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305화 (305/318)

<검신재생 305화>

305. 나쁜 건 아니잖아

뛰어난 무인이 꼭 뛰어난 전략가인 법은 아니다.

평생을 수양하며 검을 익히고, 끊임없이 투쟁하며 경지를 차근차근 밟아 가는 무인이 전투의 지휘까지 능한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남궁조 본인 역시 잘 알았다.

자신은 판세를 읽는 눈이 부족하여 전투를 지휘할 만큼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그저 잘 싸우는 무인일 뿐이다.

남궁조의 생각은 꽤 훌륭한 판단이다.

오대세가를 겁박해서 결집한 건 다소 무리한 짓이나 다름없다.

결국엔 패도(悖道)를 추구한 셈이니까. 당장은 마도와의 결전이라는 명분 아래 오대세가가 굽혔지만, 전쟁이 끝난 후 남궁세가와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그런 부담감을 감수하고서 오대세가를 결집시켰다면, 당연히 본인이 지휘관으로서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게 순리일 터.

남궁조는 과감히 자신의 지휘권을 제갈선에게 양보했다.

배분, 명성, 실력, 모든 면에서 제갈선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저번 정마대전 당시 총군사였던 과거는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는 완벽한 명분이었다.

남궁조에게 불만을 품고 싸움에 소극적이던 오대세가가 비교적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된 이유였다.

하나 제갈선은 전투를 반대했었다.

“이럴 줄 알았단 말이야.”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나이가 무색하게도 아직도 광택이 도는 얼굴은 근래 급격하게 늙어진 듯 주름이 늘었다.

“당장 예비대를 팽가 쪽으로 보내라. 팽철이 죽었으면 장로진들도 반쯤 궤멸 됐을 것이야. 아니다, 천독사자가 옆에 있지? 장로들 중 살아남은 자가 없다면 임시로 팽가 무사들의 지휘권을 인계받으라 해.”

여러 깃발이 거칠게 펄럭였다. 신호를 본 무사들은 전음으로 빠르게 전장을 건너뛰어 명령을 전했다.

빠른 상황판단과 조치였지만, 쉽지 않았다.

“보고! 천독사자께선 애염명왕과 전투 중이라 이미 당가 무인들의 지휘권을 대장로에게 넘긴 상황입니다. 지금으로선 싸움이 급해 팽가 무인들의 지휘권을 인계받기 어렵다는 보고입니다.”

“애염명왕이라!”

제갈선이 끝내 탄식을 터뜨렸다.

“패천일도 팽철을 죽인 자는 야차왕이고, 당가의 가주 천독사자와 대등한 싸움을 하는 자는 애염명왕이란 말이렷다.”

이것이 제갈선이 이번 전투를 반대한 이유였다.

‘너무 모른다. 저들에 대해서!’

적들은 오대세가 가주와 장로들의 신상은 물론, 어떤 무공을 쓰는지까지 샅샅이 안다.

반면에 백도는?

당장 하북팽가 가주 팽철을 죽인 야차왕은 여기에 와서 처음 듣는 작자다.

천독사자와 싸우고 있는 애염명왕 역시 마찬가지다.

‘자고로 적을 모르면 알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하는 법이거늘……!’

하나 남궁조는 한 번쯤 전투를 치러 적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물며 귀마와 독마, 혈불과 천광마까지 천무백이 죽였단 사실이 백도 진영 전체에 퍼졌다.

사기는 치솟았고, 한번 붙어볼 만하다는 심리가 말단 무사까지 퍼졌다.

‘하긴, 나라고 저기에 야차왕이든, 애염명왕이든, 이런 놈들이 있으리라고 여겼던가.’

자신 역시 명백히 실수했으니, 누구를 탓하기도 어려웠다.

제갈선은 이를 악물고 전투를 지휘했다.

“철장군주께서 적들의 혈사왕이란 놈을 죽였습니다!”

“오! 모용수가!”

제갈선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쪽에서 하나가 죽었으니, 저쪽에서도 하나가 죽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제갈선은 이 전투를 어떻게든 마무리해야 한다고 느꼈다.

사십 년 전 정마대전에서 익힌 전장의 감각.

그 감각이 거짓 없이 속삭였다.

‘지거나, 이기더라도 아무 성과 없는 상처뿐인 승리가 될 거다.’

적절한 시점에서 물러나야 한다.

몇몇 무사가 불만을 품겠지만 제갈선에게 불만을 피력할 담대한 자는 몇 없다.

그렇게 상황을 주도면밀히 살피던 제갈선은 불현듯 목덜미를 스치는 싸늘한 감각에 흠칫 몸을 떨었다.

전략가이자 위대한 진법가이지만, 그 역시 무인이다.

제갈세가를 엄연히 무가(武家)로서의 정체성을 확립시켰다고 평가를 받는 위인이 아니던가.

오감이 찌르르 경고를 머릿속에 전달했다.

제갈선이 마차에서 벌떡 일어나 학우선을 휘둘렀다.

꽈앙!

학우선에 맺힌 강기가 어느 한 지점에 작렬했다.

근방의 무사들이 깜짝 놀랐지만, 이내 무슨 상황인지 재빨리 파악하고 검을 잡고 경계했다.

이내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사내의 모습에 무사들이 경악했다.

“마인!”

“마인이 여기까지 어떻게!”

마인의 무복을 입고 가면을 쓴 사내가 오롯이 서 있었다.

사내의 눈이 가면 너머에서도 자신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것이 느껴졌다.

“…….”

한데 제갈선은 왠지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쩐지 눈에 익숙한 체구, 느껴지는 분위기, 사내의 태도까지.

언제였던가.

이런 느낌의 압박감을 한번 받아 본 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때의 기억은 워낙 강렬해서 다 늙은 지금에서도 머릿속에 생생했으니까.

‘창천검신 어르신께서 나 때려잡겠다고 우리 세가의 수가기문도 다 박살 내고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이런 구도와 압박감이었던 것 같은데.’

왜 이런 생각이 들까.

제갈선은 그것이 저 사내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살의(殺意)를 품었기 때문이라 여겼다.

아니 그러겠는가.

마인이 여기 제갈선에게까지 경계를 따돌리고 침투한 이유가.

제갈선은 학우선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놈을 죽여라.”

그 순간, 사내의 눈썹이 호선을 그렸다.

머릿속에서 전음이 울렸다.

‘그쪽이 먼저 공격한 거요, 이젠 정당방윕니다. 정당방위. 응?’

……네가 왜 거기에 있어?

익숙한 목소리에 제갈선의 눈이 동그래졌다.

* * *

콰직, 콱, 푹!

“커헉!”

천무백은 앞을 막아서는 제갈세가 무사들을 단숨에 제압했다.

갑작스런 상황에서도 벽을 만들어 제갈선을 지키려는 움직임은 과연 정예무사들 다웠다.

하나 천무백이 너무 늦게 발각된 게 문제였다.

이미 제갈선에게 충분히 가까워진 거리라 벽을 세워봤자 얄팍했을 뿐이다.

‘비켜라, 비켜.’

혈도를 짚고, 관절을 꺾거나 뒷목을 후리면서 무인들을 빠르게 제압했다.

‘그래도 죽일 수는 없지. 제갈소저 얼굴을 봐서라도.’

어쨌든 같은 편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따지면 다짜고짜 제갈선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천무백의 행태가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이게 내 방식대로 하는 건데 뭐가 문제야? 지금까지 했던 거 그대론데.’

놀랍게도 천무백은 조금의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이게 천무백의 방식이다.

전투를 끝내려면 우두머리를 쳐야 한다. 지금까지 천무백이 늘 고수해 오고, 실제로 사용한 방식.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굳이 마도의 우두머리일 필요는 없지. 이쪽이 빠르잖아?’

천무백은 단숨에 전투를 지휘하는 자가 제갈선임을 꿰뚫어봤다.

즉 제갈선만 여기서 무력화되면, 남궁조는 급하게 싸움을 마무리 짓고 물러날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천무백은 곧장 움직였다. 단숨에 길을 막는 무사들을 전부 제압하고 제갈선 앞에 섰다.

제갈선은 당황한 얼굴로 천무백의 가면을 노려봤다.

“너…… 너…… 천무……!”

“어허, 쉿, 쉿, 쉿.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럽니다. 그러니까 조용히 갑시다.”

천무백은 거침없이 제갈선의 혈도를 짚었다.

제갈선은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원래의 제갈선이라면 이렇게 단숨에 허망하게 제압될 리가 없다.

하나 천무백의 전음을 듣고, 천무백이란 사실을 깨달은 제갈선은 차마 거칠게 반격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왜 날 공격해?

-내가 다 생각이 있습니다. 태상가주께서 나를 좀 도와줘야 하고, 태상가주도 이 전투가 일단 끝나야 하는데 동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전투를 끝내기 위해서 날 잡겠다고?

제갈선이 속으로 입을 쩍 벌렸다.

생각지도 못한 이유였다.

자신 역시 전투가 어떻게는 일단 끝나야한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래서 어떻게 마무리할지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이 자식은 자신을 잡아서 전투를 끝낸다는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말도 안 나오는 얘기지만, 확실한 방법이긴 했다.

총지휘관인 제갈선이 당하면 백도는 당황하며 일단 물러나서 추스르려고 할 테니까.

하나 천무백의 진짜 목적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그거야 부차적인 이유고, 진짜 이유는 날 좀 도와서 진법 하나 만들어 줘야겠습니다.

-진법? 지금 이게 합리적인 움직임이고 행동이더냐? 대체 이게 무슨…….

-태상가주 손녀딸을 도와준다고 생각하세요.

-뭐? 설아가 너랑 있어?

-나랑 같이 마도 진영에서 밥 먹고 일하고 그렇게 있습니다.

-억!

혈도가 안 집혔으면, 그대로 뒷목을 잡고 쓰러질 듯한 제갈선이었다.

천무백은 빳빳하게 굳은 제갈선을 둘러업고 단숨에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 소식은 찰나에 퍼졌다.

“괴이천뇌께서 납치 당하셨다!”

“제갈선 어른께서 사로잡히셨다!”

전장을 가로지르는 끔찍한 소식.

모든 이들의 고개가 확 돌려졌다. 그들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천무백이 제갈선을 들쳐 메고 경공을 밟는 모습이.

당연히 그걸 막아 세우려는 칼이 여기저기서 솟구쳤다.

따다다다당!

“……!”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칼솜씨였다. 한손으론 제갈선을 받친 채, 나머지 한손으로 검을 휘둘러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검을 모조리 쳐 내는 귀신같은 솜씨.

모두가 아연한 얼굴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그때였다.

후우우우웅!

‘……위험!’

빠르게 도주하던 천무백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미친 듯이 울렸다.

전신의 감각이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천무백의 신경망을 파고들었다.

엄청난 위협이 다가온다는 건 느낀 건 찰나. 거의 동시라고 볼 수 있는 시각에 천무백의 눈앞에 한 사람의 신형과 검이 불쑥 나타났다.

‘남궁조!’

검성(劍星)이란 별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강맹한 위력.

천무백은 이를 악물고 철신고검으로 맞받아쳤다. 단숨에 떨쳐내고 도주하기 위해 있는 힘껏 일월기를 담았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천무백은 충격파에 몸을 실어 단숨에 공간을 뛰어넘었다. 반면에 검을 휘두른 남궁조는 충격받은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

한차례 충돌로 천무백은 거리를 벌린 뒤 멀어졌다.

까마득한 점으로 변해 버린 천무백의 뒷모습에 남궁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파르르르.

검을 잡은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 * *

“어후, 쎄긴 쎄네.”

천무백이 툴툴대며 제갈선을 내려다놨다.

어느새 전장을 벗어나 마인들의 진채에 도착한 것이다.

천무백이 도착하자 제갈설아와 장노가 황급히 뛰쳐나왔다.

한참 전투중인데 천무백만 귀환한 사실에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혹시 무슨 큰일이 벌어진 건가 싶어서 급히 나왔다.

큰일은 맞았다.

제갈설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할아버지?!”

빳빳하게 굳은 제갈선을 보고 제갈설아가 급히 제갈선을 부축했다.

“뭐, 뭐예요. 왜 이래요? 누구한테 당한 거예요? 그래서 구해 오신 거예요? 괜찮은 건가요?”

제갈설아가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질문을 연이어 던졌다.

천무백은 머쓱한 얼굴로 턱을 긁었다.

“어, 그러니까 누구한테 당한 거라면…….”

그게, 일단 내 손으로, 그러니까 일단 내가 잡아온 것이니까 나한테 당한거긴 한데.

왠지 있는 그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에 천무백은 말했다.

“진법 만드느라 힘들지 않소?”

“네? 그거야 당연히, 쉬운 진법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모셔 왔소.”

“…….”

제갈설아가 침묵했다. 혈도를 짚은 채, 부릅떠진 두 눈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버린 제갈선.

그러니까 이게……

“모셔…… 온 거라고요?”

“소저에게 큰 조언을 해 주고, 도움을 줄 수 있으니 내 직접 전장에서 모셔 왔지.”

제갈설아는 제갈선의 억울하게 부릅뜬 눈을 쳐다봤다.

이건 모셔 온 게 아니라……

“납치한 거 아닌가요?”

“그게 나쁜 건 아니잖소?”

나쁜 거 맞는데…….

제갈설아는 혼란에 빠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