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304화 (304/318)

<검신재생 304화>

304. 진짜 죽여 준다?

천무백을 싸운 경험담은 강호에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천룡검협이 검을 그렇게 잘 쓴다면서? 어떤 검이래? 패검? 중검? 연겸?’

‘검법은 어떤 걸 익혔대?’

‘대체 무슨 검술을 쓴다는 거야?’

‘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호사가들이나 고수들은 천무백의 명성이 높아지자 각기 분석에 들어갔다.

개방이나 하오문 같은 정보단체는 물론이고, 여러 문파들 역시 마찬가지다.

천무백이 창천검신의 후인임을 아는 극히 일부는 천무백의 검이 어떤 유의 검인지 대략이나마 파악했지만, 강호의 절대다수는 천무백의 검이 무엇인지 설명조차 할 수 없었다.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건 그렇다 칠 수 있다. 본래 자신의 무공에 대해선 삼 할을 감추는 게 강호의 기본이지 않았던가.

하나 문제는 감상과 경험담 역시 거의 극비나 다름없다는 사실이다.

‘그럼 그 검을 맞상대해 본 사람은 뭐래?’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은 들었대?’

‘……왜 이것도 아는 사람이 없어?’

이유는 당연하다.

서걱.

“끄르륵.”

천무백과 검을 맞댄 이는 전부 살아남지 못하니까.

감상이고 뭐고 말할 사람이나 있겠는가. 천무백과 싸운 경험담이 시중에 돌아다니지 않는 이유였다.

그래도 죽기 직전까지의 감상은 머릿속에 있었다.

다만 세상에 밝힐 수 없을 뿐.

‘대체 뭐야, 이 귀신같은……!’

현란하지도, 폭발적이지도, 무작정 빠르다고 느껴지는 검도 아니다.

‘유령 같다.’

그런 감상을 마지막으로 마인은 가슴을 꿰뚫는 격통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검이 심장을 관통해 버렸다.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는 즉사였다.

“진을 형성해라!”

“고수다! 엄청난 고수야!”

“아니, 쟤 입고 있는 옷이 우리랑 똑같은데?”

“심지어 마기를 뿜어내고 있잖아?”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천무백은 착실히 마인의 숫자를 줄여나갔다.

물론 점점 부하가 심해졌다.

마인들도 목숨이 경각에 달한 걸 깨닫자, 없는 힘까지 쥐어 짜내며 집중력을 최고조로 발휘했다. 단결하여 진을 만들어 대항했다.

천무백이 미간을 좁히며 버럭 소리쳤다.

“어이, 철장군준지 뭔지, 지금 상황 파악 안 돼?”

“……!”

넋을 놓고 상황을 지켜보던 모용수의 몸이 벼락이라도 치듯 움찔했다.

“지금 내가 당신 도와주고 있는 거 안 보여? 살려 줬으면, 어? 빨리 정신 차리고 칼질해야지. 하여튼 오대세가 가주란 놈이 빠져 가지고.”

“아니…….”

지금 이런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움직여?

그런 말이 턱까지 솟구쳤지만, 모용수는 우선 철장을 쥐고 휘둘렀다.

정체가 뭔지, 왜 갑자기 배신하고 동료들을 베는지, 의문이 한가득하지만 당장 중요치는 않다.

‘적어도 지금은 아군이다!’

모용수는 성난 맹수처럼 철장을 마구 휘둘렀다.

얼핏 보기엔 노인이 쓰는 지팡이 같지만, 통짜 강철로 만들어진 철장은 사람 두개골쯤은 우습게 부술 정도의 파괴력을 지녔다.

콰직!

모용수가 작심하고 철장을 휘두르자 마인들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힐끔 계속 천무백을 살폈다.

분명 자신을 도와주고 있지만, 어쨌든 마기를 뿜어내고 있는 작자다.

정체를 확인해야 한다. 어떤 목적인지는 몰라도 적으로 돌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의심의 시선으로 힐끔거렸지만, 이내 모용수의 시선은 바뀌었다.

감탄과 탄식의 눈빛으로.

‘초식과 형, 투로 자체가 모조리 제멋대로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공격의 연속이다.

초식도, 형체도, 투로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처음 검을 잡는 사람이 마구 휘두르는 게 저러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도 막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휘두르는 철장은 피하거나 막아 내는 놈들이 한둘쯤 있다.

하지만 저 검을 피하거나 막아 내는 놈은 단 하나도 없었다.

여지없이 일격에 필살(必殺).

‘엄청난 고수야.’

만일 저자가 갑자기 적으로 돌변한다면?

모용수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단숨에 진을 유지하던 마인들을 전부 죽여 버리자, 무서울 정도의 침묵이 가라앉았다.

모용수는 경계의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천무백이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썅, 이게 예의를 밥 말어 처드셨나.”

“……뭐?”

“구해줬더니 고맙다고 하지 못할망정 노려 보고 자빠져 있어? 어디, 오늘 모용세가가 장례 치르게 해 줄까?”

모용수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움찔했다.

“당신, 누구야?”

“보면 몰라? 위기에 빠진 약자를 구한 그런 거?”

“약자라니…….”

“당장 뒈질 위기에 처해 놓고 약자 아닌 척하지 마.”

날 것 같은 천무백의 어조에 모용수는 그만 말을 잃었다.

방금까지 마인들을 거침없이 죽여 냈던지라 살기가 그득했다.

제아무리 모용수라도 살기등등한 채 피로 점철된 천무백에게 큰소리칠 수 없었다.

자신보다 강한 고수라는 건 두 눈으로 봤을뿐더러, 어쨌든 도와준 사람이 아닌가. 적으로 돌변할지는 모르지만,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굳은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수요. 철장군주란 허명으로 강호를 살고 있소.”

“허명(虛名)이긴 하더라. 무슨 호법마왕도 아니고 그냥 마인들한테 쩔쩔매냐.”

“……그대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올리오, 이 부족한 놈이 큰 은혜를 입었소.”

모용수는 비교적 오만한 면모가 있지만, 그거야 오대세가의 가주로서 가진 당연한 성정일 뿐이다. 하나 그 역시 강호 경험이 녹록지 않은 인물로서 판단력은 좋았다.

‘이만한 고수를 적으로 돌리는 건 미련하고 멍청한 짓이다. 좋은 관계는 유지하진 못하더라도, 적으로 만들면 안 돼.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 게 세상의 이친데, 허리 한번 못 숙이랴.’

천무백 역시 모용수의 생각을 꿰뚫어 봤다. 나름 빳빳한 성정이 아니라 굽힐 땐 굽힐 줄 아는, 제법 유연한 인사임을 확인했다. 천무백의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졌다.

“형씨가 이해하시오, 응? 내가 여기저기 쏘다니느라 허리가 쑤셔대 아주. 거, 휘하 무사들 수련 좀 열심히 시키지 그랬어? 죽을 뻔한 놈들 구해 주느라, 아휴.”

“……그대는 백도의 인물이오?”

보아하니 자신뿐 아니라 위기에 처한 백도 무인들을 구해 주고 다니는 듯했다.

모용수의 질문은 당연했다. 하나 천무백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아니, 나는 마인이오.”

“마인이 왜 백도를 도와준단 말이오?”

“그거야 내 마음이지. 내가 내 맘대로 한다는 데 허락받아야 하나.”

할 말이 없었다. 모용수는 일단 이 자를 백도 진영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자신은 몰라도, 이 전투를 총지휘하는 괴이천뇌, 제갈선이라면 알아낼 방도가 있으리라.

그렇게 말을 꺼내려는 찰나.

천무백이 갑자기 신음을 토하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이보시오, 이봐!”

모용수가 깜짝 놀라 다가갔다.

설마 싸움 도중에 내상을 입었나?

하나 그때 천무백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죽은 척하라고, 죽은 척!

“……뭐?”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서 머릿속에 때려 박아도 얼 때리네. 죽은 척하라고, 아니면 내가 진짜 죽여 준다?

살벌한 협박에 모용수는 바닥에 풀썩 누웠다.

그러자 천무백이 살벌하게 눈을 뜨고 쳐다봤다.

-똑바로 안 해?

“…….”

천무백은 그러면서 주위에 흥건한 핏물을 온몸에 묻혔다.

그걸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모용수도 어색하게 따라 했다.

-제대로 해라. 안 그러면 진짜 죽여 버릴 테니까. 죽은 척하는 게 낫잖아?

‘대체…….’

움직임이 멈추고, 호흡도 멈추고, 맥박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세해지는 그야말로 ‘완벽한’ 귀식대법을 본 모용수는 말을 잃었다.

* * *

“별거 아니었군.”

전장에 뛰어든 호법마왕 중 일인, 혈사왕(血獅王)은 눈을 가늘게 떴다.

깡마른 체구였지만, 그가 내뿜는 기세는 단숨에 주위를 휘어잡았다.

황금빛 안광이 지면 곳곳을 훑었다.

“대략 사십 명이 죽은 건가?”

바닥에 쓰러진 마인들의 시체.

시신들의 위치를 보니 입신지경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이뤄진 진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철장군주 모용수의 시신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사십 명이 죽고 모용세가 가주 하나 죽인 거면, 남는 장사야.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지만, 아직 다른 가주들이 남아 있으니까.”

아까운 먹잇감이었지만, 마인들 사십 명의 목숨과 맞바꿨으면 아주 좋은 교환이었다.

그리 생각하던 혈사왕은 불현듯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

흘깃 시신들의 상처를 보다가 특이점이 보였다.

“이건 둔기에 깨지거나 박살 난 흔적이니, 철장군주에게 죽은 게 맞다. 대략 열다섯 구가 이런데, 나머지 스물다섯 구는…… 검상?”

혈사왕의 얼굴이 무서운 속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였다.

후웅!

“죽어랏!”

귀식대법을 펼치고 있던 모용수가 철장을 벌떡 세우며 휘둘렀다.

혈사왕의 반사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감각이 공기의 흐름이 변하는 걸 인식하자마자 신체가 기계처럼 작동했다.

하나 기습을 한 모용수 역시 입신지경의 고수.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강맹한 강기에 혈사왕은 급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혈사왕이 충혈된 눈동자로 일갈했다.

“백도 고수란 놈이 치졸하구나! 죽은 척하고 기습을 해?”

“닥쳐라! 누가 하고 싶어서 한 줄 아느냐!”

콰아아앙!

일대 격돌에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시신들이 터져나가 피와 살점이 난무했다.

“큭!”

혈사왕은 창백해진 얼굴로 시커먼 핏물을 토하며 물러났다.

기습한 모용수 역시 편치 않은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기습이란 치명적이다. 하물며 비슷한 경지의 적에게 당한 기습은 더욱더.

지금의 상황이 그랬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높은 경지의 고수에게 기습을 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바닥에 쓰러져있던 천무백이 유령처럼 일어났다.

뒤늦게 천무백의 존재를 눈치챈 혈사왕이 급히 몸을 돌리려는 찰나.

서걱—

“……!”

온몸의 감각이 희미해지며, 그가 마지막으로 느낀 건 자신의 목이 잘렸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유언도, 단발마의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채, 마교의 호법마왕 혈사왕은 죽었다.

“크. 이 맛에 기습하지.”

천무백이 칼을 슥슥 닦았다.

모용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기습이었다고 해도, 단칼에 목을 잘라……?

“별로 어려운 거 아니야. 오직 당신한테만 집중하고 있는데, 별안간 죽은 줄 알았던 시신이 칼 들고 뒤에서 목을 베는데 어떻게 막아?”

그것도 자신보다 고순데 말이야.

아무렇지 않게 혈사왕을 제거한 천무백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삼십육계 중 하나인 죽은 척했다가 뒤통수 후리기다.”

“……삼십육계 중에 그런 게 있었나?”

“하여튼 이래서 백도가 문제에요. 전장에 나서는 놈이 병법도 공부 안 해? 쯧쯧, 요즘 어린 것들은…….”

“어린 것들이라니…….”

“나 때는 말이야. 어? 유명한 병법가라면 선물을 싸들고 가서 배움을 청했단 말이야. 이젠 그러지도 못할망정 책도 안 읽으니. 말세다, 말세야.”

“…….”

아니, 어떤 병법에 죽은 척했다가 뒤통수치라는 게 있냐고.

그때였다.

별안간 저 먼 곳에서 환호성과 비명이 터졌다.

“야차왕이 하북팽가의 패천일도 팽천을 죽였다!”

“패천일도 팽철이 죽었다!”

팽철의 머리가 깃발에 꽂힌 채 높이 솟구쳤다.

마인들의 함성이 전장을 울렸다. 반면 백도 무인들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천무백이 혀를 찼다.

“쯧쯧. 나 안 왔으면 당신도 깃발에 머리가 꽂혀 있었을 거야.”

“…….”

“이거야 원, 이쪽에서 하나 죽이니 저기서도 하나를 죽이네.”

천무백은 미간을 좁혔다.

역시 쉽지 않은 싸움이다.

이 전투가 지속되면, 백도가 무조건 지지는 않겠지만 심각한 손해를 입으리라.

아직 더 버텨 줘야 한다.

‘그러려면 이 전투를 우선 끝내야 해.’

전쟁을 끝내지는 않더라도, 지금의 전투는 끝내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천무백의 방식.

적들의 우두머리를 전부 벤다.

하나 이 넓은 전장에서 우두머리만 요격하고 다니는 건 쉽지 않다.

아무리 천무백이 유령처럼 움직인다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천무백은 생각을 달리했다.

그의 시선이 백도 측에 향했다. 정확히는 제갈세가를 향해.

이 넓은 전장을 지휘하는 건 남궁조가 아니라 당연히 제갈선이었다.

“……흠.”

그 늙은 얼굴을 보자 별안간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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