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03화>
303. 괴짜 놈들 다 오네
정연한 모습의 무사들이 도열한 광경은 과연 장관이었다.
특히 강호에 발을 걸친 사람이라면, 의복과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리라.
천무백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왼쪽엔 검은색 무복을 갖춘 무사들, 그 제일선에 흉흉한 눈빛의 장년인이 서 있었다.
바로 옆의 깃발이 바람에 거세게 펄럭였다. 깃발에 적힌 글자가 존재감을 널리 알렸다.
모용세가(慕容世家)
철장군주(鐵杖君主) 모용수.
“철장군주라면 모용세가 가주지?”
“듣기론 백도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라던데.”
“최근 입신지경을 돌파했다는 소리가 있어. 그쪽에 광종의 소수 정예가 갔는데 박살이 나서 피해도 못 입혔다는구먼.”
“모용세가 놈들은 특출난 건 없어. 그렇지만 온갖 것들이 다 보통 이상이야. 검이고, 도끼고, 도며, 무슨 무기든지 보통 이상은 잘 다루니까 오히려 다양한 공격이 가능한 놈들이지. 그런 만큼 까다로운 놈들이니 저 검은 무복과 싸우면 단단히 주의해라.”
주위에서 분분히 들리는 대화에 천무백은 미간을 좁혔다.
‘생각보다 자세히 알고 있어. 사십 년 가까이 새외에서 웅크린 놈들치곤 말이야.’
물론 중원에서 암약한 혈귀곡의 잔당들이 흘러 들어갔으니 충분히 알 법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백도에 세작이 있거나, 관망하고 있는 정사지간이든, 어느 곳이든 마도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겠지.’
당연한 예상이다. 백도무림이라고 모든 사람이 일심단결하여 뭉치는 건 아니니까.
어디든 욕심에 눈이 머는 자는 있고,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역사에 수도 없이 많지 않았던가.
인간이란 늘 합리적인 존재는 아니니까.
천무백의 시선은 이내 옆으로 향했다. 입을 가리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장년인.
그러나 번쩍이는 시퍼런 안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두려움을 안겨줬다.
사천당가(四川唐家)
천독사자(天毒使者) 당천무.
녹의를 입고 면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이들은 다름 아닌 당가의 정예들이었다.
“저쪽은 되도록 부딪치지 마. 독종 친구들이 상대할 거니까.”
“끙.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괜히 독기라도 들이마셨다가 골로 가니까.”
“마도나 백도나 독 쓰는 놈들은 상대하기 싫다고.”
“난 저기 머리 쓰는 놈들이 더 싫은데.”
제갈세가(諸葛世家)
괴이천뇌(怪人天腦) 제갈선.
“저 노인네 사십 년 전 무림맹 군사였던 놈 아니야?”
“노괴가 직접 나왔군.”
“제갈세가가 무공이 약하다 해도, 저 노인네는 조심하라고.”
천무백은 정면에 학우선을 든 채 마차에 앉아 있는 제갈선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가주인 제갈여강이 정의맹의 군사로 있으니, 병력을 이끌고 나온 건 저 노인네로군.’
새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제갈선까지 나오는 걸 보니, 백도가 단단히 준비했구나 싶었다. 천무백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한판 싸움에서 백도가 작정하고 나온 것 같은데, 이기지 못하면 치명적이다.’
그야말로 끔찍한 가정이다. 천무백은 복잡한 눈빛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고 있는 옷 너머로 꿈틀거리는 근육이 느껴지는 외공의 고수.
하북팽가(河北彭家)
패천일도(霸天一刀) 팽철.
‘보기 드문 양반까지 나왔구만.’
비교적 군문(軍門)과 연이 깊은 하북팽가까지 무사들을 이끌고 나오다니.
천무백은 새삼 탄식을 터뜨렸다. 하북팽가는 관과 무림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불문율 때문에, 과거 정마대전 때도 움직이지 않았던 이들이다.
그 결과 백도에서 백안시되어 오대세가에서 이름이 빠졌지만, 사실 말만 그런 것뿐이다.
다른 오대세가들이 정마대전으로 피해가 크다 보니, 손실 하나 없던 하북팽가는 오대세가로 군림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저번 대전에서도 꿈쩍하지 않던 하북팽가마저 움직였단 사실에, 마인들도 웅성거렸다.
“이거 진짜 오대세가가 다 나섰잖아?”
“저길 보라고, 저기.”
하나 마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일단의 무리만큼은 정면에서 마주하기 싫다는 표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대(大) 남궁세가(南宮世家)
검성(劍星) 남궁조.
회색빛 머리칼 아래로 부리부리한 눈에서 번쩍 시퍼런 안광이 쏟아졌다.
남궁조의 결연한 얼굴에 주위가 웅성거렸다.
그야말로 압도적 존재감이 전장을 장악했다. 숨 막힐 것 같은 기세가 마인들이 내뿜는 흉흉한 분위기를 단번에 제압하고 짓눌렀다.
자신이 왔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숨길 생각이 없는 듯,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과연 유백기가 새외로 모습을 감춘 사이, 강호가 천하제일인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었다.
‘입신지경을 넘어 절대지경에 닿았군.’
새삼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사십 년 전 유백기를 보고 수없이 좌절했던 녀석이, 포기하지 않고 정진하여 저토록 높은 경지에 오르다니.
‘저 녀석이 오대세가를 닦달해서 모이게 한 거야. 그래서 하북팽가나 사천당가나 엉덩이 무거운 이들이 나섰지.’
듣기론 중원에 오대세가가 아니라 유일(唯一)세가로 남궁세가만 남을 거라며 겁박 아닌 겁박을 했다던가.
그만한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있었다.
남궁조 개인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남궁 씨가 적힌 무복의 무인들은 하나같이 정예하기 짝이 없었다.
‘이거 잘하면 이 한판 싸움에서 백도가 크게 이길 수도 있겠는데?’
천하의 천무백도 내심 그런 기대를 할 정도로 백도의 세력은 확실히 대단했다.
비단 그런 짐작은 천무백만 한 게 아니라, 마인 진영에 은연중에 넓게 퍼지고 있었다.
하나 그때였다.
“일류 무사를 잡으면 황금 일 관을, 절정을 잡으면 황급 다섯 관을, 장로를 잡으면 열 관을, 저기 남궁조를 잡으면 백 관과 내 직접 무공을 전수해 주마.”
낮지만 동굴처럼 깊게 울리는 목소리가 울러 펴졌다.
그러자 어수선하던 마인 진영의 분위기가 단번에 바뀌었다.
“단명왕(短命王)이 오셨다!”
단명왕.
8척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신장의 민머리 거한은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뒤바꿨다.
천무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단명왕이라…….’
과거 정마대전 때는 등장하지 않았던 위인이다.
하긴, 지금 아무리 잘 봐줘야 쉰이 되지 않는 비교적 젊은 나이로 보이니까.
단명왕이란 별호는 천무백도 마인 진영에 잠입하고 나서야 들었던 이름이다.
‘천마의 호법장로들 중 하나.’
천마의 호법장로들 여섯 명을 호법마왕(護法魔王)이라 하던가.
그들 중 하나였다.
비단 단명왕뿐만이 아니었다.
오 척의 짤막한 노파가 단명왕 옆에 섰다.
“귀자모왕(鬼子母王)이야.”
그 노파는 천무백도 아는 얼굴이었다.
‘늘 군천악 곁에 있던 그 노파로군. 그때도 호법장로였지. 이젠 왕이란 별호를 얻었군.’
이어 세 명이 더 등장했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사나운 얼굴의 여자는 애염명왕(愛染明王).
단명왕만큼 우락부락한 체격의 야차왕(夜叉王).
깡마른 체구지만 황금빛 광채를 내뿜는 눈동자의 혈사왕(血獅王).
천마의 곁을 지키는 여섯 호법마왕 중에 다섯이나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괴짜 놈들 다 오네. 하나는 없는 거 보니, 천마랑 따로 있나?”
어쩌면 다행이리라.
이 자리에 천마와 나머지 호법마왕까지 왔다면…….
‘구파일방의 정예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지금, 오대세가는 전멸할 테니까.’
천무백은 유심히 맞은편의 분위기를 살폈다. 이내 그의 표정이 다소 복잡해졌다.
‘이거…… 잘못하면 일 나겠어.’
백도 진영의 표정을 보면 감정변화가 크지 않았다.
비단 무사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휘관들인 가주들도 마찬가지.
단순히 긴장하지 않아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호법마왕들이 무서운 게 아니라서 반응이 미약한 게 아니다.
‘모른다. 아예 몰라.’
기껏해야 귀자모왕을 보고 제갈선과 남궁조가 표정을 찌푸렸을 뿐, 나머지 호법마왕들을 알아보는 눈치는 단 조금도 없었다.
‘반면에 마도는 백도의 인물에 샅샅이 안다. 저기 있는 자들에 대해서 전부.’
당장 오대세가의 깃발이 펄럭일 때, 어수선해지던 분위기가 그걸 증명한다.
반면 백도는 아니다.
이건 곧 치명적인 약점이다.
저들은 백도의 인물들, 고수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 당장 천무백 근처에서 자세하게 얘기를 풀어놓는 중간 간부급도 어떤 무공을 익혔고, 특징이 무엇인지 줄줄 읊고 있지 않은가.
백도는 아니다.
다섯 명의 면면을 보면서 천무백은 미간을 좁혔다.
‘이 싸움…….’
사실 처음 남궁조를 비롯해 제갈선까지 튀어나온 걸 보고, 이번 싸움에서 백도가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피해도 크겠지만 적어도 여기 모인 마인들의 절반이 궤멸할 것으로 봤다.
하나 지금 눈앞에 나온 호법마왕들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하나같이 적어도 귀마에 근접한 놈들이야.’
특히 무엇보다 대머리 거한, 단명왕(短命王)이라 불리는 작자는 놀라울 정도였다.
‘남궁조와 호각을 겨루겠군. 단 미세한 차이가 승부를 가를 거다.’
천무백은 조용히 생각하며 표정을 굳혔다.
‘이 싸움, 이대론 진다.’
그렇다면.
내가 결과를 바꾼다.
천무백의 신형이 마인들 사이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마치 그 속에 스며들어서 하나가 되는 것처럼.
* * *
전장은 시시각각으로 급박하게 변했다.
처음에는 오대세가 측의 우세였다. 무사들의 질적 수준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각 세가가 길러 낸 최정예 무인들이 나온 만큼, 아무리 이곳에 모인 마인들이 고수들이라 해도 수준 차이가 명백했다.
하나 백도진영의 얼굴이 밝아지지는 않았다.
비교적 오대세가에 비해 수준은 떨어지지만, 마도의 숫자는 적어도 오 할은 더 많았으니까. 그야말로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마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물론 오대세가의 무인들도 마찬가지다. 어찌 됐든 모두 하나같이 마도를 섬멸하고자 모인 의기에 찬 무인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무인들을 이끌고 온 장로들을 비롯한 수뇌부의 심정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잘못하면 전쟁 후에 우리 세가의 힘이 약해진다!’
대놓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런 마음을 은연중에 갖고 있던 것.
수뇌부들이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소극적인 운용이 이뤄졌다.
아주 조금씩 오대세가가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궁조가 거칠게 노호성을 터뜨렸다.
“물러서지 마라!”
그리 소리치며 직접 검을 들고 전장 한복판에 난입한 남궁조는 흡사 한 마리의 사자를 보는 듯 격렬했다.
남궁조의 외침은 휘하 무인들이 아니라, 엄연히 소극적인 행태의 장로들과 가주에게 한 것임을 모를 자가 없었다.
결국, 오대세가의 가주와 장로들이 직접 나섰다.
차차차차창!
“이런 같잖은 마도 잡졸놈들이……!”
철장군주, 모용수는 이를 악물고 강철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거칠게 휘둘렀다.
단숨에 마인 하나의 머리통이 무참히 깨졌다.
그런데도 모용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진 채 펴지지 않았다.
빈자리를 금세 다른 마인들이 메꿨으니까.
자신이 움직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차륜전을 행하는 저들의 행태에 모용수는 이를 악물었다.
하필 신나게 싸우느라 호법 장로들과 거리가 멀어진 틈을 비집고, 절정으로 이뤄진 마인들이 진을 만들어 대항한 것이다.
그것도 상대하기 어려운 차륜전(車輪戰).
벌써 모용수의 철장(鐵杖)에 일곱 놈이나 머리가 깨졌지만, 그 자리를 새로운 절정 마인이 채우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허벅지에 깊게 베인 자상이 점점 움직임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거 자칫하다가 내가 먼저 죽겠구나.’
몸을 빼야 하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다.
‘백도의 입신지경 고수를 잡기 위해 만들었다는 진이 있다더니, 이것인가?’
소문으로만 들었지, 자신이 그것에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용수는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이대로면 죽는다.
자신이 죽으면 모용세가는 무너진다.
그 끔찍한 가정에 몸이 절로 떨렸다.
‘어쩔 수 없다. 살을 내주더라도 기회를 만들어 몸을 빼야 한다.’
결단과 동시에 철장이 공간을 갈랐다.
빠각!
마인 하나의 가슴팍이 터져나가며 뒤로 쓰러졌다. 모용수가 그 사이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진을 유지하던 마인들의 수십 개의 칼날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 모든 공격을 감수했다. 호신강기가 깨져나가고 칼날이 온몸을 베었지만, 치명상만 피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전신이 피로 점철된 채, 모용수는 몸을 날렸다.
“됐다…… 이런!”
진에서 빠져 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마치 유령이 불쑥 나타난 것처럼 한 마인이 빈자리를 차지했다.
동시에 검이 번쩍였다. 모용수의 등골이 짜르르 울렸다. 온몸의 근육이 긴장감을 팽팽해졌다.
‘……고수다! 일대일로도 당장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본능적으로 체감되는 고수의 기세.
모용수는 화들짝 놀라 철장을 휘둘렀다.
한차례 휘둘려지는 검에 담긴 태산 같은 기세를 읽은 것이다.
하지만 검은 자신의 철장으로 맞받아치기엔 너무나 빨랐고, 위력적이었다.
‘살을 내주려다가 뼈를 내주겠구나!’
뒤늦은 후회가 머릿속에 치밀 때.
“……!”
쭉 뻗었던 검이 마치 뱀처럼 흐물거리며 진로를 바꾸었다.
흡사 기괴한 광경이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며, 검이 별안간 옆에 있던 다른 마인의 목에 박혔다.
“……!”
순간 미친 듯이 검격을 쏟아 내던 마인들이 일제히 우뚝 멈춰 섰다.
“아이, 칼이 왜 이리 자꾸 미끄러진담.”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모용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