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06화>
306. 놈이 천마다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아 있었다.
모용수는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래 이 자리에 다섯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두 자리가 비었다. 모용수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빈자리가 유난히 커 보였다.
천독사자(天毒使者) 당천무가 무거운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팽가의 무인들은 다행히도 팽석 장로께서 수습하고 있으니, 전력에서 이탈할 것 같지는 않소.”
모용수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팽석 장로라하면, 율법전의 부전주가 아니신가? 어째서 총관을 역임하고 계신 대장로가 하지 않고······.”
의문을 품던 모용수는 곧 ‘아’하는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말끝을 흐렸다.
세가의 가주가 죽었으니, 다음 서열이 무인들을 지휘해야 할 터.
당연히 총관을 맡은 대장로가 이어받아야 한다. 한데 총관 다음도 아닌, 율법전의 부전주인 중간 서열의 장로가 무인들을 추스르고 있다는 사실은······.
“애석하게도 대장로도 가주와 함께 전사하셨소.”
“······.”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가주의 죽음에 격분한 팽가는 반쯤 미쳐서 날뛰었다. 상황을 추스릴 우두머리가 없는 일시적인 지휘권 공백 상태에서, 복수심에 휩쓸려 싸우면 당연히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전장에 따라 나온 장로들 중 절반이 죽어 나자빠진 것이다.
충격적인 결과에 팽가의 이탈이 염려됐지만, 이어지는 설명에 다행히 걱정을 접었다.
“다들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오. 반드시 복수를 갚겠다고 나서고 있고, 듣기론 세가에 머물던 소가주가 모든 무사를 박박 긁어모아 오고 있다는군.”
“······사활을 걸었군.”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하북팽가는 지금의 위상을 유지 못 할 건 자명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죽어 나갈지 모용수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적들의 공세가 생각보다 너무 막강했다.
‘하긴, 어쩌면 나도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르지.’
천패일도 팽철도 당했는데, 자신이라고 무사했을까.
만일 그 괴인(怪人)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자신이 지금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있었을까.
그때, 조용히 침묵하던 남궁조가 불쑥 말했다.
“제갈세가는 어떠한가.”
“······혼란을 추스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자신보다 한 배분 높았기에 당천무는 조심스레 경어를 사용했다.
대답에도 남궁조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했다.
팽철이 죽은 것도 큰일이지만, 더 중한 일이 발생했다.
“괴이천뇌 선배가 마도의 손아귀에 포로로 잡혔다는 말이지.”
남궁조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당천무와 모용수는 흠칫 몸이 굳었다.
같은 오대세가의 가주라지만, 남궁세가는 홀로 나머지 세가를 제압할 힘을 지녔다.
더구나 가주인 남궁조는 이들보다 배분이 높았고, 실력마저 범접하기 힘들었다.
저 표정 없는 얼굴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비록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노련한 모용수는 속내를 어느 정도 짐작했다.
‘말이 아니겠군. 마도를 혐오하는 마음은 진심이겠지만, 저 양반은 천하에 자신을 각인시키고 싶어 했는데 말이야.’
강호인이라면 다 안다. 남궁조가 검존 유백기에게 어느 정도 자격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마도를 상대로 무퇴불패(無退不敗:물러서지 않고 패배하지 않음)의 역사를 세운 창천검신과 검존과 매번 비교당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양반이니 무리해서라도 우리 세가들을 겁박해서 결집한 거야.’
이 정마대전에서 남궁조가 검존과 같은 업적을 세운다면야.
남궁조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분명히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마도를 증오하는 그의 감정이 단순한 위장에 불과한 건 아니다. 남궁세가가 마도의 손에 얼마나 당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남궁조는 복수심에 분명 불타고 있었다.
한데 응당 복수를 갚아 주기는커녕, 팽철은 죽었고 제갈선은 납치당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무엇보다 제갈선이 포로로 잡힌 것이 치명적이었다.
‘무수한 백도 무인들의 벽을 뚫고, 괴이천뇌 선배를 단숨에 무력화시킨 뒤에, 단숨에 가로막는 방어벽을 뚫어내고 벗어났다.’
그리고 그 방어벽에는 남궁조 역시 있엇다.
이 인원을 결집한 건 남궁조다. 팽철의 죽음, 제갈선의 실종까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고, 남궁조에게 화살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마도와 싸울 셈이지?’
서로 비슷한 피해를 주고 전투는 끝났지만, 백도의 패배라는 사실은 다들 쉬쉬하지만 은연중에 퍼져나가고 있다.
사기가 떨어진 무인들을 이끌고 남궁조는 어떻게 싸우려고 할까.
그때, 남궁조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놀랍더군.”
“······?”
“아직도 손목이 저려.”
“······그게 무슨?”
이 위급한 사태에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할망정, 알아듣기 어려운 말은 또 뭐란 말인가.
“가주,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당천무가 조금 높아진 어조로 말했으나, 이내 남궁조의 눈이 그를 향하자 입을 다물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안광에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당천무가 시선을 피하자 남궁조의 말이 느릿하게 퍼졌다.
“그 도망치던 놈이 내 칼을 막았네. 내 절기를 쏟아부어 단 한칼에 놈을 베려고 했어. 전력을 쏟아 냈단 말일세.”
모용수와 당천무는 서로 눈치 보며 침묵했다.
천하의 남궁조가 전력을 쏟아 냈는데도 놈이 도주에 성공했다?
그것도 제갈선을 포로로 잡은 채?
모용수와 당천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놈은 막았네. 기다렸다는 듯이, 단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맙소사.”
남궁조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심지어 더 쫓아갈 생각도 못 했네. 너무 충격적이라서. 전신으로 느껴지는 충격이 너무 커서. 이만한 수준이라면 내가 쫓는다고 해도 이길 수 있단 생각이 들지 않더군. 그래서 멈칫했네.”
때아닌 고백에 장내는 침묵만 감돌았다.
“왜냐면 이런 느낌은 살면서 딱 두 번 느꼈거든.”
“두 번······ 말입니까?”
“창천검신에 가르침을 받을 때 한 번.”
“······.”
“유백기 고놈과 전력으로 비무를 겨룰 때 한번. 이게 끝이야.”
모용수와 당천무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면 제갈선을 납치하고 빠져나간 그놈이 최소한 유백기 급이란 말이 아닌가.
그런 작자가 마도에 있다면······.
“그래. 딱 하나 있겠지.”
남궁조가 목소리를 낮췄다. 별안간 그의 주위로 무시무시한 기세가 쏟아졌다.
“놈이, 천마다.”
“······.”
질식할 것 같은 정적이 가라앉았다.
* * *
본인이 백도진영에서 천마로 오인되고 있단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천무백은 우선 눈앞에 닥친 상황부터 해결해야 했다.
‘원래 계획하고 틀어지긴 했지만, 뭐 세상살이가 임기응변으로 돌파하는 거지.’
원래 계획은 조용히 마도진영을 오가면서 백도를 도와주는 것.
모용수를 도와준 일이나, 종남과 화산 무인들을 구한 것도 마찬가지.
그렇게 마도 내부를 살피며 제갈설아를 통해 기문진법을 준비하는 일이 본래 목적이었다.
하나 천무백은 계획을 바꿨다.
‘이대로라면 내가 백도를 도와주는 일도 중과부적이고, 제갈소저가 기문진법을 완성하는 일도 지난한 일이야.’
자신이 달라붙어 같이 진법을 준비하면 더 확실하리라.
하나 진법에만 열중하고 있으면, 싸움은 어찌 될까.
‘갈피가 쉬이 잡히지 않는군.’
천무백 정도라면 형세만 봐도 누가 이길지, 질지 감이 잡힌다.
한데 지금은 아니다.
모여든 개개인의 수준은 오대세가측이 훨씬 높다. 그러나 백도는 마도진영에 대한 이해와 정보가 심각하게 부족하며, 호법마왕들은 오대세가의 가주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백중세다. 오히려 마도가 살짝 우세한 정도.’
천무백은 계속해서 전장을 오가며 상황을 주시해야 한다.
백도가 몰아붙이면 할 일은 없지만, 밀리기라도 한다면 적당한 시점에 개입해야 하니까.
‘내가 없을 때 소저를 도와 진법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
바로 제갈선이다.
약선과 더불어 제갈선은 현 강호에서 최고의 진법가다.
제갈설아도 제갈선에게 배웠으니 오죽하겠는가. 천무백이 전장에서 제갈선을 보고 데리고 온 이유였다. 싸움을 끝내기도 하면서 일거양득 아닌가.
‘그러니 제갈선을 내 담당으로 만들어야 해.’
몰래 납치해 왔으면 모를까.
아주 떠들썩하게 잡아왔다. 이제 싸움이 끝나고 마도 병력이 복귀하면 호법마왕들이 자신과 제갈선을 찾을 터.
여기서 제갈선을 호법마왕들이 관리하겠다고 치면, 그야말로 난처한 일이다.
“그러니까 태상가주께선 절 도와주셔야 합니다.”
“…….”
제갈선은 모호한 표정으로 천무백을 노려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제갈선은 안타까운 탄식을 토했다.
“천하의 괴이천뇌를 납치해 놓고 도와달라니…….”
“뭐, 싫음, 어쩔 수 없고요.”
“뭐?”
너무 간단하게 단념하는 천무백의 모습에 제갈선의 눈이 동그래졌다.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손 떼면, 태상가주는 호법마왕들의 손아귀에 갑니다. 걔들이 포로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아십니까?”
“……자네!”
“이게 다, 태상가주님 살려 드리려고 제가 무척 애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제 뜻에 따라 주세요.”
“허허.”
제갈선은 기가 찬 듯 그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나 그 역시도 천무백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았다.
“할아버지…….”
더구나 여기엔 금쪽같은 손녀인 제갈설아도 있다. 만일 일이 잘못되면 자신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제갈설아도 문제가 된다.
불현듯, 제갈선은 저 허여멀건 한 천무백의 얼굴이 미워졌다.
‘내 손녀딸을 데리고 마도 진영에 잠입해? 거기에 나까지 포로로 잡고?’
새삼 화가 났다. 하나 어쩌겠는가. 이미 천무백과 한배를 탔는데.
“그럼 도와주시는 거로 알겠습니다. 전 놈들 앞에서 태상가주를 포로로 잡은 건 나니, 제가 관리하겠다고 말할 겁니다.”
“그게 통할 것 같나? 자넨 여기서 아무런 지위도 없잖은가.”
“뭐, 다 생각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아무래도 태상가주를 함부로 대하는 장면을 보여 줘야 할지도 모릅니다. 철저하게 포로로 대하는 모습을 보일 겁니다. 괜찮으십니까?”
“후,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제갈선은 이렇게 된 이상 천무백에게 전적으로 협조했다.
천무백의 행동이 결국 마도를 멸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음을 잘 알았다.
“한데, 자네가 지금 설아를 시켜서 만드는 기문진법이 무언가?”
“아, 태상가주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제법 유명한 거라서요.”
“뭔데 그러는가?”
“몽혼마라광진(夢魂魔羅光陳).”
“…….”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인지, 잠깐 눈살을 찌푸리고 한참을 헤아렸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에 번쩍 떠오르는 기억에 그의 몸이 일순 전기라도 흐르는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제갈선의 얼굴이 새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고서(古書) 속 기문진법.
몽혼마라광진.
진법의 효용을 떠오르는 순간, 제갈선은 천무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그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자, 자네 설마……?”
천무백이 태연스럽게 말했다.
“아마 태상가주께서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제갈선은 입을 벌린 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미친놈…….”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