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08화>
308. 내뱉은 말을 지키는 사내
좌중이 침묵에 빠졌다.
검종의 종주라니······.
귀자모왕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혈불께서 검종을 포섭하셨단 얘기는 들었지. 고작 수십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쪼그라들었다지. 끌끌끌.”
천무백은 당당했다.
“쪼그라들면 뭐. 마도에서 퇴출 당했나? 패천검마가 죽고 나서 잠깐 퇴출당했지만, 혈불이 공식으로 끌어들였잖아? 천마한테도 보고 들어갔고.”
그리 말하며 천무백은 재빨리 눈치를 살폈다.
일종의 도박수였다.
검종을 포섭한 것이 혈불 재량인지, 아니면 상부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은 사안인지.
만일 혈불 개인의 재량이라면 마류칠종 중 하나인 검종으로서 위상을 무기로 삼을 순 없다.
하나 떨떠름한 귀자모왕의 얼굴을 보고 천무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천마를 가까이서 모시는 귀자모왕이다.
혈불의 보고가 천마에게 들어갔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저 반응이 증거다.
천무백은 내심 웃었다.
‘하긴. 아무리 종주라고 해도 천마의 위엄은 무시할 수 없지. 검종을 포섭하는 일도 재량으로 할 수가 없어. 그래도 엄연히 마류칠종 중 하나니, 천마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해’
이로써 천무백의 목소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수십 명으로 쪼그라든 검종?
그게 무슨 문제인가.
“천마께서도 승인한 사안인데, 설마 그걸 무시할 생각이냐? 응? 이야. 아주 호가호위라더니. 이젠 지들 주군마저 무시하려고 해?”
그러자 야차왕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발을 굴렸다.
꽝!
“우리가 언제 교주님이 결정하신 바를 무시했나!”
천무백은 야차왕의 반응에 눈을 빛냈다.
‘저건 숫제 두려움인데. 천마 놈이 어지간히도 주위 애들 잡고 다니나.’
두려워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단지 귀에 안 좋은 소리가 들어가는 정도를 두려워할 정도라면, 천마의 무력을 대략이나마 짐작할 만했다.
천무백은 그 미세한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천무백은 생사결뿐 아니라 심리전의 달인이기도 했다.
미약한 틈을 보면 거침없이 파고든다.
“그러면 천마께서 승인한 검종, 나아가 검종의 종주인 나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거야? 무슨 혓바닥이 이렇게 길어?”
“······!”
자가당착에 빠진 야차왕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호법마왕들은 마종 소속의 일개 무인이자 호법장로일 뿐이다.
마류칠종의 종주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굳이 따지면 천마도 마종의 종주가 아닌가. 종주 중의 종주가 바로 천마다. 호법마왕과 종주의 격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실력이 비슷해서 판가름할 수 없다면, 종주의 위상이 더 큰 법.
그러나 야차왕이 쉽사리 물러설 수 없는 이유도 있다.
“검종이 마류칠종이라 하나 명목상이지. 실제로 무슨 힘이 있다고?”
마류칠종이라 불렀던 것도 먼 과거고, 실제 세력도 별 볼 일 없다.
흡수한 혈귀곡의 잔당. 딱 그 정도다.
검종 종주는 마도서열 7위.
천무백은 당당하게 지휘권을 요구했다. 강자존, 절대적인 서열을 중시하는 마교니까 어쩌면 당연한 요구였다.
“미쳐도 이토록 뻔뻔하게 미칠 수가 있다니, 참 대단한 사람이네요.”
애염명왕이 혀를 내둘렀다. 사납게 올라간 눈꼬리와 달리 살짝 처진 듯한 입꼬리에서는 묘한 교태가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하긴, 저들 입장에서 뻔뻔하겠지.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설마 마교의 규율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너희 마교 밥을 몇 년이나 처먹었는데? 나머진 몰라도, 어이 할망구. 한 팔십년은 드시지 않으셨어요? 하루 삼시세끼 꼬박꼬박 처먹었으면 먹은 쌀만으로도 태산보다 높겠네.”
“끌끌끌…….”
귀자모왕은 난처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본인을 스스로 마종 종주라 자처하는 사내.
실력은 분명하다. 괴이천뇌를 붙잡았다. 여기 네 명 앞에서 굴하지 않고 뻔뻔함을 유지한다. 기죽은 모습 따위는 전혀 없다.
단순 허세는 아니다. 이미 네 명이 천무백의 출입과 동시에 기세를 쏟아냈지만,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적어도 최소한 동수로 봐야 할꼬…….’
귀자모왕은 침착하게 천무백의 실력을 가늠했다.
그녀의 시선이 야차왕과 애염명왕에게 향했다.
‘야차왕 저 친구도 기세 좋게 나섰지만 본능만큼은 짐승의 감각보다 더한 놈이니 몸을 사리고 있고, 저 계집애도 눈치 하나는 빠른 년이니…….’
둘은 나서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다. 충분히 이해했다.
귀자모왕 본인도 나설 생각이 없었으니까.
‘천하의 괴이천뇌를 붙잡아 온 놈인데 무슨 배짱으로 싸움을 걸꼬.’
제갈선이 어떤 존재였던가.
창천검신이란 엄청난 이름에 가려져 있지만, 저번 정마대전을 총지휘하던 두뇌가 아닌가.
두뇌라고 해서 단순히 머리만 뛰어난 게 아니다.
제갈세가를 진법과 학문의 기반으로 무(武)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무림문파로서 굳건히 세운 자가 아니던가.
순수 무공만 입신지경의 경지에 가까워졌다는 게 추론이었고, 그의 장기인 기문진법은 입신지경이란 테두리로 가둘 수 없다.
‘그러니 이 검종 종주란 작자가 보통 인물은 아닐 거다. 제갈선 그 늙은이를 잡아 오는 건 둘째 치고, 무수한 무인들의 벽은 어떻게 뚫었을꼬.’
그러니 자연히 시선은 단명왕에게 향했다.
호법마왕 중에서 두 번째로 강한 무인.
사실상 지금 마도 진영을 총지휘권을 맡은 절대 고수.
단명왕은 무심한 눈동자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천무백 역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있어 눈빛이 마주치는지는 몰랐지만, 둘 사이에는 숨 막힐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단명왕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는군.”
“허파에 구멍이 뚫렸나. 뭐가 웃겨?”
“같잖은 마인인 척 흉내 내는 꼴이 우습지 아니한가. 그럴듯한 마기만 풍겨대면, 어디 마인이던가.”
“진짜 마기, 가짜 마기 따로 있나.”
“지금 보니까 따로 있는 것 같군.”
“그래? 내 마기가 당신 뇌를 곤죽 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한데.”
천무백은 솔직히 깜짝 놀랐다. 여태껏 마인 진영에 들어와 단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
자신의 외부로 표출하는 기운이 마기를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설령 이상한 점을 느껴도 약간의 이질감을 느낄 뿐이었지, 천무백의 운용은 거의 완벽했다.
암천검제로서의 경험이 가득했고, 무엇보다 실제로 패천검마로서 진짜 마인으로 살았던 전생도 있다.
그런 천무백에게 마인으로 위장하는 건 일도 아니다.
하나 겉으로 보이는 천무백은 태연했다. 설령 놀랐다고 한들, 드러낼 만큼 천무백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단명왕이 검을 뽑았다.
“간단하다. 네가 주장하는 것 모두 확인하는 방법 말이다.”
“거, 말 더럽게 빙빙 돌리네. 칼 뽑아놓고 왜 이리 혓바닥이 길어?”
천무백 역시 철신고검을 뽑았다. 서늘한 기운이 순식간에 퍼졌다.
나머지 세 명의 호법마왕이 천천히 뛰기로 물러나 공간을 마련했다.
“검종의 종주가 맞는지, 네놈의 검을 보면 알 수 있겠지. 지금처럼 마공을 흉내 내는지, 격렬한 싸움 중에도 숨길 수 없을 테니.”
“그 흉내에 목이 잘리면 그 꼴도 우습겠군.”
단명왕은 천무백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굳건한 기세가 멈추지 않고 주위를 짓눌렀다.
“또, 네가 말했지. 강한 자가 서열이 높다고, 검종의 종주니까 일곱 번째 서열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이 마교의 규율이다. 맞는 말이다.”
거기까지 말한 단명왕이 웃었다. 거대한 체구가 날렵하게 움직이더니, 검끝이 뱀의 머리처럼 천무백의 목덜미를 노렸다.
쉐에에에엑-!
“언제든 높은 서열을 짓밟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하극상이 인정받는 게 바로 마도의 규율이기도 하지.”
일직선의 경로였기에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나 뱀처럼 검이 휘어지는 듯 경로를 바꿔가며 목을 노렸다.
피하기엔 적절치 않다. 천무백이 철신고검을 휘둘렀다.
까앙……!
단명왕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래, 서열 7위는 맞구나. 제법이야.”
단명왕이 어마어마한 공격을 쏟아 냈다. 천무백은 속이 진탕되는 기분이었다. 검이 연신 부딪치며 불똥을 튀겼다. 단명왕은 공력을 계속해서 더욱더 주입했다. 천무백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썅. 이 새끼도 어지간히 영약 처먹었네.’
천무백은 미친 듯이 전신으로 침투해오는 공력을 감당하며, 기회를 엿봤다.
주위에서는 연신 놀라움이 가득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정말 검종의 종주가 맞나 보네요. 단명왕과 싸워 밀리지 않다니.”
“단명왕은 사실 종주들보다 더한 실력자가 아니었는가. 종주 중에서도 천광마와 혈불이 겨우 상대 가능한 실력자인데……. 검종의 종주가 저런 실력자였을 줄이야.”
하나 그들은 알까.
천무백은 지금 사실상 몸의 절반을 묶어 두고 싸우고 있는 셈이었다.
‘일월기를 끌어 쓸 수야 없지.’
그랬다간 마인이 아니란 건 단숨에 들키리라.
하나 그렇다고 이대로라면 단명왕에게 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천무백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고 있는 나머지 셋에 향했다.
천무백이 웃었다.
때론 판단보단 행동에 몸을 맡길 때가 필요했다. 그런 인상을 줘야 했다.
천무백의 검이 단명왕의 검을 훅 쳐 내더니, 일순 어마어마한 강기가 주위를 휩쓸었다.
“……!”
지켜보던 세 명의 호법마왕이 뜨악한 얼굴로 급하게 움직였다.
그들에게까지 뻗친 것이다.
설마 자신과 싸우던 도중에 나머지 호법마왕을 공격할 미친 짓을 할 줄은 몰랐던 단명왕의 눈이 부릅떠졌다.
“무슨 짓을 하느냐! 본좌가 우습더냐? 본좌와 싸우던 도중에 다른 이에게 검을 내질러?”
“본좌는 지랄. 나는 내뱉은 말을 지키는 사내다.”
“뭐?”
“나 죽이려는 순간, 너희 네 명 이상 전부 죽는다고 했잖아.”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
단명왕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솔직히 말해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잠깐 공방을 주고받았지만, 받은 인상은 전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검끝은 매서웠고 받아치는 힘은 태산처럼 무거웠다.
단명왕의 표정이 묘해졌다.
‘더구나 묘하게 힘을 숨기는 느낌이었다. 나와 검을 주고받으면서도, 힘을 숨긴다는 건…….’
지금 자신에게 보여준 무력이 전부가 아니리라.
강호인이라면 실력의 삼 할을 숨기라는 말은 누구나 머릿속에 새기곤 한다. 그 점을 고려하면, 천무백의 실력은 더 강할 터.
‘더구나 방금 보여준 검격들은 패천검마로부터 실전된 검이 틀림없다. 그의 검이 검종에만 전해진 게 아니라, 묘리를 여기저기서 훔쳐서 갖다 썼으니…….’
마도의 검을 재정립한 사람이 곧 패천검마였고, 단명왕은 천무백의 검에서 패천검마의 실전된 검을 두 눈으로 직접 봤다.
‘검종의 종주는 맞다. 그런데 지금 왜 이런 미친 짓을?’
설마 한 말은 지키겠다고 호법마왕을 공격했다고?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4대 1의 구도를 만들겠다고?
대체 왜?
순간 왜 자신이 망설이는지 깨달았다.
‘적어도 여기서 두 명 이상은 죽는다. 저놈이 진심이라면.’
호법마왕 중에 두 명이 죽는다. 이미 혈사왕이 죽었으니 다섯 중에 두 명만이 남는 것이다. 천마가 올 때까지 백도를 멸하진 못해도, 버텨야 하는 단명왕의 입장에선 치명적이다. 그가 총 책임자였고, 만일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지면 천마께 무슨 면목으로 고개를 들겠는가.
‘설마 이 점을 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단명왕의 동공이 흔들렸다.
일명 미치광이 전술.
종잡을 수 없는 상대의 기행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넌 검종 종주가 아니라 광종의 종주가 차라리 어울리겠구나.”
“말했지만 난 심신이 온화하고 맑은 사람이다. 마도 최초로 신선이 되어 마선(魔仙)이 될지도 모를 평화로운 사내다. 광종의 종주라니, 광천마 같은 미친놈이랑 날 비교해?”
“…….”
단명왕은 입을 다물고 잠깐 생각에 빠졌다. 검을 부딪쳐보니 알겠다. 놈은 패천검마의 후인이 맞다. 그러면 검종의 종주가 맞고, 마도 서열 7위라는 명분도 틀리지 않다.
여기서 놈을 시험하겠다고 더 싸웠다가, 호법마왕이 하나라도 더 죽는다면?
이 무슨 제 살 깎아 먹기란 말인가.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나 싶지만, 놈의 말을 들어보니 숫제 확신까지 들었다.
단명왕은 여기서 타협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당신이 검종의 종주인 걸 인정하마. 하나 지휘권을 넘길 순 없다.”
“거, 그러면 뭐 별수 없지.”
“별수 없지?”
뭔가 어조가 이상한 걸 느낀 단명왕이 되물었다.
“싹 다 죽이면 지휘권이 저절로 나한테 이양되겠지. 뭐.”
“…….”
이런 미친 새끼가…….
“저 새끼 가면 벗겨 보게, 단명왕. 저 새끼 광천마일지도 몰라.”
“아니, 광천마보다 미친놈이에요. 광천마 할애비일지도 모르죠.”
“단명왕. 저놈을 죽이자고.”
단명왕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휘권을 넘길 순 없다. 다만 그대를 이 막사에 들어올 수 있게 해 주지.”
“그러니까, 지휘부에는 들게 해 주겠다?”
“우리는 누구 하나가 지휘권을 독점하지 않았다. 마인에 대한 모든 명령은 오로지 천마께서 내리시는 것. 우리의 역할은 그분의 명에 따라 형세를 유지하는 것, 그것뿐이다.”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만 해도 만족이다. 사실 천무백의 진짜 목적은 고작 지휘권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좋아. 그럼 나도 수뇌부니까 정보 공유 좀 하자고.”
“……?”
천무백이 웃으며 물었다.
“천마께선 지금 어디까지 오셨냐?”
그 얼굴 좀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