으며 미간을 좁혔다.
보통 강호의 전쟁은 군문과는 다르게 고수들의 싸움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짙다.
지금 마도에서는 염왕과 야차왕이 죽었다.
백도에서는 종남 장문인이 죽었고, 화산 장문인과 검후는 빈사 상태였으며 곽용 역시 큰 부상을 입었다.
절대고수 네 명이 전쟁에서 이탈했다.
이렇게만 보면 마도의 판정승이나, 상황이 공교롭다.
‘대막의 늑대들이 왜 마도의 뒤를 치지?’
이해할 수 없다. 대체 왜? 중원 무림과는 달리, 대막에서 저들만의 무림을 연 놈들이. 저들만의 하늘을 열고 살아가는 놈들이 어째서?
예상치 못한 백도의 지원 병력에 천마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애당초 지금 싸움은 한번 찔러 보자는 속셈이었다. 굳이 더 싸워서 병력을 갉아먹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퇴각을 결정했다.
검존과 대막의 늑대들까지 나왔다. 백도는 지금 자신들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짠 것이다. 찔러 본 것만으로도 이 정도 튀어나왔으니, 병력을 정비하고 결전을 벌이면 싸움은 끝나리라.
그리 결정한 천마는 검을 휘둘렀다. 유백기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상대가 뒤로 빠져나가려고 함을.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라면 스승님 뜻대로 되겠다.’
스승님은 저기서 천마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 이게 스승님의 의도였다.
하나 두 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다소 달랐다.
‘천마는 내 칼에 죽여야 한다.’
언제까지 스승에게만 기댄단 말인가. 스승과 했던 내기와는 별개로, 유백기는 여기서 천마를 본인의 칼로 처단하고 싶었다.
그래서 전력을 쏟아 부었다. 하나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은, 천마가 과거 유백기와 싸웠을 때보다 더 강해졌다는 점이고, 이조차 노림수였단 사실이다.
유백기가 전력을 쏟아 부은 검을 내지르는 순간, 천마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의 검이 허공에서 춤을 추더니 마기로 이뤄진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소용돌이가 유백기의 검을 삼켰다.
“……!”
그것이 무엇인지 안 유백기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렸다.
“회(回)……!”
소용돌이에 삼켜진 유백기의 공력은 거침없이 회전하다가 이내 역으로 유백기의 검신을 타고 밀려들어왔다.
상대의 공격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희대의 마공에 유백기는 급히 검을 거둬들였다.
좋은 판단과 신속한 행동이었다. 검이 버티지 못하고 사정없이 산산조각 났다.
만일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팔은 물론이고, 상반신이 통째로 찢겨나갔을 터.
잠깐 뒤로 물러난 사이 천마는 단숨에 몸을 빼내 퇴각하고 있었다.
유백기는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점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결국 스승님 뜻대로 되는 건가.’
이번에도 천마를 스승님에게 맡겨야 한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백기는 고개를 돌렸다.
“남궁조!”
“…….”
전력을 다해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어하는 남궁조가 힘겨운 시선으로 유백기를 바라봤다.
“정리를 부탁함세.”
“……그대는?”
“천마를 죽이러 쫓아가겠네.”
“미쳤는가? 홀로 마도 진영에 들어가겠다고?”
“혹여 내가 천마를 죽이지 못해, 놈들이 병력을 재정비하고 최종결전을 유도한다면 우리로선 이기지 못해. 필패야. 그러니까 최대한 병력을 추스르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게. 어떻게든 가서 천마를 죽일 테니까.”
“미쳤는가! 홀로 무엇을 하겠다고! 나와 투신, 검후가 협공해도 칼 하나 박지 못한 괴물을 무슨 수로……!”
“나 혼자가 아니네.”
“……?”
“스승님이 계시네.”
순간 남궁조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유백기의 등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쳐다봤다.
물러나는 마도 진영을 보며 능허가 급히 뿔나팔을 불었다.
뿌우우우우-.
대막의 늑대들이 사용하는 뿔나팔이었다. 그 소리가 들리자 전장 곳곳에서 미친 듯이 싸우던 늑대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였다.
전신이 피로 젖은 혈랑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능허 곁에 왔다.
“무슨 일인가. 저들이 퇴각하니 우리가 쫓아야 한다.”
“아니, 우리는 마도 놈들이 퇴각하는 곳에 먼저 가 있을 것이오.”
“뒤를 쫓는 게 아니다?”
“응, 지름길이 있거든. 마도 진영에 먼저 들어가서 허겁지겁 도망치는 놈들을 맞이합시다.”
능허가 씩 웃었다. 천무백이 말한 포석대로 하나씩 이뤄지고 있었다.
능허는 천마와 마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골로 갈 시간이다. 이 쓰레기들아.”
* * *
천무백은 속속 진채로 복귀하는 마도를 보며 가면 뒤로 웃었다.
때마침 준비하던 모든 것이 끝마쳤다.
그의 포석대로, 천마는 이곳에 돌아왔다.
“무덤으로 잘 왔다.”
천무백은 돌아오는 천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몇 년일까.
저번 정마대전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무백은 이 순간을 고대해 왔다.
“기다렸다.”
끝을 낼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