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307화 (307/318)

<검신재생 307화>

307. 거짓말을 모르는 사내

얼마 지나지 않아 천무백은 호법마왕들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가기전에 천무백은 우선 장노에게 제갈선의 보호를 맡겼다. 예상외로 장노의 권위가 커서 가능했다. 마류칠종 중 하나, 검종의 핵심 권력자임을 숨기지 않고 밝히고 다녔는데, 그 위상이 결코 낮지 않았다.

하류마인들에겐 검종은 유일하게 마종을 제외하고 천마를 배출해 낼 뻔했던 역사를 갖고 있으며, 단기간에 위세를 떨쳐 모든 이에게 각인됐으니까.

더구나 독마, 광천마, 혈불, 귀마의 사망 또는 실종으로 인해 나머지 종단들이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다.

장노에게 괜히 공공연한 시비를 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지, 이미 진영에 괴이천뇌를 잡아 왔다는 소문이 다 퍼졌고, 이 기회에 고문이라도 해서 정보를 캐내고 공적을 올리려는 놈들이 접근해 올 거야.’

장노가 검종이라는 위상으로 버티고 있지만, 한계는 있다.

명성과 위상은 무시할 수 없어도, 숫자는 가장 적고 실제 손에 쥐고 있는 권력은 아예 없는 수준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아예 쐐기를 박아야 해. 내가 괴이천뇌를 담당해서 정보를 캐내라는 확실한 공언.’

그런 공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바로 지금 마도를 총지휘하는 호법마왕들이다.

그런 호법마왕들의 호출이니, 천무백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임했다.

하나 얼굴엔 긴장감 한줄기 피어오르지 않았다.

천무백은 가면을 쓴 채 천막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

안에는 호법마왕 네 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들어서는 순간 천무백은 사방에서 쏘아지는 시선과 기세에 혀를 찼다.

‘살벌하다, 살벌해.’

네 개의 시선은 제각각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 경계심 가득한 시선, 머리부터 발끝까지 뜯어보는 집요함,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는 눈빛까지.

특히나 가장 상석에 있는 단명왕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경계가 뚜렷한 눈빛은 천무백을 불신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움츠러들게 하는 눈빛이었다. 더욱이 내부를 장악하는 기세는 아직까지도 혈향이 짙게 묻어났다.

천무백이 멀뚱히 서 있자 천무백을 데려온 마인이 낮게 호통을 쳤다.

“놈, 감히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느냐! 어서 고갤 숙이지 않고!”

고작 심부름하는 마인조차도 절정의 노회한 고수였다.

그런 이마저 호법마왕 앞에서 두려움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하나 천무백은 그를 흘깃 바라볼 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특이했던 걸까.

야차왕이 천둥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도만큼 서열이 뚜렷한 단체는 없다. 천마 아래 오로지 실력만으로 엄연한 서열이 존재하는 법, 감히 누구 앞이라고 얼굴조차 숨기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지?”

천무백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단명왕과 유사한 느낌이지만, 이쪽은 더 격렬한 느낌이었다. 마치 용암 같다고 할까. 단명왕이 잘 정련된 묵직한 큰 칼 같은 느낌이라면, 이자는 거칠 것 없는 철퇴 같은 감상이었다. 바로 하북팽가 가주를 죽인 작자다. 기세만큼은 땅이 진동하는 듯했다.

하나 천무백은 단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천무백을 뚫어지라 쳐다보던 야차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이지만, 너머로 자신을 비웃고 있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야차왕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버럭 호통을 치려고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 천무백이 손을 살짝 휘저었다.

“……!”

야차왕은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맥이 일순 끊겼다. 광대가 씰룩였다.

‘호흡을 끊어 버렸다. 절묘하게.’

단순한 손짓이 아니다. 손짓과 함께 주위의 기류가 흔들렸고, 기류 사이로 이질적인 기운이 끼어들었다. 호흡 사이의 맥을 정확히 자르는 손짓.

‘우연인가?’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 절묘했다. 야차왕의 얼굴이 심각해지자, 천무백이 느릿하게 말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이 새끼가, 윗 서열 만났으면 닥치고 허리를 숙여야지. 지 주제 파악을 못 해?”

“……!”

비단 야차왕뿐일까. 좌중 모두 입을 쩍 벌렸다. 근엄했던 단명왕마저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제대로 들린 게 맞는지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볼 정도였다.

야차왕이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떴다.

예상치 못한 천무백의 호통에 판단이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한 말이더냐?”

“그럼 누구한테 했겠냐. 왜 말을 해 줘도 들어 쳐먹지를 않니.”

“그러니까 네가 나보다 윗 서열이다. 이 말이렸다? 호법마왕인 나보다?”

“호법마왕은 지랄. 그래 봤자 천마 호위나 하는 주제에.”

야차왕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무백의 행동과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야차왕이 호법마왕들 중에 비교적 폭급한 성격인 건 누구나 안다.

하나 그것이 앞뒤 보지 않고 단편만 보고 달려드는 멧돼지 같은 사람은 아니다.

천마를 호위하는 호법마왕이란 직분만큼,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은 분명히 보통 이상은 갖췄다.

‘무엇보다 괴이천뇌를 그 벽을 뚫고 포로로 잡아 온 놈이다. 이 사이에 껴서 저 기세를 유지하는 것만 봐도, 우리 호법마왕보다 약하지도 않다. 대체 저런 놈이 어디서 나왔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야차왕은 놀라울 정도로 냉정해졌다.

야차왕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말해 봐라.”

“뭘.”

“네놈이 누군지. 서열 운운했으니까 뭔가 있긴 있는 놈이구나.”

“딱 보면 모르겠냐? 너, 혼자서 괴이천뇌 잡아 올 수 있어? 응? 가로막는 놈들 다 때려 부수고 잡아올 수 있냐고. 이것만 봐도 하나 확실하잖아. 넌 못하고, 난 가능하다. 마도는 강자존의 세상이지. 네가 나보다 약하니 당연히 내가 서열이 더 높아. 어디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윗사람이 안에 들어왔는데 벌떡 일어나서 인사하지도 않고 있어? 이 답답한 새끼야.”

“…….”

그야말로 궤변이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귀자모왕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끌끌, 어쩌면 자네가 야차왕보다 강할지도 모르지. 괴이천뇌를 잡아온 공적은 인정하마. 하나 본좌는 그대보다 약할 것 같진 않군.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보다 내가 훨씬 강하고 서열이 높은데, 그러면 내 앞에서는 허리를 숙여야 하지 않겠누?”

귀자모왕의 발언에 천무백이 한심하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어이, 노망난 할망구야.”

“…….”

“분위기 파악 안 돼? 늙어서 귀에 고름이 꼈어? 내가 이렇게 거침없이 말하는 거 보면 뭔가 느낌이 팍! 하고 오는 게 없나? 이야. 이 노파, 경험과 관록은 안 쌓고 주름만 쌓았네. 대단한 늙은이야.”

호법마왕들은 혼란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믿고 저런 폭언을 감히 앞에서 늘어놓는단 말인가.

적당한 욕이라면 화가 나서 혼찌검을 내주겠지만, 오히려 너무 과한 발언이라 머릿속에서 이해가 가는 과정이 느려졌다.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천무백은 머리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

“목 위에 들고 다니는 게 장식품이 아니라면 제발 생각을 하세요, 생각을. 괴이천뇌를 몸 성히 잡아왔어. 너희 할 수 있어? 그냥 앞에서 닥치는 대로 칼싸움이나 하는 게 너희잖아. 아까 보니까 개판으로 싸우더만. 밑에 애들 지휘 하지도 않고. 그냥 강한 놈 찾아서 싸우고. 그래서 혈사왕이 뒈졌지.”

천무백의 날카로운 지적에 모두 침음을 삼켰다.

실제로 그랬다.

마류칠종의 종주들과 호법마왕들의 차이였다.

호법마왕은 오로지 천마의 곁을 호위하는 순전히 강한 무인이다.

수하를 거느린 적도 없으며, 지휘한 적도 없다.

그래서 이번 전투에서도 오로지 강한 오대세가의 가주만 찾아다니며 싸웠지, 실제 밑에 싸움은 중간급 간부들이 이 악물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천무백이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조용히 있던 단명왕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도 판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판단했다?

시야가 넓다는 뜻이다.

천무백이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이 한심한 작자들아. 아까운 수하들만 제물로 바치고, 너희는 오대세가 가주 꽁무니만 졸졸 쫓아서 싸울 생각이지? 운이 좋아서 저 돼지새끼가 팽가 가주를 죽였다지만, 다음 싸움부턴 가주들이 앞장서서 싸울까? 오히려 철저히 지휘만 하겠지. 그러면 지휘력은 없는 너희들은 싸움에선 이겨도 전투에선 패배하는 거야. 수하들만 다 죽어 나가겠지.”

천무백이 야차왕을 가리키며 돼지새끼 운운했지만, 야차왕은 놀라울 정도로 냉정을 유지했다.

“그래서 저쪽 지휘를 할 수 있는 제갈선을 내가 데리고 온 거다. 이제야 이해가 되니? 이 싸움밖에 모르는 멍청한 얼간이들아. 너희는 마인들을 지휘할 깜냥도 안 돼. 그냥 가서 천마 올 때까지 조용히 있다가 호위나 해라.”

“그래서. 묻는다. 넌 누구지?”

단명왕이 굵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천무백은 팔짱을 꼈다.

“살기 봐라, 살기. 왜, 죽이기라도 하려고? 이야. 괴이천뇌를 잡아 온 대단한 공적을 세운 놈을 몰아붙이네. 아주 수하들 사기 뚝뚝 떨어지는 일만 골라서하는 거 보니까 능력 하나는 대단하구나.”

“한대 치면 목이 잘릴 것 같은 놈이 입담은 가히 대단하구나.”

천무백은 피식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나 말하지. 나 혼자 안 죽어. 내 몸에 칼이 들어오는 순간, 여기서 적어도 네 명은 더 죽는다.”

“…….”

주위가 침묵에 빠졌다.

적어도 네 명이라니.

이 안에 호법마왕 네 명밖에 없다.

그러니까 자신을 공격하면 너희 모두 죽을 거라는 참으로 오만한 말이 아닌가.

그때 아무 말도 없이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던 사나운 눈빛의 여인이 단명왕에게 웃으며 말했다.

“마치 광종의 종주를 보는 듯한 느낌이에요. 단명왕께서도 광천마 같은 종류의 사람은 건드는 게 아님을 잘 알고 계실 거예요.”

“미친놈은 건드리지 말라는 얘기겠지.”

담담한 말에 천무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실망인데. 미친놈이라니. 광종의 미친 늙은이랑 날 비교하나. 난 정상이야. 아주 맑아. 소림 땡중이나 무당 말코 도사보다도 심신이 온화한 사람이다.”

“봐요, 보통 미친 게 아니에요.”

애염명왕이 그리 말하며 천무백을 쳐다봤다.

“단순히 강하다고 서열이 높다고 운운하는 것 같진 않네요. 광종의 광천마를 그렇게 가벼이 부르는 것도 그렇고요. 더구나 괴이천뇌를 잡아 올 정도로 강하고, 여기 호법마왕들 앞에서 폭언을 일삼을 정도로 담대하죠. 스스로 서열이 높다고 주장하고, 더구나 그 급박한 전투에서 판세를 정확히 꿰뚫어봤어요. 제 생각에는 마류칠종의 종주가 아닐까 싶은데. 이상하군요. 다 죽거나 사라졌는데.”

애염명왕의 추론은 정확했다.

아니, 사실 천무백이 그리 생각할 수 있게 상황을 유도했다.

호법마왕 개개인의 무력이 강하다고 한들, 마류칠종의 종주들보단 서열이 낮다. 호법마왕은 엄연히 천마의 호법장로이기 때문이다. 마도 전체에 끼치는 영향력은 종주가 더 강하고, 권위도 더 크기 마련이다.

호법마왕들 무력은 천무백이 보기에 전부 귀마와 비슷한 정도고, 단명왕만이 특출나게 강했다.

애염명왕의 말에 호법마왕들이 일제히 천무백을 쳐다봤다.

귀마, 혈불, 광천마, 독마는 사라졌다. 화종은 지리멸렬해서 종주가 없다. 마종의 종주는 곧 천마다. 그러면 대체…….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내가 검종의 종주다. 공식적으로 따지면 마도 서열 칠 위다. 너희보다도 강하다. 그니까 고개 숙여, 이 잡것들아.”

“…….”

“의심하지 마라. 난 진실만 말하는 사내고, 거짓을 모르는 사내다.”

그러니까, 패천검마가 나였으니까.

검종의 종주라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잖아?

천무백은 진심이었다.

“그러니, 천마가 오실 때까지 이번 전투의 지휘권은 내가 갖겠다. 꼬우면 덤비고.”

뻔뻔함과 당당함은 한 끗 차이다. 천무백은 당당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